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메시지
[서울대교구]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과 평화가 온 세상 곳곳에, 특히 북한 형제자매들에게도 가득히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크게 변화하였다고 전합니다. 제자들은 이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나약함 때문에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분을 구세주로 선포했습니다(사도 4,13 참조). 예수님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잠겨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을 뵙고 기쁨에 가득 차서 제자들에게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마르 16,10 참조). 주님 부활에 의심이 많았던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비로소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요한 20,28 참조).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 의심을 극복하고 활기차고 용감한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새로운 삶, ‘부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도 제자들처럼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대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와 다른 성사들 안에, 성경 말씀 안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신자들 안에 현존하십니다(전례헌장 7항). 또한 주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안에도 함께 계십니다.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집 없는 이들, 헐벗은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31-46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부활을 증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교회 밖으로 나아가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심각한 인명 피해와 정신적 고통,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통받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불의와 불공정, 부정과 이기심은 국민들 사이에 불신과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 특히 다수의 젊은이들은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과 좌절의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절감하면서 과오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지녀야 합니다. 이들이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국민만을 섬기는 봉사자로서 새롭게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도자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까지도 포용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아울러 지도자들이 개인의 욕심을 넘어서 공동선에 헌신하기를, 그중에도 가난과 절망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며 그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거룩한 교회의 재산”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사실을 잊으면 결코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없으며, 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더 크게 자라고 성숙되는 것입니다. 지난 춘계 한국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국가들의 코로나19 백신 보급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한국 교회가 ‘백신 나눔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여러 차례 “가난한 국가들이 코로나 19 백신 접종의 혜택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우려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교구도 이번 부활절에 가난한 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백신 나눔 운동에 신자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시복 청원 중에 있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모범을 따라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부지런히 사랑을 실천합시다. 무엇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 병든 이, 불의와 불공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온 교회가 그들의 아픔을 나누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국가와 사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과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바로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참다운 희망을 줄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과 평화가 온 세상에,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자매들에게도 널리 퍼져나가도록 우리 신앙인들의 어머니,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춘천교구]
선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행복합니다.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창세 8,11)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되돌아온 비둘기처럼, 긴 겨울을 뒤로하고 생명의 환희가 넘치는 찬란한 봄의 언저리에서 우리 신앙의 진수眞髓인 ‘부활’ 을 맞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겨 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이 이 순간 우리 안에 고스란히 드러나기를 기도하며, 춘천교구의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마르 16,4)
‘지금’ 을 살고 있는 우리 앞에 수많은 큰 돌들이 산재해 있지만, 오롯이 주님께로 향하는 선한 마음이 전제된다면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르 16,7)라는 성경 말씀처럼, 그 많은 돌은 치워지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수난과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부활의 새 삶으로 초대받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우리는 평안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 지구적인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갑작스러운 삶의 급정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사회의 모든 근간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는 병들어 신음하며 수많은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삶의 방향을 쉽게 바꾸지 못한 채, 그동안 무책임하게 걸었던 길을 뼈아프게 바라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함께 모여 부활의 ‘알렐루야’ 를 노래할 수 없는 이 안타까움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깨닫게 해준 무서운 경고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조화로운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상기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결국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극복이 편리했지만 안이했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서도 안 됨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전염병으로 말미암은 위기 상황은 그동안 우리가 추구한 가치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철저한 방향 전환을 요구하며 즉각적으로 회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삶에서 기인한 이 단어는, 실제적인 봉사를 하지 않더라도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착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선한 생각들이 우리의 건강에도 도움을 주어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력이 향상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봉사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를 가리켜 ‘테레사 효과’ 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부활의 기쁨과 함께 지난 사순 시기 동안 행했던 ‘약속의 실천’ 으로 ‘테레사 효과’ 가 한껏 증대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부터 코로나 극복에 대한 염원 안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면역과 함께, 선한 정신의 면역 향상을 위해 ‘선과 봉사’ 의 백신을 맞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더 나아가 복음 정신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소박한 삶을 위해 영혼의 바이러스에 맞서 싸울 또 하나의 백신,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접종하는 것은 어떨지요? 이는 공동선을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최근 회칙인 ‘모든 형제들’ 의 가르침에도 부합하며, 이웃을 위해 선한 행위를 망설이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구민 모두는 지난 사순 시기부터 어려운 이웃들과의 ‘백신 나눔’ 을 위해 사순 저금통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사랑의 결실은 돈이 없어 백신을 구하지 못하는 세상의 이름 모를 형제들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 나눔은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코로나-19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쌓아두기만 하지 않고 나누어야 함을 주님의 부활을 통해 상기하고 실천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그분은 힘이 되어 주실 것이기에 선을 향한 우리의 정진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의 표징이 절실한 이 시대에, 대홍수 끝에 싱싱한 올리브 잎과 함께 노아의 방주로 되돌아온 비둘기처럼, 빛의 일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쓸려나간 땅에 내려와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정결한 제물을 바친 노아처럼, 선의 근원이신 주님께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봉헌하기 위해 깊은 데로 나아가 희망의 그물을 내립시다.
아울러 이 시간 또 다른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인 미얀마의 모든 하느님 백성이 원하는 평화와 민주화가 이룩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합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주님 부활의 은총 안에서 우리의 삶이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기도하며, 손을 높이 들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2021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으며
여러분의 목자, 춘천주교 김 주 영 시몬
[대전교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나이다!”
