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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0]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교회 내부의 개혁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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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71

 

[10]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교회 내부의 개혁 이루다

 

■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 교회 내부의 개혁 이루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와 교황직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교회의

개혁이었다. 원래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특히 당시에는 교회에 폐해가 컸고 또 많았기 때문에 더욱

교회개혁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교회의 폐해중에는 물론 교황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의 개별적 배신은 언제나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배신이 제도 자체에서 기인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중세 말엽부터 교황직은

더욱 불완전해졌다. 또 불완전한 교황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교황들이 앞으로 교황을

선출하게 될 불완전한 추기경들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교황들은

교황령을 미화하고 확장하고 자신의 명성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일에 골몰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교황이 용감히 개혁을 시도해 보려 해도 당시의 상황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하드리아노 6세 같은 교황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진지하게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에게 있어서 교황령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이로 말미암은

족벌주의는 교회개혁을 적시에 실현할 수 없게 하였다. 사람들은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업적에 경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사명과는 비교할 것이 못된다. 이 시기의

교황들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는 알렉산델 6세를 위시한 대부분의 교황들의

윤리적 배신이 아니라, 교황직에 임하는 그들의 근본 자세였다. 성직 매매까지

낳게 한 이런 책임은 물론 교황을 선출한 추기경단에도 없지 않으나, 그 교황이

또 그런 추기경들을 임명했다는 점에서 최종책임은 교황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루터가 교회개혁을 자처하고 일어났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문제를 과소평가하고, 루터의 논제를 단순한 수도자의 언쟁으로 처리하였다.

교황좌에 오르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황직을 향유합시다"고 한 자신의

말과 같이, 그는 교황직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비록 루터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였다. 이 점에 있어 칼

5세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황들에게 시급히

공의회를 소집하여 줄 것을 촉구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교황들은

정치적으로 황제와 대립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황제의 당연한

요청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온 교회가 머리와 지체의 개혁을 위해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마지 않은 공의회가, 마침내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의해 소집되었다. 이로써 바오로 3세는 후세에게 개혁교황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아직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이었으나 처음으로 개혁을 진지하게

시도한 사람이 되었다. 바오로 3세는 추기경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영적 임무에

적합하지 못할뿐더러 개혁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추기경으로 있을 때, 즉 1527년에 로마가 당한 약탈과 점령에서

하느님의 시련을 깨닫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교황이 되자 그는 추기경단의

개혁부터 시작하고, 개혁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회개혁안을 작성케 했다. 이 개혁안은 그 후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안으로 채택되었다.

 

바오로 3세는 무엇보다도 그간 공의회의 실현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온 칼

5세와 공의회 소집에 합의함으로서 교회의 숙원이었던 공의회를 성취시키게

되니, 이것이 유명한 트리엔트 공의회이다(1545-1563).

 

이상에서 우리는 공의회의 성취가 얼마나 어려웠고, 또 그 경위가 얼마나

복잡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공의회가 개최된 이후에도 두 번이나

중단되어야 하는 등, 공의회의 활동 자체도 이에 못지 않게 긴장되고 복잡한

것이었다. 1545년 12월 13일 겨우 1명의 교부들과 3명의 교회특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을 가졌을 때 그것이 가톨릭 근세교회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턴티즘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최고의

교두건으로부터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가톨릭의 신앙교의에 대한 명확한

선언이었고, 동시에 가톨릭 교회내부의 자각이요 참된 종교개혁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참으로 훌륭한 공의회였다. 그러나 아무리 공의회 자체가

훌륭했다 하더라도 공의회의 결의를 실천에 옮길 위대한 교황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공의회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공의회 직후 위대한

교황이 3명이나 이어졌으니, 그것은 시대적 요구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요

선물이었다.

 

교황성좌는 3백년만에 성인교황을 갖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공의회 직후

교황위에 오른 성 비오 5세(1566-1572)였다. 머리의 개혁을 통해 교회쇄신의

진리성을, 지체들에게 확신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교황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의회 정신을 따라 교회 전체를 내적으로 쇄신하는 것을 교황직의 제일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교황직 자체의 쇄신을 위해 그는 추기경단부터 철저하게 개혁하고, 종교적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로 추기경단을 보완하고, 그들에게 교회의 개혁사업을

위촉하였다. 또한 교회개혁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리서, 미사 경본, 성무일도

등을 간행하였다. 그는 공의회 이후의 가장 위대한 개혁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가 시작한 일을 성공적으로 지속시켰으니,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는 특히 학문분야에서, 식스토 5세(1585-1590)는 특히 성청의

개혁에서 각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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