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8.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1696-1787) 기념일
예레26,1-9 마태13,54-58
"새는 좌우 양 날개로 난다"
아침성무일도 독서 중 지혜서의 끝 구절입니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4).
하느님의 벗이란 칭호가 참 좋습니다.
누구나 되고 싶은 게 지혜로운 사람, 하느님의 벗일 것입니다.
새는 좌우의 양 날개로 납니다.
어느 제안도 으레 찬반으로 나뉘기 마련입니다.
완전히 만장일치의 하나는 없습니다.
비판과 견제가 없는 절대 독재 권력은 절대 부패로 망합니다.
좌우의, 찬반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공존의
긴장과 균형, 조화가 건강합니다.
어느 분의 말씀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은 편을 가르지 않아 좋습니다.
현실 문제에 섣불리 개입하다보면 한나라당과 반 한나라당,
이명박과 반 이명박으로 나뉘어 교회도 분열될 수 있습니다.
저에겐 지인들의 모임이 있는 데
정치 현실 문제가 나오면 즉시 찬반으로 나뉩니다.
하여 모임 때는 정치문제는 일체 거론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참 어렵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저에게도 입장이 있지만...
은총 같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본질에 이르게 되고
좌우의 대립, 분열은 까맣게 잊게 됩니다.
좌우를, 찬반을 넘어 이분법적 대립을 포용하는 경지였으면 좋겠습니다.”
저 자신도 새삼스럽고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정치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저의 입장이 강론에 뚜렷이 들어나지 않는 것은
정말 은총이랄 수뿐이 없습니다.
어느 의견이든 상대적일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이렇지만 누구나 획일화의 경향이,
자기와 같아지기를 은연중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독서의 예레미야,
마치 물위에 기름 같은 모습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이란 말이 무려 세 번 나옵니다.
자기들과 같지 않은 예수님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하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게 건강합니다.
고향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더라면
예수님은 자기도취에 기고만장의 예언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좌우, 찬반의 긴장의 균형 있어 건강한 영성생활입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기득권자들의 입에 안 맞는 쓴 소리를 하다 박해를 받습니다.
이런 쓴 소리를 수용해야 공존과 균형의 건강한 공동체인데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의 인간현실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사제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온 백성에게 포위되어 있는
사면초가의 예언자 예레미야,
마치 암흑 속의 한 줄기 하느님의 빛 같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좌우 어느 편일까요?
좌우 양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포용하시는 하느님이실 겁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어느 자매의 글도 생각납니다.
“네 편 내편, 경상도와 전라도, 강남과 비강남,...
가르게 되면 점점 편협해지고
결국 나 스스로 골방에 가두는 것 밖에 안 된다.
머리는 그렇다. 가슴도 따라오겠지.”
좌와 우의 이분법적 대립과 분열을 넘어
함께 평화로이 살아가는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벗’되어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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