(루카 24,34)
사랑하는 대전교구 하느님 백성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군가의 환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역사 안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부활이 참되다는 증거는 이를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변화된 삶이 이를 증언해 줍니다. 성목요일 밤, 두려움 속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거나 부인했던 제자들, 성금요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외면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후 죽음의 위협 앞에도 당당히 복음을 선포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부활한 삶의 증언을 반석 삼아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삶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부활을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죽음의 그늘 밑에 두려움과 절망 속에 사는 많은 이들이, 부활이 주는 참된 생명에 대한 희망의 빛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가운데의 희망
지난해 사순 시기가 시작될 즈음 국내에 크게 창궐한 코로나19는 결국 올해 사순 시기까지도 계속하여 우리에게 시련을 주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과 시련을 겪는 모든 이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특별히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많은 이에게 코로나19와 함께 보낸 지난 1년 전체는 광야를 걷는 사순 시기와도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순 시기는 결국 부활을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은총의 핵심은 희망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코로나19
로 인해 힘든 시간 안에서도 희망의 빛을 봅니다.
비가 내리는 텅 빈 베드로 광장에서 고통받는 온 인류를 위해 홀로 기도하시며 성광을 들어 올리시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습은 큰 위로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방역지침 준수로 어려운 여건 가운데에도 신자들의 영신을 돌보기 위해 온갖 창의적 노력을 기울이는 사목자들의 모습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는 많은 이들의 손길 안에서,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 안에서 어떤 죽음의 힘도 물리칠 수 있는 희망과 부활을 보았습니다.
『모든 형제들』: 열린 형제애
돌아보면, 과학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졌고 세계화도 크게 진전되었지만 우리는 유례없이 고독하였습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서 또는 먼 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소식을 여러 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 듣지만, 나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냉정하리만큼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온갖 이기주의적인 삶의 결과로 소통의 다리가 끊기고 분열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나 홀로” 극복할 수 없고, “이웃과 함께”여야만 극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즉, 이웃과 서로 소통하는 다리를 건설하지 않고는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준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세상과 교회를 향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을 통해 모든 문제의 해
결책으로 형제애를 제시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강조하시는 형제애는 물리적 근접성을 뛰어넘어 출생지나 거주지의 구애 없이 모든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열린 형제애입니다(『모든 형제들』 1항 참고). 회칙에서 교황님께서는 루카 복음의 비유(루카 10,25-37 참조)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열린 형제애의 모범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겪는 고통과 상처 앞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는 길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모든 형제들』 67항 참고).
형제애의 구체적인 실천: “백신 나눔 운동”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형제애는 말로만이 아닌, 이웃에 대한 연민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길에 쓰러져 있는 이를 보고 즉시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돌보았으며 이후 회복의 과정에도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는 오늘날, 세상이라는 길 위에는 다친 채 쓰러져 있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상처를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형제애로 보살피는 삶을 본받아, 우리는 가장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차원에서 시작하여 나아가 온 나라로 또 세상 끝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78항 참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제애를 실천하고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저는 가난한 나라의 어려움에 부닥친 형제들이 코로나19를 벗어나도록 돕기 위한 “백신 나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분이 그 취지에 공감하고 참여하고 있으며, 착한 뜻을 지닌 시민들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성을 모아 보내드린 성금을 받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대전교구 하느님 백성의 노력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담아 특별한 축복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구에서 시
작한 뜻깊은 백신 나눔 운동을 한국 천주교 전체의 운동으로 펼치기로 지난 춘계주교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백신 나눔 운동”은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며 여러분의 더욱 많은 관심과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의 은총
우리는 작년 11월 29일 대림1주일부터 시작된 은총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희년이 시작되는 날 “해미순교성지가 국제성지로 선포되는 교령”(DECRETUM, 문서번호 ST/872020/P,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장관 살베토르 피지켈라 대주교)이 교황청으로부터 발표되는 큰 선물도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 교구 시노드의 근본정신 중 하나였던 순교 영성을 우리의 삶 가운데
실현하기 위한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순교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사셨던 분들이십니다. 일례로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초라한 나무배에 의지한 채 중국과 조선을 오갈 때,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성모님의 상본 하나에 의지하며 물러섬 없이 항해하셨습니다. 이처럼 김대건 신부님은 늘 신앙과 삶이 일치하였고, 순교의 월계관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단순함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따지며 신앙 따로, 삶 따로인 모습으로는 결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도,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의 인류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참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성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삶 안에서 찾고 삶으로 증거하는 은총의 희년이 되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함께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혼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 곧 신기루만 볼 위험이 있습니다. 꿈은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8항)라는 말씀처럼 부활의 희망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세상 모든 이가 함께 꾸고, 함께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작지만 따뜻한 사랑이 담긴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나이다!”(루카 24,34)
2021년 4월 4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마태 28,7)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러분 모두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라고 고백했던 사도들과 같이,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서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며 예수님을 떠나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은 절망과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러 내줄까요?”(마르 16,3)라는 그들의 말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걱정과 앞날에 대한 근심을 드러냅니다. 절망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빈 무덤은 희망이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이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마태 28,8),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마르 16,9).
