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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로 출신 평생 광산서 노역 (슬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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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로 출신 평생 광산서 노역
자식들도 태어날 때부터 신분 차별 김지석 가명·34·2002년 4월 입국 나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이고 어머니는 지주출신으로 온 가족이 몰살당한 사람이다. 북한에서 이 정도면 최악의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경북 출신이고 14세 때 만주로 넘어갔다고 한다. 몇 년후 해방이 되자 조국을 다시 찾았다가 전쟁이 나는 통에 군에 입대하셨고 그만 인민군에게 잡혀 포로가 됐다. 휴전 후에도 북한은 석방해주지 않았고 아버지는 다른 500여 명의 국군포로들과 함께 평안남도의 산골인 성천광산으로 배치되어 평생을 그곳에서 일했다. 성천광산은 연·아연을 생산하여 북한의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한 몫을 하는 곳인데 그곳에서는 남한 출신이든 북한출신이든 악조건 속에서 짧은 인생 살다가 대부분 병을 얻어 죽어간다. 국군포로들은 그곳에서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였는데 어머니는 국군포로 출신 노동자들이 교육도 잘 받았고 늠름한 인상이었다고 기억하곤 했다. 500명의 국군포로들을 인솔하여 일을 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 신망이 있었고 리더격이었다. 사람이 약삭 빠르지 않고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아 북한사람들도 좋아했다고 한다. 북한 사람과 남한출신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아버지가 나서서 부드럽게 해결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을 간부들도 인정을 하고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산당들은 지독한 족속이다. 남한에서는 아무리 큰 범죄나 반체제 행위를 해도 죄를 범한 당사자에만 국한해 처벌하지만 북한은 그게 아니다. 끝까지 파고들어 모두 잡아죽인다. 어머니의 가족은 지주였기에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모두 몰살당하였다. 어머니만 살아남았는데 결혼을 하고도 지속적으로 처벌대상으로 잡혀갈 위험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머니를 죽이면 아버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나아가 광산의 500명 국군포로를 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해 어머니를 살려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지금도 ‘내 목숨은 네 아버지가 살렸다’고 말하곤 한다. 아버지는 인덕 뿐 아니라 인물도 좋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를 선택할 때 자신과 가장 비슷한 여성을 택하여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든 배신하지 않는 여자가 어머니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옳았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일했고 조그만 산골 텃밭이라도 일구어 채소도 기르고 소, 돼지 등 가축도 길러 돈을 마련했다. 1980년대 초 아버지가 55세 되던 해 광산의 돌가루를 너무 많이 마시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 탓에 폐기종과 각종 합병증으로 폐인이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시던 때 어머니는 저축하신 돈을 털어 수소문한 끝에 그 귀한 산삼을 구해 약제와 달여 아버지를 살린 것이다. 광산이라는 곳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식들을 광산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벗어나기 힘들다. 아버지가 광산 노동자면 자식도 광산에서 일한다. 아버지가 고위층이면 자식도 쉽게 기업소 지배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우리를 광산 밖으로 내보내려고 노력했다. 그것을 위해 돈도 썼다. 그러다가 다행히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양정사업소(식량배급소) 지배인의 도움으로 형은 외부 직장으로 나갈 수 있었고 그후 수완 좋은 형은 우리 형제를 하나하나 밖으로 빼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나는 철도학교를 나와 철도관리소에서 일하게 되었고 형은 트럭 운전수(북한에서는 좋은 직업)로 시야를 넓혀 90년대부터 중국과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우리를 탈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광산에서만 빼낸 것이 아니다. 사상적으로 김일성·김정일 정권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감시도 심했고 조금만이라도 허튼 소리나 행동을 하면 잡혀가는 상황이 부모님의 처지였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말씀을 주입시키길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6·25는 이 사람들(북한)이 일으킨 것이야”라고 말하실 때 처음에 우리들은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또, “일제 때 주권 없이 사는 것이 이렇게 악질 같은 체제에서 사는 것보다 사람들에게는 낫다. 일본놈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지 않는가”라고 우리들 앞에서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만 잘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다른 아이들이 주먹질하면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럴 수 없다”라고 우리의 처지를 잊지 않고 조심할 것을 주의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주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은 일반 북한사람들 보다 10년은 앞서 있었다”고 말하곤 한다. 고향에서 겨우 20년도 채 못살았고 북한에서는 50년의 세월을 보내셨어도 아버지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공산당 체제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 머문 곳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 도중에 1994년 큰형이 중국에서 남한으로 연락해 작은아버지를 찾았다. 우리는 당장 짐을 싸 탈출하려고 했으나 김정일정권이 금세 망할 것이라고 내다 본 아버지는 탈출의 위험을 무릅쓰기 보다 조금만 있으면 무너질 테니 그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후 김정일 정권은 왠지 무너지지 않았고 우리는 2001년 말에서야 겨우 탈출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광산에서 벗어났고 북한에서도 벗어나 한국으로 왔다. 74세인 아버지는 아직도 정정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종종 북한을 생각한다. 함께 광산에 들어간 500명의 국군포로 중 우리가 탈북할 때 살아 있던 사람은 겨우 5명이었다고. 그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고 있다고… CNKR 조사연구부 /http://www.cnkr.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