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인물 현대사 - 록의 이름으로 -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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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3-28 ㅣ No.65

한국 대중음악사에 우뚝 솟은 거목인 '신중현',



그의 이름은 해방이후 한국 대중음악사가 누린 영광과 오욕, 그
자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서구 대중
음악을 수용해 우리의 감수성으로 소화한 첫 세대 대중 음악가이자 한국
록음악의 새벽을 연 첫 번째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였다.



1962년 그는 한국 최초의 록그룹인 '에드포'를 결성하고, 1964년 최초의
록 음악작품으로 불리는 '빗속의 여인'을 발표한다. 한국 록 음악사의
위대한 한페이지가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록그룹은 그가 활동했던
미8군 부대내에서 조차 생소할 정도로 한국음악계에선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다. 동시대 서구에선 비틀즈,애니멀즈,롤링스톤즈 같은
록그룹들이 막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신중현을 '한국
록음악의 대부'로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후 그는 서양 록음악에 한국적 정서를 결합,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면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스타제조기'라
불리며,이른바 '신중현 사단'을 이끈다. '님아','커피한잔'의
'펄시스터즈','담배는 청자,노래는 추자'라는 말까지 만들어 냈던 '님은
먼 곳에'의 '김추자','봄비'의 '박인수','장현','김정미' 등등
그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대중음악 최고의
산실 역할을 해냈다. 그가 쓴 곡들은 '신중현곡'이란 표시 하나만으로도
히트가 보장되는,이른바 '흥행 보증수표'와도 같았다.



그러나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신중현은
최전성기에 강제로 활동을 접어야 했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9호'와
함께 발표된 대중문화활동에 대한 정화방침은 유신체제가 지향하는
가치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대중문화활동들을 금지시켰다. 신중현도
유신정권 대중문화탄압의 직접적인 희생양이 되고 만다. 잇달은
대중가요 금지조치로 그의 노래 대부분은
'퇴폐','창법저속','불신감조장'등의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이고
만다.

그는 절정기에 창작의욕을 꺾이고 강제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인물현대사' 이번 주 방송 '록의 이름으로-신중현'편에서는 한
순수한 대중음악가의 창작활동이 어떤 과정을 통해 시련을 겪게
되는지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을 읽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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