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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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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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2-10-30 ㅣ No.4204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루가 13장 31-35절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팍팍한 삶>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생활이었기에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보람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통스런 가시밭길, 갖은 긴장과 스트레스로 피곤했던 삶, 한마디로 팍팍했던 삶이었습니다.

 

짧은 기간의 삶이었지만 예수님의 생애는 외줄을 타는 듯이 위태롭던 삶, 긴박한 사건들이 즐비했던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념과 가치관의 차이, 그릇의 크기 차이로 예수님은 소수세력으로서 당대 주류세력들과 사사건건 충돌하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유다 지도자들의 귀에는 날카로운 쌍날칼과도 같았기에 언제나 상호 대립관계에 섰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복음선포의 과정에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죽어 가는 이들을 숱하게 일으켜 세우셨는데,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또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서서이 알려지면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앞에 예수님은 언제나 "영원한 해결사"여야 했으며, 혹시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할 양이면 여지없이 비난의 화살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스토커 저리 가라할 정도의 스토커들이 집요하게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온갖 부류의 병자들이 수시로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예수님의 옷이 남아나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은 스트레스 지수가 아주 높은 삶이었는데, 여러 가지 스트레스 중에서도 가장 큰 스트레스는 "예정된 죽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맞이할 "최후의 순간"이 언제인지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최후가 얼마나 처참할 것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지에 대해서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죽음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없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연히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죽음조차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로 받아들이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는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하고 비장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끔찍한 십자가형 죽음조차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기꺼이 끌어안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뒷모습, 가야할 길이 언제인가를 알고 떠나는 그분의 뒷모습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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