2024년 5월 2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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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현성당 탄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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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문 [kmjoseph] 쪽지 캡슐

2000-11-29 ㅣ No.345

탄현! 파주의 통일 동산이 <탄현>이고 또 다른 일산의 탄현은

에스비에스 제작소가 있는 일산의 북부 지역에 탄현지구가 있다.그 곳에 성당이 생겼다.

2000년 9월24일에 시작되었다.

 

+탄현성당의 탄생 기록!! ++

 

 

 

행주나루터가 고양에 천주교의 씨를 뿌리다.

 

 

 

일산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일제가 침략을 위해 광적인 자세로 동남아 중국 그리고 러시아 까지 침략의 야욕에 불붙던 1905년 행주나루터에서 싹을 내린다. 당시의 행주나루터는 한강을 통해 황해도 멀리 평안도등 전국의 수로를 통한 문물이 오가는 주요 거점이었다.여기를 오가는 천주교인들의 신앙의 씨를 행주나루터에  뿌렸다.그것은 서울교구에서도 9번째이고 한국천주교 사상 28번째의 성당이었다.그후 1935년 일제말기에 들어간 시기는 그야말로 모진 탄압으로 교회가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인적 물적인 박해에 도저히 운신 할수 없었다. 그래도 일산 공소는 약현성당을 (중림동성당)을 모 본당으로 삼고 신자들의 공동체로 명맥을 유지하였다.그것은 경의선 철도가 전쟁의 물자 수송 뿐아니라 상인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하였다.. 특히 농산물이 풍부한 황해도의 농수산물은 일산역이 있는 일산 시장에 팔거나 사게되었다. 황해도 농촌 지역에서 일제 탄압에 이겨내며 굳건히 지킨 천주교 신자가 일산에서도 뿌리를 내렸다.온갖 방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일제 시대지만 황해도 사리원, 해주,은률등의 신자들은 신앙을 굳게 지켰다.그것은 안중근 토마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꾸준한  선교로  성장한 일산공소는 대화리,지새울,장곡리,와동리 각 지역에 공소를 형성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농민뿐아니라 옹기점을 운영하는 신자들이 선교에 앞장 섰다.

 

 

 

일산에는 원래가 농사를 짓는 농민이 천주교 신자였으나 새로 들어 온 신자들은 옹기점을 경영하는 신자와 그에 고용되는 고용인과 그 가족들이었다. 그 가운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 한주(안토니오) 회장의 노력은 대단하여 커다란 공소 건물을 마련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공소 예절을 드리며 살았다. 일년에 두 번씩 부활과 성탄 때는 본당인 행주본당에 까지 미사참례를 가곤 하였다.그러나 하루에 4번 밖에 없는 경의선을 이용한 교통수단으로는 본당 행사에 자주 참석 할 수 없었다.이와 같이 유입된 천주교는 열렬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일산지역 발전과 더불어 성숙하며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6.25와 금촌 미해병사령부와 사제는 이 지역에 성전터전을 주었다

 

 

 

그 후 6.25의 발 발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며, 수도와 경기 평야를 지키기 위해서 금촌에 미 해병대  제 1사단 사령부가 설치 되게 된다. 이곳에 군인 사목을 담당하는 사제들이 고양,파주,멀리 김포,강화일대까지 군헬기를 교통수단으로 각 공소에 미사를 집전하러 다니게 되었다. 당시 군사목으로 활동하던 김창석(다태오) 신부님은 일산 중학교에 헬기를 내릴 때는 신자들이 마치 하느님이라도 만난 듯이 기뻐 했다고 한다. 워낙에 대대로 신앙을 지겨온 신자들이 많았고, 일제의 탄압에도 굳건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인지라 사제가 없는 악조건에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전후 복구사업에 천주교가 선도적이었다.

