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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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27112]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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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경 [kreuz] 쪽지 캡슐

2001-12-04 ㅣ No.27115

(님의 글 제목을 빌려왔습니다...

제목을 새로 만들기가 귀찮아서...)

 

1. 사제라는 희망, 사제라는 우상...

 

지난번에 님과 저는 이 부분에서 확 갈라져버렸었지요. ^^

님은 ’그래도 사제직이 희망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사제직에서 희망을 찾기보다

평신도사도직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양적으로(숫자가 많으니까..^^;;)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님의 생각과 달리,

사제의 잘못도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모든 면을 다 알아야 누군가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타인의 잘못된 점에 대해 묵과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없고,

제자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없고,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꾸짖을 수 없을 겁니다.

사제 역시 한정수 신부님 말씀대로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단,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라는 말을 쓴 것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사제 우상화에 대해서 저 역시 우려합니다.

사제를 우상화하고, 완벽하기를 바라며 비판하는 뒷면에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나태한 마음이 숨어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신처럼 생활하고 일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 ’평신도는 사제보다 못하다’라고 하고,

그 결과로 ’그러므로 평신도는 사제보다 덜 봉사하고 덜 기도해도 괜찮다’라는

결론을 내려버리고 나면

그저 교회 안에서 빛나는 자리나 탐내고,

명예로운 일만 골라서 하려는 사람으로 남아도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부님이 ’교회에서 아버지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누가 너의 어머니이며 너의 형제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너의 아버지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단 한 분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신부도 사람이다..?

 

님의 말씀대로 형제적 조언과 충고가 필요합니다.

비난과 고발과 욕설이 아니라, 형제적 조언과 충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형제적 조언과 충고가

어떤 모양일까 하는 점을 되새겨봅니다.

그 사람이 알지도 못하게 다른 곳에 글을 올리고

정작 조언을 들어야 할 본인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타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형제적 조언과 충고가 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3. 본당은 가정이다..?

 

본당을 한 가정에 비유할 때,

사제를 아버지의 자리에 놓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가정공동체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흔히 말하는 가부장적 위치에서 가족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공동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체 교회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작은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누군가는 사제의 역할을, 누군가는 예언자의 역할을,

누군가는 마리아의, 누군가는 마르타의 역할을 맡는,

수평적 공동ㅍ체를 이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기 자랑하려고 베드로의 질책을 알렸을까요?

바오로는 베드로와 같은 사도입니다.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살인범이 베드로입니까?

이 부분은 님의 예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보편교회는 각 교회 공동체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각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무시한 보편교회의 강조는

전체주의일 뿐입니다.

우리가 소공동체 운동을 하고,

반, 구역, 그리고 레지오의 경우도 소공동체의 모양을 갖추는 것은

그것이 보편교회에 역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의 작은 세포로서 전체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니는 본당을 생각하지 않고

전체교회를 말하는 사람은 진정한 교우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본당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다른 본당의 어려움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부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남’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속한 곳의 어려움을 돌보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당 공동체 안의 어떤 형제의 잘못은

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그 공동체 구성원들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공동체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그 형제를 아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돕겠습니까?

그렇다고 전세계 가톨릭신자를 모두 알아두어야만

진정한 신자가 된다고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남겠습니까?

(님이 앞에서 그의 모든 면을 알지 못해서 비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이곳에서 어떻게 적용될 지 모르겠습니다)

 

4. 너무나 잔인한 당신..

 

저 역시 기도와 인내가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기도와 인내’는

실천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변명거리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기도와 인내’를 이 게시판에서 말씀하신 분들은

’무조건 덮고 기도해라’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우선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항의 당사자와 이야기하고,

또 그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면서 기도와 인내는 항상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상대가 사제일 때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가 잘못했을 때 타이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먼저 본인에게 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본인도 모르게 다른 곳에서 흉부터 보고 시작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많은 분들의 중론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제이기 때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을 요한님께서 아시게 되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의 도야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5. 한정수 신부님에게서 발견하는 희망...

 

제가 김충렬님의 글을 보고 지나치다고 본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해결해보려 했던 부분이 보이지 않았고,

본당 안에서 해결해보려 했다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게시판에서 저와 충돌하셨던 몇몇 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 역시 몇몇 신부님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그분들과 직접 부딪쳤습니다.

해결이 된 경우도 있고, 안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신앙심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부분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해결해보려고 노력할 뿐

다른 사람, 다른 신부님들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매한 인격자라서 그렇게 했다고 보십니까?

여태까지 이 게시판에서 제 치졸한 글들을 보셨을텐데요.

 

게시판을 통해 교회의 공적 인물을 비판한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공적 인물이 교회의 공적 위치를 해칠 위험성으로 인해 비난받았는지,

끝으로, 그 공적 인물이 그 비난을 알고 해명할 기회가 있었는지에 대해

저는 그 점이 애석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 미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해명이었는지,

그 신자를 비난한 것이었는지 선입견을 갖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굳뉴스 인터넷 게시판을 너무 우습게 보시는 것 같군요....^^

인터넷이라는 곳은 분명

사용된 언어를 아는 전세계 모든 네티즌들에게

그 정보가 열려 있는 곳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몇 명만 보았다고 해서, 소수만 보고 잊어버릴 거라는 생각은

지난 해양대학생 사건과 형제갈비집 사건,

그리고 노스트라다무스 거짓예언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지금쯤 어느 곳에선가

김충렬님의 글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영어권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문제제기의 길은 열어놓되

그 비판과 문제제기의 질과 방법에 대해서는

검증하고 논증하는 것 또한 함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자유로운 대화’란

내 글에 누군가가 반론을 할 권리를 열어놓는 것이지

그 글이 사제 비판 글이라고 해서

그 글에 반론하는 사람을 사제맹목추종자쯤으로 취급하고

그 글에 맹목적으로 박수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대화가 오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로운 대화란

글 그 자체로만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확대하고, 추측하고 유추해석하는

그런 것은 아니리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더불어, 글을 쓰고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언급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신부님들의 잘못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썼습니다.)

 

추신...

아마도 몇년 후엔

님도 이러한 비평에서 자유롭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그런 마음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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