부활을 체험한 이들은 변화합니다. 절망에서 기쁨과 희망으로, 비통함에서 새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며, 주님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아 실행합니다(참조: 루카 24,13-35; 요한 20,19-23).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느끼고 변화되었는지 깊이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커다란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한편, 성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본 그들이 자신들의 본업인 어부로 돌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만납니다(요한 21,1-14). 그들은 고기를 잡으러 나갔지만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활한 주님이 나타나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말씀을 따랐던 제자들은 많은 수의 물고기를 잡게 되고,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믿음은 부활을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믿음이 부활한 주님을 보게 하고, 만나게 하며, 우리를 변화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이 믿음은,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적 사고’, ‘자기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때 싹트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가 만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신앙도 아닌, 진정으로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그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하고,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 안에서 우리는 불신과 의심, 절망과 고통에서 확신과 희망, 그리고 기쁨의 삶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이 빈 무덤에 들어가 새롭게 변화되어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무덤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코로나-19가 1년 이상 지속되면서 아직도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단절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며 인간관계의 단절을 체험하고, 예전의 자연스러웠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을 경험하며, 이에 따르는 경제적 어려움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곧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의 불씨는 시간이 흐르며 우리 마음속에서 점차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뉴스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되는 절망스러운 소식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모습들, 확인되지 않은 가짜 뉴스로 점차 절망과 불신, 분열이 조장될 때 더욱 그러하게 느껴집니다. 서로 배려하고 위하기보다는 장벽을 세우는 단절의 문화가, 거리두기라는 이름으로 더욱 팽배해져 가는 듯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앞세우며,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유만을 생각합니다. 또한, 자신만의 생각으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모습들이 만연해갑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해줍니다. 우리를 그 희망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세상에 전하도록 우리를 파견합니다. 이 어둡고 어려운 시기에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서로의 형제가 되어야 하고 우애를 나누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형제애는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유일한 힘이며, 자신이 지닌 벽을 허물게 하고, 서로의 고통과 절망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을 체험한 이들은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2천 년 전에만 체험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우리도 나를 벗어나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부활을 체험하여 기쁨과 희망을 선포합시다.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나’를 벗어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주님을 모신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부활한 주님이 주신 사랑을 전합시다. 부활을 체험하고 희망을 선포했던 삶은 지난 60년간 우리 교구가 지역 사회 안에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사랑으로 전해져야 할 이때, 우리도 교구 역사 안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 사랑을 주위에 전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한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 교구장
정 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교구민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제자들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따스한 시선 안에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 가득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드리워진 불신과 불목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마르 15,38 참조).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편협한 시선으로 서로 구분하며 대립과 투쟁을 일삼던 세상에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을 펼쳐 보이셨으며, 종국에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세상에 나아가 사랑과 용서로 모든 인간의 존엄에 바탕을 둔 보편적 형제애를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한 20,23 참조).
지금 세상은 코로나19 감염병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서둘러 백신을 개발하였고, 접종을 시작한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모든 나라가 백신 접종을 통해 코로나19 감염병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지만 일부 가난한 나라들은 백신을 구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도움의 손길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자국민만을 우선하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가난한 나라들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이를 우려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바로 지금이 보편적 형제애를 발휘해야 할 때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천주교회도 보편적 형제애의 실천으로 ‘백신 나눔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나눔이 가난한 나라의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의 희망(백신)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다 함께 평화롭게 사는 문화” , 곧 보편적 형제애의 실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 가정은 사랑과 형제애, 공동생활과 나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가치를 배우고 전달하는 첫째 자리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보여주는 형제애의 실천은 자녀에게 모범이 되고,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됩니다. 특히 형제애의 실천은 가족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봉사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봉사는 힘없는 이들, 우리 가정과 사회와 민족 가운데 힘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돌봄을 의미합니다.” “봉사는 언제나 가장 힘없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들과 직접 접촉하며, 그들의 친밀함을 느끼고 때로는 이 친밀함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며,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성 요셉의 해’ 와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동시에 지내고 있습니다. 자칫 한 번에 세 가지를 기념해야 한다는 것에 다소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가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이토록 성가정 자리매김에 초점을 맞추며 온갖 힘을 기울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앙 안에서 가족 구성원이 맺는 유대와 사랑이야말로 우리 교회와 사회를 지탱하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보편적 형제애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 시대에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실천, 곧 가난한 이웃을 향한 나눔과 봉사는 전 인류의 존엄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부활의 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정들 가운데 가정’으로서 자신을 내세우기를 열망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서 주님을 향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증언하고자 열려 있습니다. 교회는 어머니이기에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사람들의 삶에 동행하고 희망을 지지하며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형제애의 이 여정에는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도 함께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으로 마리아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낳아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버려진 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으며, 부활하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가 빛날 것입니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1년 4월 4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 찬미예수님,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도 극성을 멈추지 않았는데,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올해 사순절은 40일보다 훨씬 길었다는 느낌입니다. 전자 현미경 없이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물로 인해 온 세상이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카톡에 뜬 글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면 마스크로 말을 못하게 입을 막을까?
얼마나 화가 나면 서로 만나지 못하게 거리를 두게 할까?
얼마나 화가 나면 더러운 검은 손을 깨끗이 씻으라 했을까?
이런 글도 있습니다.
속삭였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말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났습니다. 나는 처벌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깨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이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려하라고. 피조물의 영장인 인간은 지도자답게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생각하라고. 다른 사람들의 호소를 들으라고. 자연의 비명을 들으라고. 그리고 서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라고.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뜻 아닐까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장차 있을 우리들의 부활의 확증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기억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들의 부활은 다시 죽어야 하는 소생과 다릅니다.