 

 

 

미8군 민사처 (AFAK)에는 민간의 전후 복구사업에 주 업무를 맡은 사제인 김창석 신부님은 민간인 전후 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본당부지의 모색과 매입을 몇몇 공소 회장에 의탁하여 현 일산 성당부지 3816평을 매입하게 되었다. 본래 야산인 이 곳을 성전부지로 선정한 뜻은 일산읍에서  높은 곳이며, 야산이므로 가격도 싼 부지였다.

 

그 후 해병대 군인 사목자가 된 김동한 (가를로)신부는 구호 자금을 신청하는 방법과 미국의 대민 생활원조를 이용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준비를 하고 1952년에 공사에 착공하여 1957년 성전과 종탑을 완료,파도마의 성 안토니오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일산 본당이 태동하게 되었다.1958년6월25일 드디어 본당 성전은 노기남(바오로)대주교의 집전으로 이루졌다. 제1대 주임신부는 유봉구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였다. 낙성식이 끝나고 대화리 소재 본당 소재의 논 2,678평과 본당 공원묘지로 사용하기 위해서 후동(현 후곡마을) 소재의 임야를 매입하였다.당시의 본당 사정으로 보아 매입자금은 미국으로 부터의 생활물자 원조를 팔아서 장만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제 3대 조창희 분도 신부는 후동 소재의 임야는 본래 본당 공원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주변의 택지와 너무 인접하여 묘지를 조성하는데 부 적합하였다. 그후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니 섭리는 미리 점지 하신듯, 파주군 교하면 목동리 산 13번지 소재의 현재의 공원묘지용 임야 5,310평으로 대체 매입하였다.그리고 신자들에게 분묘하였다.그후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삼하리 공소에는 20여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 공소에서 사제가 탄생하게 되었다.당시로는 너무도 뜻밖의 하느님의 성소였다..

 

 

 

첫 사제를 배출하였다.

 

 

 

4대 주임신부인 조창희(분도)신부님께서 부임하신 1965년12월 삼하리(경기도양주군백석면) 공소의 이사응(안토니오)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다양한 사목으로 일취 월장 발전을 거듭한다.그 후도 조순창(가시미로)신부-2000년 10월 청담성당 주임신부 이 신부님의 동창 신부였다. 부임하셔서 성당 관활지역 문제를 잘 해결하여 더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도시 개발에 앞서 물난리가 났다.

 

 

 

이원용 안드레아 신부 시절에는 신도시 개발 계획이 발표되었다.

 

1990년의 일산 지역의 한강 둑 붕괴는 정말로 엄청난 피해와 사랑의 실천을 체험하게 되고,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인 천주교는 세인들의 감화를 업고 그리고 주님의 은총으로 더욱 발전을 하게 된다. 당시의 수해 피해는 장항동 일대.대화리등이 큰 피해를 당했다.

 

 

 

옥토는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였다 .

 

 

 

1992년 일산 신도시가 추진되고 농사짓던 농토가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면서 신자들이 늘어나고, 첫 신도시 성당인 백석 성당이 비닐하우스에서 시작하게 된다.일산 성당은 원당 성당을 분가하고, 새로운 도시로 탈 바꿈한 신도시의 천주교 신자들을 수용할 준비가 어려웠다. 그것은 일시에 전국 각지에서 유입된 신자들 이었다. 또 다른  신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긴 신자들의 열성어린 노력으로 주엽 성당이 생겼다. 그후 대화성당이 주엽과 일산 지역에서 분리하여 자리 잡게 되었다. 마지막 일산 신도시로 탄현지구와 중산지구 개발로 인구의 증가와 아울러 천주교 신자들은 일산 성당으로 모였다. 탄현지구가 입주하기 시작한 1994년 6월부터 새로운 신자들이 모였다. 그리고 중산 지구의 아파트가 착착 준공되자 1995-6년에는 일산 성당의 신자들이 저절로 늘어 갔다. 외지에서 신자 생활하던 신자들이라 각 성당마다 특색이 있는 신앙 체험으로 일산 성당의 사목은 조금은 어려움도 있었다.  일산 성당은 도시 계획상 철도역 백마 역 부근이 제일 먼저 아파트 단지로 들어 설 것을 예정하고, 풍동에 성전 부지를 매입하였다.

