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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박도현 수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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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20joolid] 쪽지 캡슐

2013-09-14 ㅣ No.2707

      2013년 9월 10일 일기

 

교도소에서 무덥던 여름을 훌쩍 보내고 가을을 맞이합니다.

벌써 다음주가 추석입니다.

우선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감사와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많은 분들의 면회와 서신, 책과 자료, 영치 먹거리로 풍성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로써 삶의 자리에서 함께 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 합니다.

모두모두 ‘믿음과 희망’으로 풍성하시길 기도합니다.

 

손영익 님이 영치시켜준 정호승의 시집 ‘여행’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순례자’의 삶이 연상되었습니다.

예수회 사부이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자신을 ‘순례자’로 즐겨 불렀습니다.

순례자라는 말 자체에 삶의 방식이 다소 규정되지요.

순례자는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만을 지니고 떠나는 사람입니다.

오랜 순례길에서 각각의 소지물은 자신이 지고 다녀야하는

‘무게의 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 저의 순례 체험입니다.

예수회 수련원 2년과정에 순례자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각자 순례 계획을 짜서 수련장님과 상의 후 떠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몇가지 주의사항이 주어졌지요.

순례는 혼자해야 하고, 돈도 등짐도 없이 떠나야 합니다.

비상시 외에는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 자신이 며칠간 어디를 순례할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늦가을 아침에 열 대여섯 명의 수련자들이 각자 순례길을 떠났습니다.

나도 수련원(수원시 파장동)에서 해미성지를 향해 일주일 계획의 순례를 떠났지요.

 

장거리 무전 도보순례에서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먹는 것.

구걸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첫 시도가 가장 어렵습니다.

길가에 있는 민가에 들어가 먹을거리를 구걸했던 첫 시도는 실패.

이렇게 몇 번의 실패 후에 어느 정도의 요령을 배워 나갔지요.

한 형제는 우연히 성당사무장(?)과 연결되어 도움을 요청했는데 욕만 실컷 얻어다나.

분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울면서 수련원으로 귀원했는데,

순례 삼 일 동안 쫄쫄 굶었다는 체험 나눔도 있었습니다.

절이든 교회든 성당이든 들어 가서 구걸했지요.

어디든 환대로 구걸에 도움 주시면 마음에서 감사의 감사가 흘러 나왔습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주님의 기도가 깊이 와닿는 순간 이었습니다.

 

그리고 늦가을(혹은 초겨울)의 밤추위는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녁 무렵, 건설 인부들이 피워 놓은 장작불 앞에서 몸을 녹이기 위해 앉았는데,

불 앞에서 마냥 졸면서 꾸벅이는 나를 보고 놀랐습니다.

밤은 깊어가고, 추위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던 기억.

일단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불이 켜진 파출소로 막무가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일이십 분 만에 쫓겨났지요.

순례 중에 한 형제는 간첩신고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답니다.

하여튼 이런저런 유익한 체험을 다양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프로그램 순례는 끝났지만 삶의 순례는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0년이 흘러 제주 강정마을까지 왔습니다.

삶은 줄곧 배움의 순례였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울분과 환희가 상존했음을 보고 감사합니다.

여기 제주교도소에 수감 된 지 두달이 지났네요.

그동안 벌써 두번의 공판이 열렸고, 다음 재판은 9월 26일로 잡혔습니다.

지난번 재판후에 김인숙 변호사님이 재판부에 판사직권보석을 신청했다고 했습니다.

결과는 기다리는 중.

부당한 구속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저는 당분간 보석신청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명박 정부와 해군, 삼성은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

그리고 종교인들의 정당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채,

벌금폭탄, 무차별 체포, 연행, 그리고 구속을

강정평화활동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8월부터 1년 동안 586명을 체포, 연행했고, 이 중 493명을 기소했으며,

지금까지 24명을 구속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무지막지한 공권력의 힘 앞에 나는(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에 저는 이러한 공권력에 당당하고 싶고,

이 자리에서 꿋꿋하고 기쁘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성찰 질문거리가 하나 날아와 있습니다.

'나의 행동이 감사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가?'

강정주민, 평화활동가, 구럼비 바위와 그 해안의 뭇 생명들,

등등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응답해 봅니다.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더 깊은 마음의 순례를 계속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듯.

 

다음 주면 추석입니다.

환절기 감기조심하시고

평화와 사랑으로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기원합니다.

                                                                                                                     

                                                        2013년9월 10일 2하2 박도현 합장

 

 

               여    행         
                                   -정 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 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 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  순교성월입니다.

       순례를 떠납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나 진정한 순례를 얼마나 떠나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서울도보성지 순례길이 선포되었습니다.

       그저, 행사의 일환으로, 거기를 다녀왔다는 점하나 찍기로가 아닌

       순교자의 삶을 묵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저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그리하여 삶의 현장에서도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갇혀 계신 수사님과 활동가들, 그리고 양심수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억울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부디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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