우리들의 부활은 봄이 되면 다시 피어나는 꽃과도 다릅니다.
그 부활은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1코린 2,9)”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한 우리들의 삶에는 마스크도 없을 것이고, 거리 두기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장엄한 부활의 기적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기도합니다.
2021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조 규 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기를 바랍니다.제자들에게 완전한 절망을 주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어둠으로 여겨졌던 죽음이었지만,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극복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던 절망의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밝은 빛이 되시어 새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빛 앞에서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은 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을 되찾아 준 사건입니다. 온갖 죄로 빛을 잃어가던 우리의 생명은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은 그분 부활의 힘으로 죄와 죽음, 좌절과 절망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명이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오늘날 생명이 위협받는 현실을 생각해봅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전 세계의 28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이러스 전염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어 그 수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기후위기로 인한 폭우와 폭설, 장마와 가뭄,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가 강력하고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생활 터전을 잃었습니다.
시선을 멀리 돌릴 필요 없이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이상 기후로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재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많아졌고, 사람들 간에 연결 고리가 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상실감과 소외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웃이 늘어났습니다. 직접적인 죽음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생명이 위협 받는 어둠의 분위기가 널리 감돌고 있습니다.
희생을 동반하는 애덕 실천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현실이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선사해주신 희망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선물해주셨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싶습니다.
교회는 엊그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비통한 심정으로 기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고통을 받아안으신 이유는 죄로 얼룩진 우리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과 가엾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애끓는 마음을 기억하며 그분을 닮아 이웃을 향한 연민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팬데믹의 상황에서 파괴되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로 형제애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애를 실천한 모범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모든 형제들」 “제2장 길 위의 이방인” 참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이웃을 향한 짙은 연민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는 불편을 감내했습니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단순히 ‘좋은 마음’을 넘어 자신의 것을 내놓는 구체적 희생이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좋은 마음은 선행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좋은 마음이 그 자체로만 머물 때, 그것은 어떠한 결실도 맺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좋은 마음은 우리 삶에서 육화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좋은 마음만 가지면 될 거라는 막연함으로 얼마나 많은 애덕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희생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동안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이유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피조물을 향한 노력
타인을 향한 애끓는 마음은 모든 피조물에까지 향해야 합니다. 최근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이 늘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징후들을 체험하면서 위기 의식을 느낀 까닭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가톨릭기후행동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과 관심은 높아졌지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는 데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실천이 부족한 이유는 타성화된 습관과 불편함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올해 사순시기를 시작할 즈음, 우리 교구 사회사목국에서는 「찬미받으소서, 행동」 책자를 발행하였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인으로서 노력해야 할 구체적인 방안들이 실려있기에 많은 교우들이 읽고 생활로 옮기면 좋겠습니다. 보편교회가 권장하는 7년의 여정이 잘 정리된 안내에 따라 삶의 습관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특별희년을 보내며
올해는 한국 천주교회가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희년으로 보내고 있는 해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교구의 주보이기도 하기에 이번 사순시기에는 온라인 특강을 통해 신부님의 행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의 영웅적인 용기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누리시는 성인께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함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하도록 합시다.특히 희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 신자들은 신부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라고 증거하며, 이 땅이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서로 돕고 사는 나라가 되는 데 앞장 서야 겠습니다.
끝으로 두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가난한 나라의 이웃들이 백신을 맞아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도록 <백신 나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질병이나 재해 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하는 이들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입니다(「찬미받으소서」 25항 참조). 실제로 백신 보급의 불평등은 새로운 국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도 인류의 유산인 백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나누는 일에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웃 나라인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이 하루 빨리 끝날 수 있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는 바람은 평화의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실 것이며, 동시에 이땅의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구 형제자매님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다시 한번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놀라운 선물을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과 함께 함으로써 생명과 사랑을 널리 알리는 사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놀라지 마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르 16,6)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온갖 수난과 모욕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주님 부활 사건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 삶의 희망입니다. 죄와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 태어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아직도 세상은 암울합니다. 우리나라만의 사정은 아니지만, 코로나19 상황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시작되었지만 상황은 더디기만 합니다. 확진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힘겹기만 합니다. 경제상황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으며, 요양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은 가족과의 만남도 어려워 외로운 시간들을 보내다 세상을 떠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혐오와 증오 범죄가 세상에 만연하고,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비리는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만 더해줍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은 군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군경의 총탄에 쓰러지고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성명만 발표할 뿐,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전 제8대 교구장이셨던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님을 하느님 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교구를 위해 일하셨고,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 같았던 대주교님께서는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주일 새벽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모든 것을 우리로부터 단절시킵니다. 죽음의 힘은 너무나 큽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우리는 세상에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보고 싶어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내가 지금 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의미를 잃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합니다. 이렇듯 죽음은 세상 모든 것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죽음의 세력이 세상을 장악한 듯이 보입니다.
