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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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김수환 추기경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
어떤 분은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인생에 고통이 있느냐? 때때로 아무 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교통 사고로 죽는 경우가 있는데 하느님이 계시다면 사랑하신다면 왜 그런 일이 있도록 허락하느냐?"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반론에 대해서 제가 이 자리에서 속 시원한 답을 금방 드리기 어렵습니다.
저는 가끔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밖에 기다릴 수 없는 이들을 방문합니다. 어떤 때는 저 역시 "왜 하필 이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왜 있는지, 또 왜 하필이면 죄 없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 하여 하느님은 없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야말로 그 고통과 고통 속의 인생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인생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고통에 대해 설명이 안 되더라도 하느님이 있으면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넋두리라도 할 수 있고 불평, 불만, 항의라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직접 체험도 하고 목격하듯이,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인생을 보다 깊이 살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선은 고통과 수고를 통해서 이룩됩니다.
고통 없는 인생, 아주 좋은 것 같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인생이 깊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고통을 모르면서 자란 사람들은-경우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으나-남의 사정, 남의 고통을 이해할 줄 모릅니다. 이에 비해 많은 고통을 겪고 산전 수전 다 겪은 사람은 특히 신앙 속에서 겪은 사람은 참으로 인생을 깊이 살 줄 알고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은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은 생명을 위해 생명은 영을 위해 영은 하느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창조의 힘에 의한 200억 년에 가까운 우주의 생성 발전은 생명을 낳기 위해서, 생명체의 발전은 의식을 가진 인간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이 인간은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이면서도 정신적, 영적 존재인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죽고 썩음으로 물질로 환원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 향해 가기 위해서, 영원하고 무한하시며 진선미 자체이신 하느님, 참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미래는 참으로 위대하고 원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인간에게 이런 본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심리를 들여다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영원과 무한, 진선미와 완전한 사랑과 불멸의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적 존재이기에 음식도 필요합니다. 공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진리, 정의, 사랑 등 정신적 빵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 무한하고 영원해야 합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것, 이는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음식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여 만드셨으니 당신께 가서 쉬기까지는 영원히 평안치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사랑이다
그럼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이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이웃을, 특히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 약한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이 두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인생의 길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도 어느 날 사람을 모든 것에 앞서 존중하고 어린이, 장애자, 노약자, 부녀자,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지상 낙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 이 시대에 한국의 정치인, 경제인, 지성인들이 이런 인간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이런 인간관을 기초로 한 생활 가치관을 교육을 통해 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언론이 이런 인간관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목탁의 역할을 한다면 하는 소망 또한 큽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랑을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세계인이 되고 한국은 세계에서 빛나는 큰 나라가 되며, 통일도 그 힘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수환추기경님의 강연의 글 중에서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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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