 

 

 

IMF는 탄현지구 개발을 촉구하였다.

 

 

 

1998년에 또 다른 시련의 역사인 IMF란 혹독한 시련은 탄현 지역이 우선 순위의 성전 건립으로 부상하였다. 일산 성당은 이렇게 예상하고 제1지역 구 일산 지역,제2지역 탄현지역(탄현 마을과 송포. 파주 교하),제3지역 중산 지역(중산 마을,성석,)으로 분리하여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일들은 묘한 인연이 된 일산이 배출한 첫사제인 이사응 안토니오 신부님께서 치밀한 계획과 기도로 냉정한 설계를 하시게 되었다.

 

 

 

탄현 성당 분가 준비를 시작하였다.

 

 

 

IMF이후 탄현 2지구의 개발은 탄현성당의 출현을 앞당겼고, 때마침 서울 대교구의 소공동체  교회로 선교 촉진 사목은 더 이상 일산 성당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닥아 오자 교육관 건립과 탄현 성당 분가 작업이 대두 되었다. 희년의 집 교육관의 건립을 마치자 마자 탄현 성당의 분가 문제로 신자들의 마음을 바로 잡고 일치 운동을 벌리자는 전 신자의 소망을 업고 2000년 5월11일 일산 동고교 운동장을 빌려 체육대회를 실시 하였다.내 성당을 갖는 자부심에 추진위원들의 열성어린 준비와 진행으로 멋진 운동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건축비 실립을 위한 각 구역 모임을 수시로 갖게 되었다. 제 2구역장인 김은구 요한 형제의 열성과 황금자 글라라 여성 지역장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성으로 착착 성당 분가 작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2000년 8월 탄현 성당 분가 답사를 끝낸 서울 교구에서 탄현 성당을 분가 할 계획으로 진행 되었다.

 

 

 

첫 주임신부님이 김시용 베드로 신부가 되었다.

 

 

 

2000년 9월7일 밤 가톨릭 뉴스의 게시판과 서울 교구에서 긴급 전화로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은 대치 성당 제1보좌로 계신 김시용 베드로 신부님이라고 소문에 소문을 타고 먼 일산 탄현 지역에 울려 퍼졌다.

 

일산구 탄현동 114의 2호는 원래 밭이었다. 돌볼 사람이 없이 방치된지도 2년 가까이 되니 고무마를 심는사람,또 무성한 호박 덩굴이 널려 있었다.김 신부님이 발령나자 이제 성당이 들어서나 보다하고 불으도저로 밀고 토사를 사다가 밑 바닥을 깔고 첫 미사 봉헌을 위해 전 신자들이 땅을 다졌다.

 

그리고선 면목성당에서 쓰던 의자며 책상을 정리하며 첫 미사를 준비하였다.조립식 천막으로 제대와 노인석을 가리고 첫 미사 준비를 하였다.전기와 수도는 임시로 끌어 마이크도 임시로 설치하였다.

 

 

 

첫 미사와 국수잔치를 멋 있게 치렀다.

 

 

 

2000년 9월 24일 11시 탄현 성당 부지는 턴트와 의자를 준비하여 첫 미사 준비에 만전 이었다 정말로 놀란 일 이었다.첫 미사는 1200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모여 탄현 성당의 출발을 축하하였다.임시로 설치한 마이크는 미사중에 긴급으로 운반된 스피커에서 복음이 막 시작하자 작동하여 위기를 넘기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800명여명이 국수로 첫 미사를 자축 하였다.젊고 밝은 김시용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아시는지 눈치 빠른 사목이 시작되었다.밤8시 전 구역장을 모아 수고하였다고 술을 나누며 특히 자매님들의 고생에 등을 두드리는 광경은 말 그대로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았다.

 

*****이기록은 <일산성당 30년사>와 구전을 정리하여 편집하였다.더 좋은 기록이 나오면 게시판글을 참조로 다시 편집할려고 합니다.본당 홈페이지 제작에 앞서 정리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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