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인물 현대사 - 영화는 없다 - 하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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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3-28 ㅣ No.61

 

영화감독 하길종은 72년 <화분>으로 데뷔하여,
<수절> <바보들의 행진> <여자를 찾습니다>
<한네의 승천> <속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 등
모두 일곱 작품을 남기고 79년 39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영화작업
시기는 암울했던 유신시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영화에도 드리워졌다. 박정희 정권은
영화법 개정을 통해 일제때부터 이어져 온 검열을 더욱 강화한다.
정부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금지함은 물론, 사회의 어두운 면이라 하여
초가집에조차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게 하는 한편 반공영화,
새마을운동 영화 등 정부시책에 부응하는 국책영화 제작을 적극
권장한다. 제목만 다를뿐 비슷한 내용의 영화들이 양산된다.



반전, 평화 등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셌던 196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하길종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시나리오 사전검열, 영화 사후 검열 등 이중검열의 통제
속에서도 비록 우회적이긴 하나 유신정권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는
<화분>



<수절> 등의 영화를 만들지만, 사전검열에서 20여분씩 무참히
잘리고 흥행에서 마저 실패한다.



그 후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탈출구없는 평범한
대학생들의 암울한 상황을 영화화, 젊은층에 큰 인기를 끈다. 영화속에
삽입된 노래 <고래사냥>,<왜 불러>도 함께 인기를 끌어
당시 대학가 시위현장에서도 이 노래가 불려진다. 결국 이 두 노래는
'시의에 부적절하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하길종 또한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다.



<한네의 승천>을 통해 새로운 예술영화를 모색하던
그는 결국 <속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를 통해
상업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제작자들의 눈밖에 나면 영화를 포기해야만 했던 당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신시대 영화법은 14개 메이저
영화사만이 영화제작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자본축적이 급했던 영화제작자들은 흥행위주로 영화를 제작했다.



<병태와 영자>의 흥행성공을 지켜보며 그는 말했다.
"이제는 진정 만들고 싶었던 영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오랜 친구인 김지하 시인과 10여년을 기획해 왔던
<태인전투>가 그것.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이 시나리오는 결국 영화화되지 못하고 그의
유품으로 남았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좌절하던 그는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만 것이다.



그의 동료감독 이장호는 말한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영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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