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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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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동어반복적인 글들을 보면서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참으로 의아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신학적문제에 대한 논의라면 신학적인 유권해석으로 종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에 걸쳐서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주와 같은 명백한 이단의 경우는 제외하고) 어떤 특정한 성인이나 교황의 말씀이나, 어떤 책에 씌어있는 내용을 두고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끝없이 논쟁이 이어지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 성인이 교회의 공식적인 시성절차를 거쳐서 성인이 되셨고, 또 그 분의 영성적 입장이 비록 중세적인 경향성을 띄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신자라면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의 전체적인 견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부분을 발췌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논거의 입지를 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 같다. 어떤 교황님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했다고 해서 그 말씀 하나만 떼어서 강조하여 자신의 논거를 증명하려하기 때문에 이 논의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분도 라부르 성인을 우리는 거지성인이라고 하는데, 그분의 정신을 놓아둔 체, 우리는 성인을 따라 모두 걸인생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생동안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인도 계시고, 성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사유재산을 철저히 부정한 성인도 계시다.(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베네딕토수도회의 사유재산을 둘러싼 논쟁은 <장미의 이름>에서 잠깐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까지 생존했던 수 많은 성인 성녀들은 각각 다 특성이 있고 그분들은 모두 우리에게 어떤 귀감이 된다. 귀감이된다고 해서 무조건 그 중에 한 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이 문제가 표현상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문학적, 예언적, 사서적인 엄청나게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구약 성경을 신학 텍스트처럼 읽는다면 아마도 몇 천개의 교파를 만들고도 부족할지 모르겠다. 이 거대한 텍스트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또 어떤 성인의 영성의 특이성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그 성인은 달을 가리키는데, 자꾸 그 성인의 손가락만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성인들이 묵상 중에 황홀경이나 탈혼의 경험을 하는데, 그때 자신의 경험을 기술할 때 생기는 과도한 표현에 너무 집착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서는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는 어떤 한 성인이 아니라, 많은 성인들의 생애를 읽을 필요가 있고, 한가지 교리가 아니라, 전체 교리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공의회문서를 내세우려면 공의회문서 전체를 읽을수는 없다하더라도 공의회의 정신을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설사 개인적인 확신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깨달음으로 간직하는 것이지, 그것을 내세우거나 논쟁거리로 들고 나올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주문제에 대한 교구장의 말씀 중에서 이들이 과연 이단인가 아닌가의 중요한 식별기준은 <겸손>이라는 말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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