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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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영적 무관심과 영적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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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09-12-11 ㅣ No.51361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대림 2 주간 금요일 - 영적 무관심과 영적 고집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불타오르는 신앙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마을 곳곳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변으로 나가 바다에 대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크게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저는 ‘내가 만약 평신도라면 굿뉴스에 들어와 매일 복음 묵상을 열심히 찾아 읽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 때마다 ‘너무 바빠서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기를 원치 않은 사람들 같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고 이렇게 말씀을 찾는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즐거운 가락으로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어깨를 들썩이지 않고, 아무리 슬프게 울어도 가슴을 치기는커녕 무관심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 무관심’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 세상 즐거움에는 귀가 번쩍 뜨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에는 영 무관심한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며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라고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 던진 채 더 이상 들으려하지 않고 나가버립니다. 사실 진리가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어떤 아이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밥을 세 개의 그릇에 담아놓고 학교에 갈 때와 돌아올 때 하나에다는 좋은 말을, 또 다른 하나에다는 욕을, 나머지 하나는 그냥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었습니다. 좋은 말을 들은 밥은 발효하여 좋은 냄새를 풍겼고 나쁜 말을 들은 밥은 상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일 검고 안 좋게 상한 것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무관심하게 방치해 둔 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선 이것이 거꾸로 일어납니다. 즉, 무관심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시지만 관심이 없는 이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인들처럼 뜨겁거나 바오로처럼 아예 차갑다면 회개시키기나 하겠지만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부패해갑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해왔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있는 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하시며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 대한 그만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그리스도께 무관심한 것이 바로 그분의 사랑을 무시하는 폭력입니다.

 

이 영적 무관심 다음으로 힘들어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 고집’입니다. 이미 자신이 다 판단해 놓고 자신의 생각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모습의 예언자와 메시아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자신의 생각은 바꾸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다윗과 같은 훌륭한 왕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고집이고 이 영적 고집이 있는 사람에겐 생명의 말씀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고 맙니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바로 순명하고 자신을 굽힐 줄 아는 겸손함과 온유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은 당신을 ‘스승’으로 삼고 매 순간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는데 처음엔 그 분의 말씀에 관심도 없었지만 나중엔 그분을 스승님으로 삼고 그분의 모습을 닮아감으로써 자신을 변화시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처음으로 목격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그 때에도 “랍부니”, 즉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무관심한 것이 그분께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그분의 가르침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분에 대해 단 하나라도 더 알려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느끼는 세상의 무관심과 폭력에 대한 슬픔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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