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8.10 연중 제19주일
열왕 상19,9ㄱ.11-13ㄱ 로마9,1-5 마태14,22-33
"맑게 흐르는 강(江)같은 삶"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주님을 찬미합니다.
“추위야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라.
밤과 낮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빛과 어둠아,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찬미의 노래 소리,
며칠 전 소풍 때의 맑게 흘렀던 계곡물 소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나 강물, 늘 봐도 새롭고 좋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영감(靈感)의 샘입니다.
이번 장마철, 얼마 전 맑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을 보며 쓴
‘흘러야 산다.’ 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흘러야 산다.
물은 흘러 바다에 이르고
사람은 흘러 하느님께 이른다.
빗소리, 계곡 물소리, 하늘의 소리
힘이 난다. 마음 설렌다.
꼭 비가 와야 흐르는 물인가?
늘 흐르는 물로
맑게 흐르는
영성으로 살고 싶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라면 누구나
늘 맑게 흐르는 영성으로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삶의 리듬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은 습관입니다.
일시적인 의욕이나 마음은 얼마 못갑니다.
요행이나 지름길도 없습니다.
삶의 리듬이 습관화 되어 항구할 때 늘 맑게 흐르는 영성입니다.
전혀 초조해하거나 서두를 것 없이
평범한 삶의 리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비약이나 도약을, 특별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영적지혜입니다.
며칠 전 소풍 때 산을 오르며 깨달았던 진리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강원도 땅 큰 산이데 워낙 경사가 완만하다 보니
평지를 걷는 듯 편안했습니다.
약 두 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꾸준히 걸으니
야생화 가득한 사방이 탁 트인 정상이요,
뒤돌아보니 참 큰 산이었습니다.
“아, 이게 대기만성이구나.
평범히 항구히 노력하다 보면 정상이겠구나.”
라는 깨달음이요 바로 우리의 내적성장을 가리키는 듯 했습니다.
그냥 평범히 지내온 날들 같았는데
뒤 돌아 보니 거목(巨木)이 된 나무의 느낌도 아마 이런 것일 것입니다.
저절로 이런 내적성장의 삶이 아니라,
규칙적 평범한 삶의 리듬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의 예수님과 엘리야의 삶에서도 분명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해가 지면 기도 중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오르시고,
날이 밝으면 사람을 만나 섬김의 삶을 살려고 세상에 내려오신
바로 이게 예수님의 매일 삶의 리듬이었습니다.
밤에는 하느님과 만남의 관상시간으로 영육을 충전시키고
낮에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활동으로
온통 사랑을 쏟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엘리야 역시 하느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 동안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 합니다.
밤에는 하느님과 함께 지냈고
낮에는 예언 활동에 충실했던 엘리야 예언자임이 분명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밤 시간을 어떻게 지내십니까?
밤 시간을, 새벽 시간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영성생활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현대인들이 날로 천박해지는 것은,
얕고 가벼워지는 것은,
고요한 밤 시간에 하느님을 만나
영육으로 충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입니다.
몸 따라, 마음 따라 작용하는 오관입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봅니다.
몸과 마음이 시끄러우면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소리를 지른 제자들,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했더라면
비록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렸을지라도
동요됨 없이 예수님을 편안히 모셨을 것입니다.
엘리야 예언자, 참 마음이 고요한 분이셨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에도,
지진이 일어나도,
불이 일어나도 동요되지 않고 고요히 기다립니다.
바로 이게 지혜입니다.
내면이 바람처럼 들뜰 때,
불안과 두려움으로 지진이 일어난 듯 혼란스러울 때,
화가 불처럼 일어날 때
고요히 머물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지혜입니다.
주변 세상이 바람처럼, 지진처럼, 불처럼 혼란하고 시끄러울 때
역시 고요히 머물러 바라보는 게 지혜입니다.
이런 속에서는 주님을 뵐 수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지진이,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소리가 엘리야에게 들려옵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 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섭니다.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뵙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바람이, 지진이, 불이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져야
비로소 들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래서 규칙적이고 항구한
피정, 명상기도, 렉시오 디비나, 공동전례기도 등 수행을 권합니다.
셋째, 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 그대로 믿고
주님 현존 안에 살아갈 때 마음의 고요와 평화입니다.
두려움과 불안도 말끔히 사라집니다.
주님의 현존의 빛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새삼 하느님 현존 의식 수련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옛 수도승들 늘 하느님의 현존 안에 깨어 살도록 노력했고
끊임없는 기도가 목표하는 바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 부족으로 불안에 떨던 배안의 제자들,
주님을 배에 모셔 들이자 바람도 그치고 몸과 마음의 고요도 찾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는 제자들,
주님과 함께 할 때 마음의 고요와 평화임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늘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았던
진실한 모범적 사도가 바오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족인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바오로의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 그대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닮아 마음의 고요와 더불어
연민의 큰 사랑 가득했던 바오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게,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일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삶의 리듬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생활의 노력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늘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입니다.
바로 여기 수도승들이 지향하는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고요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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