내 곁에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안겨주며, 또한 그 죽음이 언제 나의 삶을 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았습니다.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고,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서민들의 삶은 암울하지만,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마치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여린 새싹들처럼, 죽은 듯이 보이던 고목의 나뭇가지에서 피어나는 어린 꽃잎들처럼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으로부터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은 마치 승리하여, 예수님과 이 세상을 영원히 갈라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당신 뜻을 따르려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 부활 사건은 예수님에게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로마 6,9)
우리 교구 공동체는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장기 사목 계획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목교서를 통해 강조했듯이, 올해는 ‘하느님 말씀을 따라’라는 주제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힘과 희망을 얻어 기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아집, 욕망을 버리고 내 안에 심겨진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워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죽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우리가 신앙생활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말씀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 부활의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모든 교우들의 가정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과 복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2021년 4월 4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삶이 바뀌어야 부활이 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2021년에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속되는 코로나19로 지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고 크신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모두들 힘들어하는 이 시기에 맞은 2021년 사순절과 주님 부활 대축일은 여느 해 보다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은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도 여러 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어둡고 긴 터널에 들어선 지 1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터널 속의 이 어둠이 두렵고 익숙하지 않아 불안해하고 또 두려워합니다. 아울러 언제 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더욱 답답해합니다.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겁에 질려 바깥출입도 못 하고 골방에 숨어서 공포에 떨던 제자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요? 사흘이라는 그 시간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흘 동안 제자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스승님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그렇게 능력이 있으셨던 분이 허무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절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언제 로마 군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여주셨고, 부활하신 스승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모
든 것을 떨치고 일어서는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기쁨에 가득 차 용기를 얻고 힘차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들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단지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 안에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계속된 코로나19로 인해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죽음과 멸망의 고통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시련에 불과합니다. 물론 아직도 여러 상황에서 많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 힘듦 가운데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었고 또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한 편리함과 풍부함만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이 이웃을 배척하고 세상과 자연환경을 파괴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서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더불어 서로 사랑하고 위하며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더불어 사는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고 지구와 자연과 환경임도 알았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았던 삶의 많은 부분이 생명을 살리는 부활에 역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겪은 어둠의 사흘을 겪고 있는 우리도 이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참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고 회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도 부활의 삶
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할 때 이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고, 이 지상에서의 부활의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의 삶이 영원한 부활로 이어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평화에 힘입어 기쁘고 복된 부활의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이날을 기뻐하고 우리 함께 춤을 춥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천주교 부산교구장
손 삼 석 요셉 주교
[청주교구]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1.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신 날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은 감격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와 악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가 결코 풀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해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묻히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셨습니다”(이사 25,8). 그리하여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세례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힌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28항, 로마 6,4-5 참조).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며, 늘 기도하는 삶의 토대요 원천이 되었습니다(1테살 5,16-18 참조).
3.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입니다. 주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매주간 돌아오는 ‘작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곧 주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마태 28,1 참조). 초대교회 신자들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간 첫날을 ‘주님의 날(주일)’로 지내기 위해 함께 모여 성경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교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자녀들이 매주일 함께 모여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주일미사를 줄곧 거행하여 왔습니다. 이처럼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핵심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급변하는 우리사회의 여러 상황들은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석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주일의 근본적 의미가 상실되고, 단지 주말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확산은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석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모든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하는 주일미사가 중단되었고, 이후에도 장기간 제한적 인원으로 미사를 거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부득이 신자들에게 (평화방송미사, 유튜브 미사 등) 비대면 방식의 대송으로 주일미사 참례의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교회법 1245조, 한국천주교회 사목지침서 제 740조 4항 참조). 이와 같은 교회의 조치는 주일을 꼭 지켜야 한다는 신자들의 의식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주일미사 참례는 신자 각자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신자들은 누구나 주일미사에 참여할 중대한 의무가 있습니다”(교회법 1247조 참조). 주일미사 대송허용은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주일미사 참여의무를 대신하도록 한시적이며 예외적으로 허용한 결정이지, 신자 각자가 아무 때나 임의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핵심이 되는 날입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 속에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일 년 52주 주일미사에 꼭 참여하는 가운데 활력 넘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4. 주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의 기억이자 기념인 “주일의 성찬례는 우리에게 사랑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갖가지 애덕과 신심, 그리고 사도직 활동에 투신하도록 촉구합니다”(주님의 날, 69항 참조). 사도시대 이후부터 주일 모임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형제애의 나눔을 실천하는 시간이었습니다(주님의 날, 70항 참조).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 헐벗으셨을 때 모른 체하지 마십시오. 비단으로 장식된 성전 안에서 그분을 공경하면서, 그분께서 바깥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실 때는 모른 체하지 마십시오. 먼저 그분의 주린 배를 채워드리고 나서 남은 것으로 제대를 꾸미십시오”(주님의 날, 71항 참조).
우리 주변에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장기화 여파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일일노동자,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찬례는 우리에게 형제애를 실천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매주일이 고통과 가난, 그리고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물질과 시간을 나눔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5.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여 주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마음에 깊이 새기며, 주일을 거룩히 지키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당부합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2021년 4월 4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주교
[마산교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6)
1. 미안한 마음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나라는 깨졌지만 산하는 여전하니
성 안에도 봄이 왔다고 초목이 우거지네
나라의 비운을 겪었던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춘망(春望 봄날의 소망) 첫 구절처럼 가중되는 코로나로 수상한 정치 현실로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이 갈라지고 거칠어져 분노조절장애 상태에 놓여 있는 지금, 엄동에 피어 추위에 떨었던 저 꽃들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합니다. 봄이 왔다고, 그러지 말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부활의 길을 가자고 손짓합니다. 무슨 의미인지도 알겠고 고맙기도 하지만 약을 잘못 먹었는지 도무지 일어나지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오래오래 복용했던 습관이라는 약이 우리를 관성의 감옥에 갇혀버리게 한 모양입니다.
