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화)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자유게시판

휴게실에 혼자 앉아있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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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pennom] 쪽지 캡슐

2008-04-26 ㅣ No.119793

할머니들은 하다못해 나물을 뜯든지, 박스를 주워 팔든지, 매일 새벽 미사에 참여하든지 하다못해 손주라도 봐주면서 사시는데, 할아버지들은 고작 공원에 앉아서 담배나 피우고, 아니면 공원에서 내기 윷을 노시든가, 모여서 소주파티 하는 게 고작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일생을 자식들 위해 뼈빠지게 노동을 했으니, 이제 쉬자, 그런 마음에서일까?
 
할아버지 한 분이 미사가 끝나고 휴게실에 혼자 앉아계신다.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아까부터 멍하니 무슨 생각에 골돌히 잠겨있다.
젊어서는 관청에서 일하시던 분이신데, 지금은 아주 어려우셔서, 얼마 전에는 구역분과장에게 극빈자에게 나누어주는 쌀을 자기에게도 줄 수 없냐고 물으신적이 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수고들하세요." 하며 다니시는 분이시다.
양복은 몇 십년을 입으셨는지 빛이 아주 바래서 본래 무슨 색갈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풍채가 좋으셔서 설사 며칠을 굶고 나오셔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미사가 끝난지가 한참 되었는데, 왜 저렇게 멍하니 앉아계실까?
주위에서는 할머니들이 까르르르 웃으며 아주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데, 이 할아버지만 그냥 멍하니 정면을 응시한 채 앉아 계시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
아니면 식사를 거르고 나오셔서 힘이 없어 그러신가?
그냥 조용히 쉬고 싶으셔서 그러나?
 
얼마 전 봉두완 선생이 라디오에 나오셨다. 앵커가 요즘 무얼 하며 지내시나요?
하고 물으니, "새벽 미사 매일 나가고, 엊그제는 김수환 추기경을 뵙고 미국에 가는 보고도 드리고, 아무튼 바쁘게 지냅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건강에도 안 좋고 그래서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죠."  이런 말씀을 하신다. 예전의 그 억양 그대로이다. 또 천주교회와 적십자 선전이로군. 하고 미소가 떠오른다. 그분이 라디오에서 아침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참 말이 많았다. 내가 듣기에도 아슬아슬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그런 스타일인데, 요즘의 모범생 답안 같은 앵커들과 비교하면 좀 유별나다 싶었지만, 정감이 가는 솔직함과 거침없음이 좋았던 것같다.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한 그분도 이제는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할아버지가 한 참 동안 그러고 앉아 계시는 걸 잠시 잊고 나는 내 일을 하고 있다가 다시 휴게실에 가보니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대로 앉아 계신다. 이제는 할머니들도 거의 돌아가시고 휴게실에는 할아버지밖에 안 보인다. 그런데 할아버지 손에는 무언가 통장 같은 게 들려있는 것이 언뜻 보인다.
 
잠시후 할아버지가 사무실에 오셨다.
조심스레이 교무금 통장을 내민다. 그 안에는 만원 짜리 한장이 고이 들어있다.
나는 비로서 그 만원 짜리 한장의 의미와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오래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계셨는지 알 수있을 것 같다.
 
만원 짜리 한 장 속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숨어있는 것이라고 나는 금방 알 수있었다. 아마도 이 만원짜리 한장이면 할아버지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용돈으로 쓰실 수있는 돈일 것이다. 어쩌면 아침을 굶으시고, 라면 값을 아끼고 그 좋아하는 소주 한병을 못 사잡수시고 내는 만원일 것이다. 이 돈을 내기는 내야겠는데, 그러면 앞으로 열흘동안 나는 무슨 돈으로 성당도 다니고, 버스도 타고 라면도 사먹지? 이런 생각에 골몰하셨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소리야, 그까짓 만원 한 장 성당에 내면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것 자체가 죄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쩌다가 이지경 까지 되어 버렸는가. 정말 한심한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자리를 못 뜨고 계속 앉아 계셨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할아버지는 그 소중한 만원 짜리 한 장을 내셨고
그 손이 파르르 떨렸는데, 그건 아까워서도 아니고 내기 싫어서도 아니다.
사무원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돈을 받고 컴퓨터는 드르륵 하고 통장을 뽑아낸다. 통장을 돌려드리면서 사무원은 속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
"할아버지 정말 소중한 만원 감사합니다."
 
옆에서는 티부이에서 30억, 3백억이 무슨 애들 과자값 이야기 하듯이 흘러나온다.한 달에 백만원 받고 성당에서 일하시는 관리 아저씨는 그래도 경제를 살린다니 참고 기다려야지 무슨 소리야? 하고 말씀하신다. 할아버지의 힘없는 뒷모습이 사라지고 그 만원 짜리 한장은 은행고의 거대한 돈다발 속에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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