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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3] 요한 23세, 추기경단 늘려 국제적 균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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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74

 

[13] 요한 23세, 추기경단 늘려 국제적 균등화

 

■ 요한 23세 추기경단 늘려 국제적 균등화

 

근자에 와서 비오 교황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래서 그들을 고유한

시기에 묶으려는 역사가들이 나타났다. 여기서 말하는 비오 교황들이란 금세기

초부터 1958년에 이르는 비오 10세, 11세, 12세를 말한다. 그리고 비오 10세와

11세 사이의 베네딕토 15세도 여기에 포함된다. 19세기의 교황직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교체한 시기였다면 20세기의 비오 교황들에게 있어서는

중앙집권적이고 군주적이고 귀족적인 경향이 공통적으로 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교황이 비오 12세(1939-1958)였다. 비오 교황들은 아직도 구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교회상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방은 비오 12세의

후계자인 요한 23세를 기다려야 했다.

 

요한 23세(1958-1963)는 그의 선임자가 귀족적 타입의 법률가였던데 반해

짤딸막한 농부에 불과했다. 당선 직후 첫 교황 강복을 주기 위해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나타나자 ’뚱뚱보’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실 사람들은 비오 12세의

후임으로 그런 교황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실제로 4일간의 어려운 콘클라베 끝에

이미 77세의 론칼리 추기경을 과도기 교황으로 선출하는데 의견이 일치했을

것이라는 보도까지 새어 나왔다.

 

사실 요한 23세는 과도기적 교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오 교황들의 노선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뜻에서의 과도기가 아니라, 전환기로 이행하는 뜻에서의

과도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벌서 교황의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요한이란 새로운 이름을 택했고, 자신을 요한 23세로 명명했다. 그런데 요한이란

이름은 5백여년 이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5백여년 전에 이미 요한

23세란 교황이 존재하였고, 또 그 교황은 역사가에 따라 정식 교황도 되고 대립

교황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요한 23세는 의식적으로 이런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던 것이다.

 

요한 23세가 교황이 된 지 몇 개월만에 공의회의 소집계획을 추기경들에게 알린

것도 그의 즉흥적인 다시 말해서 카리스마적인 행위로 해석된다.

 

그는 공의회 소집에 앞서 1960년 로마 교구회의부터 소집하였다. 우선

로마교구의 사목부터 현대세계에 적응시키고 나서, 그것은 전교회에

확대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것은 동시에 로마 교구장직으로부터 전 교회를

위한 교황직으로의 전개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마교구

시노두스(주교회의)가 있은 것은 1461년이었다. 그러므로 5백년 후 로마교구의

관습을 다시 살렸다는 데서 벌써 큰 의미가 있었고 놀라움이 있었다. 공의회의

소집은 더욱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중단된 이후, 또 공의회가 열리리라고는 거의

기대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신조로 선포된 교황이 무류권에 의하면

교황은 전교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도, 혼자서 전교회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중대한 결정을 위해 반드시 공의회의 소집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소집 공고는 교회 안에 기대 밖의

새로운 희망을 일으켰다. 이 공의회는 처음에 일치 공의회로까지

기대되었었으나, 곧 가톨릭 교회의 대내적 용무만을 다룰 공의회로 국한되었다.

 

제21차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에서 1965년까지 4차의 회기를

가졌다. 요한 23세는 1차 회기만을 끝내고 1963년 6월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오랜 치세 기간이 할당되지 않았다. 그는 과도기 교황으로서 그것을

예감이나 한 듯, 교황으로 당선된 직후 인사말에서 "요한 이름을 가진 교황들은

언제나 단명이었습니다."라는 말을 했었다.

 

요한 23세에서 비로소 추기경단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는 추기경의 수를

종래의 70명에서 90명으로 증원함으로써 추기경단의 크기를 세계 교회의 규모로

균등화하려 했다. 이 행위는 분명히 그가 의도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이로써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 탄생할 가능성이 주어졌고, 마침내

그것이 실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된

공의회에서는 모든 주교들이 75세에 은퇴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도록 하는 권고안까지 결의되었다. 이때 지독한 소수주의자로 알려진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그렇다면 로마주교도 고령 때문에 사직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고 한다.

 

1870년 교황직을 상실한 이후, 자연히 교황들의 생활권은 아주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로 바티칸. 라테란, 카스텔간돌포 사이을 왕래했을 뿐이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이런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교황직을 현대세계를 향해

개방시켰다. 그는 공장과 양로원과 감옥 등을 찾아 다니며 즐겨 단순하고 순진한

인간들과 대화했다.

 

이로 인해 위스키에 정통한 사람들은 요한 23세에게 ’조니워커’(요한 산책자)란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엄격하고 귀족적이고 군주적이었던

그의 선임자 비오 12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요한 23세의 이러한 서민성과 개방성에는 깊은 진실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교황이 하느님보다는 낮으니 인간보다는 높다"고 말한 인노첸시오 3세처럼

거만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하려 했고, 모든 인간과 대화하려 했다. 그는 1959년

공의회의 프로그램으로 추기경들을 놀라게 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판단하고자 역사적 소송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같이 모여서 같이 이야기함으로써 분열의 끝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의 문화를 비 가톨릭에서 이단자와 이교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방하려 했다.

 

그는 이들과 같이 기도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비그리스도교인에게도 교회를 개방했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사위인 철저한

무신론자 아주베이와 만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새로운 교회상,

새로운 교황상으로의 이행, 그것은 마침내 과도기 교황 23세의

’아조르나멘토’(현대세계의 적응)에 의해 실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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