며칠 전 저녁 식사 후 교구청 주교관 앞뜰에 누군가 차를 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후라 주차장이 거의 비어 있어서 아무 데나 적당히 파킹해도 되겠다 싶은데도 바닥 규격 위에 똑바로 세우려고 한참이나 애쓰는 모습이 참으로 귀해서 기다렸다가 그 청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작은 미소로 답해주는 순간 저는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그에게 도덕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미안함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늘 빚을 지고 삽니다. 깜깜한 이른 새벽 쓰레기를 치우시는 분들, 더러운 오물을 수거하는 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을 담보로 한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낮은 임금이나마 생계를 버텨보려고 애쓰는 많은 분들에게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일 뿐입니다.
2. 생명
나아가 사람은 사람에게만 서로 빚을 지고 사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더 큰 빚을 지며 살고 있습니다. 생명체는 그것이 살아 있는 한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얻어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 마치 원죄와도 같은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취하는 우리 인간은 그들의 값진 희생을 우리 자신들의 보다 나은 도덕적인 삶으로 갚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에덴동산 한가운데 ‘선악과’ 한 그루만 있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생명나무와 함께 두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창세기 2,9) 우리는 모두 생명 자체이시며 생명 있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나무에 어떤 식으로든 생명으로 참여(participatio)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진리
그렇습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귀하게 마련된 생명나무가 그렇듯이 그 곁에 조심스레 심어진 선악과의 주인도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신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인간에게는 그 마지막 답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법률적인 용어로 하느님께만 유보(留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풀이하면, 도를 인간의 언어로, 개념으로 도라고 규정하면 그건 더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노자의 이 깊은 뜻에 따라 적폐를 적폐라 하면 더이상 적폐가 아니다라고 말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 뜻은 오래오래 누적되어 온 폐단을 적폐라고 누군가 규정할 때 그 규정하는 잣대,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시금 그 기준(criterium)의 적법성이 의문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진위의 잣대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휘두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때 다시금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서로에게 늑대가 되고 맙니다. 진리는 우리 손만으로 쟁취 ․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어진 진리(요한 17,17 참조)를 그렇다! 그렇구나!를 반복해서 깨달으며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십자가의 길
끝내 사랑했던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며 불안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생명이시며 진리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길이 되셨습니다.(요한 복음 주해 Trac. 34,8-9) 그 길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부활케 하는 길이며 모든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되는 길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피흘려 마련하신 이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는 하느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 부활의 길이 되었으니 그것이 코로나든 그것이 피폐함이든 더이상 인생이 주는 고달픔 속에 너무 연연하지 맙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예, 주님. 믿습니다. 우리는 그냥 뭇인간들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2021년 주님 부활 대축일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부활은 희망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우리도 부활의 “새로운 삶”(로마 6,4)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나날이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떠한 불안도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만을 두고 희망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며 현세의 어떤 어려움도 잘 견디며 극복하면서 새로운 희망으로 삽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시고(에페 2,12 참조) 그리고 또 그분께서 친히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기에(1베드 1,3 참조), 부활의 삶 자체가 우리들의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1년이 넘도록 코로나19와 함께 시련의 시기를 지내면서 많이 힘들었고 답답했습니다. 아파하는 사람들과 고통과 곤경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도 했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앞에서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마태 28,20)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시어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하시고 “생생한 희망”(1베드 1,3)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로나19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 길로 초대하시기에 우리는 함께 그 길에 동참하려 합니다. “저는 모든 이를 새로운 희망으로 초대합니다. … 희망을 품고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모든 형제들』, 55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최근에 발표하신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이라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에 관한 회칙(2020.10.3.)을 통해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형제애에 대한 세계적 열망을 되살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함께 공동의 꿈을 이루자’고 곳곳에서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 일부 내용을 함께 들어보도록 합시다.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 비극은 우리가 모두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세계 공동체라는 인식을 삽시간에 효과적으로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배 안에서 한 사람의 불행은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고 오로지 함께라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32항)
최근의 감염병 확산으로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 응답한 수많은 길동무들을 다시 한번 알아보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공동 역사의 결정적 사건들을 용감하게 써 내려온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엮여 있고 그들을 통하여 지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은 의사, 간호사, 약사, 상점 종업원, 환경미화원, 요양사, 운송 종사자, 기본 서비스 제공자와 보안 요원, 자원봉사자, 사제와 수도자 등입니다. 이들은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54항)
우리는 상처 입은 사회를 되살리고 지원하는 데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형제자매라는 것을 표현하고, 증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여정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우연히 지나가던 그 사마리아인 행인처럼, 쓰러진 사람을 받아들이고 통합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꾸준히 지치지 않고 노력하는 민족과 공동체가 되려는 자발적이고 순수하고 단순한 바람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을 찾아 나섭시다.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거나 무기력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품어 안읍시다.(77-78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대담 형식으로 쓴 다른 책(『LET US DREAM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에서, 당신이 지금까지 살며 개인적으로 ‘코로나’와 같은 위기를 세 번 겪었다고 말씀하십니다.(105-115쪽) 그러면서 그 위기를 통해 당신이 배운 것이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많은 고통을 받겠지만 그 고통을 변화의 기회로 삼는다면 위기가 지나간 후에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외면하고 숨어버리면, 위기가 지나간 후에 상황은 더 나빠질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 직접 당신의 이야기를 하신 목적은 우리 각자에게도 코로나19 위기뿐만 아니라 ‘코로나’와 같은 개인적인 위기가 있을 수 있으니 우리도 그 위기를 오히려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회로 적극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위기를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십자가와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누리게 되는 부활의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어떠한 시련도 위기도 십자가와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섭시다. 용기를 냅시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위로로 삼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 13)
2021. 4. 4.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사도 17,3)
세상의 빛이시며(요한 8,12),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신(루카 24,6)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이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돌아가신 후 곧바로 알려집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 계십니다”(2코린 13,4)라고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2. 부활의 은총은 회심으로 이끌어줍니다.
바리사이로서(사도 26,5; 필리 3,5)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던(사도 22,3)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몹시 박해하였고, 심지어 아예 없애 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갈라 1,13).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사도 9,3-6) 회심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다.”(필리 3,12)라고 확신하며, 자신이 축적하였던 지식이나 명성, 신념과 가치관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고, 이전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갑니다.
3. 사랑을 추구하십시오(1코린 14,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 바오로가 체험한 하느님의 모습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체험은 어떤 환난이나 역경을 당해도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횃불처럼 타올라(집회 48,1 참조) 확신에 찬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체험한 이 뜨거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박해받는 이들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는 보편적 사랑의 선교사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온 삶을 바꾸어 놓았던 예수님의 그 사랑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이제는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참조).
4. 전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의 노력입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상황에서 특별 전교의 해를 지내는 것은 복음 선포 사명에 따른 시의적절한 응답이라고 여깁니다.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이 팽배해 있는 지금은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우리가 “(이웃에 대한) 돌봄과 보살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육체를 위한 백신 이전에 마음을 위한 백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존중하며 보살피는 사랑의 나눔을 통해 복음의 기쁨을 전하도록 합시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하고, 세상 한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갑시다. (요한 1,1-14 참조).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웃을 위한 기쁜 소식이 됩시다.
5. 2021년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을 되새기는 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사랑의 기쁨」 반포 5주년을 맞이하여,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가정 교회로서 “가족”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지 보여주며, 가족의 유대가 갖는 중요성을 통해 교회가 “가정들의 가정”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사랑의 기쁨」, 87항). 교종께서는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를 맞이하여 전 세계 교회 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가족 사랑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6. 전교 활동은 가정 공동체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교구의 3개년 특별 전교의 해는 교구민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선교사로서 세상 속에서 복음의 기쁨과 희망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교구민이 주도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선교하는 제자요 자비의 선교사”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모든 가정 교회의 삶을 통하여 촉진되며, 이렇게 가정에서 실천하는 사랑은 교회의 삶에서 변치 않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사랑의 기쁨」, 88항).
7. “만남의 예술”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됩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보편적 형제”(「모든 형제들」, 286~287항)가 되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용서와 형제애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만남의 예술”(「모든 형제들」, 215항)을 본받아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로마 8,22)을 알고, 나의 개인적⋅주관적 행복보다는 그들과 “대화와 사회적 우애”(「모든 형제들」, 215항)를 다져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마태 6,33) 찾고,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찾아 그들의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분명 세상 한가운데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며, 또한 그분을 맞아들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요한 1,11.14 참조).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코로나19 감염증 상황을 겪으면서, 혼자만으로는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대하는 공동체성 회복을 통하여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사랑과 배려와 상호존중의 연대성이 확장되어 우리 모두 주님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80년 5월 우리 지역민들이 겪었던 군부 쿠데타의 희생을 겪고 있는 미얀마 국민에게도 하루빨리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2021년 4월 4일 부활 대축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전주교구]
부활하신 주님은 성찬례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길 빕니다. 작년에 부활대축일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슬픔 때문에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만끽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작년 초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사태의 먹구름이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많은 고통을 겪거나 목숨을 잃고 있고, 감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물론 각종 모임과 행사가 계속 제약을 받음으로써 모든 영역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마르 16,11.13) 오히려 “헛소리처럼”(루카 24,11) 여겼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루카 24,16)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루카 24,37)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마르 16,14) 제자들이 믿지 못했던 것은 십자가의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분명 되살아나시어 제자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 삶에 개입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서서히 믿음에 다다랐습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의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의 힘겨운 삶에 분명 동행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분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 같은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 대부분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활동하십니다(1열왕 19,11 이하 참조). 그분은 코로나19로 고통을 겪는 인류를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이로 인해 특히 소외되고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을 각별하게 돌보십니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에게 헌신하는 의료진들에게 힘과 용기를 더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자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돕게 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날마다 여러분 곁에 계시면서 여러분을 깨우치시고 힘을 주시고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복음의 기쁨 164항)우리의 일상 삶을 조금 더 유심히 믿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더욱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자리는 당연 성찬례입니다. 미사성제 안에서 주님은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심으로써 우리의 눈을 열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십니다(루카 24,13-35 참조). 우리는 성찬례 안에서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받아 모시고, 그분과 참으로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도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요한 6,56 참조). 이 성찬례보다 부활하신 주님과 더욱 친밀하게 결합할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올해 사목교서에서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는 가운데 성찬례에 적극 참여하자고 당부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성야 빛의 예식에서 부활초가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의 삶을 환히 밝히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힘으로 박해, 음모, 체포, 구금, 고문, 모욕, 증오 등의 세상의 온갖 어둠을 견뎌내시고, 마침내 가장 짙은 어둠인 죽음마저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지칠 줄 모르게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어둠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어둠이 그분의 사랑 앞에서 무기력하게 됩니다. 부활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며, 궁극적으로 사랑만이 승리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빛이시기에 우리가 일상 삶이나 성찬례 안에서 그분을 만나면, 그분 친히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두 가지 부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온갖 어둠을 멀리하는 열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물리칠 수 있고, 이러한 곤경의 시기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불신과 차별과 혐오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늘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소비주의, 상대주의 등의 그릇된 현대의 가치관과 분명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의 모든 문제를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다양한 유사종교들도 단호하게 배척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신 그리스도는 오직 하느님만이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며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신다.”(1사무 2,6)고 선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의 온갖 이데올로기를 멀리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생명의 빛을 누리는 열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길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주님께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는 먼저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 등이 치유되고 마음속의 어둠이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창조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새로운 삶”(로마 6,4)을 살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에페 5,9)의 열매를 맺으며,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2코린 5,15) 됩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의 “상처들을 어루만져주고, 거기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주며, 자비로 싸매주고, 연대와 관심으로 치유해주는”(자비의 얼굴 15)열매를 맺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우리의 일상 삶에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특히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납시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온갖 어둠에서 벗어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21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요한 주교
[제주교구]
부활의 삶으로 『형제애』를 실천합시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따사로운 햇살은 만물을 어루만지고, 대지는 그 모태로부터 아름다운 꽃들과 신록의 작은 잎들을 세상에 피워내며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창조의 은총을 간직한 갖가지 피조물들이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으로 인간 이성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소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부활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생애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고 사셨습니다.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그 말씀을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굳게 믿고 온전히 간직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온전히 삶을 사시고, 봉헌하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선포와 표징들과 삶 전체가 참된 복음이며 계시된 진리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세상이 결국 허무한 종말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불사불멸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단순히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Now and Here)』 주님 복음에 믿음을 두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삶을 살아 낼 수 있음을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은 다음에 누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주님 부활의 충만한 생명을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2천 년 전 과거에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에 대한 하느님 정의의 승리, 거짓에 대한 하느님 진리의 승리, 죽임에 대한 하느님의 살리심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바로 부활입니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백신을 확보하여 자국민들에게 공급하며 전염병 확산을 막고 다시 일상의 삶을 회복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나라와 지역에서는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이 늘고 있고 이로 인한 사망자도 증가하고 있어 재유행의 위험이 계속되는 가운데 불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 개발이 우리 모두에게 일상의 삶을 회복시켜 줄 희망의 표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생태계 위기를 연구하는 많은 석학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의 원인이 개발과 성장의 이념에 사로잡힌 인류의 무분별한 삶이 지구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시킨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생태적 회개의 삶으로 전환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위기는 다시 반복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강대국들의 백신 확보 경쟁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가난한 나라와 지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인류 모두에게 소중한 백신의 확보와 접종이 선진국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시며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진정한 형제애를 실천해 줄 것을 요청하시고 서로 연대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유행 상황 속에서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대처의 방역체계로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따라서 보편적 인류애에 입각한 국제 사회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미얀마에서는 군부의 불법적인 쿠데타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탄압받으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우리 인류가 아직도 캄캄한 어둠의 터널을 무기력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으로 눈을 돌려보면, 재난 지원금 지급 등 정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 실직자들은 늘고 있고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은 지속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인도적 체류 허가 속에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더욱 더 악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의 현실을 바라보면, 다음 세대를 위한 제주 환경 자원의 보존 가치를 고려하는 장기적인 안목 없이 오직 단기적인 경제성과 일자리에만 매몰된 채,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개발이란 이름의 파괴로 인하여 아름다운 중산간 지역과 해안 보존 지역이 훼손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해결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쓰레기 처리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재앙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지하수의 고갈과 오염 문제를 불안한 미래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민주국가의 행정은 도민의, 도민을 위한, 도민에 의한 행정이어야 함에도 절차적으로 정당하게 이루어진 제2공항 여론 조사 결과를 행정권자가 쉽게 무시해 버리는 모습은 현대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제주의 미래를 위한 현 제주 도정의 정당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지난 춘계 주교회의는 코로나 감염증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사목적인 주제들이 논의되었습니다. 특별히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형제애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코로나 상황 극복을 위한 「백신 나눔 운동」에 전 교구가 동참하여 한국교회 차원에서 협력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한 달 넘게 지속하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에 한국 교회의 연대의 손길이 필요함을 확인하고 주교회의 차원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각 교구에서도 기도와 미사를 통해 가난하고 박해받는 이들과 연대하며 또한 실제적인 형제애의 실천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증거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희년을 보내면서,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복음의 정신을 통하여 형제애를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내어 충만한 사랑의 형제애를 구체적으로 실천합시다. 제주교구도 「백신 나눔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도 보편적인 인류애 속에서 연대합시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으로 조명되고 정화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 부활로 확인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굳게 믿으며, 나와 가족의 부활, 더 나아가 이웃과 온 인류의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현세의 삶을 살아갑시다. 모든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형제애로 맞이하면서 하느님의 작품이며 창조물로서 우리와 한 형제인 파괴하고 소멸되어 가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형제애를 실천합시다.
주님 부활의 사랑으로! 형제애의 기쁨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군종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