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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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님의 선택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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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석 [pedro12] 쪽지 캡슐

2009-12-14 ㅣ No.4008

 
어느 자매님의 질문내용
 
로마서 9장 12- 16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을 동정한다."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신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뜻인가요?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면 왜 간절히 주님께 기도해야 할까요?
해설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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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내용
 
가.서론

자매님의 질문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써 신앙 안에서 누구라도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헤아려 볼 수 있는데, 많은 부분
하느님의 신비 안에 감추어져 있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성경 안에는 여러가지로
상이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씀들이 있어 누구라도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답변을 드리기는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드리는 답변은 성경과 교리서에 근거하였으나 제 개인적인 묵상이 감안되었으므로
자매님의 평소 생각과 다를 수도 있고, 정통적인 성경해석과 다를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그리고 저희 가톨릭의 공식적인 교리와 다른 부분이 만일 있다면 제 글이 잘못된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자매님의 질문에 대해 다음 몇가지를 성경에 근거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2.우리의 선행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원(구속)받는다는데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3.왜 공로나 선행으로 구원(구속)받지 못하는가?

4.구원으로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원리는 무엇인가?


나.본론

1.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인간의 선택에 맡겨진 것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모든 게 절대적으로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졌다 라는
절대 예정론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정해진 것은 무엇일까요?
크게 보아서 시공간의 환경(때와 장소)과 상황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져 있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코헬렛 3장, 사도행전 17장26절 참조)

성경이 시작되는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정해진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거주지: 불순종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으로 정해짐.(창세기 2장)
선악과를 취함으로 불순종한 이후에는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당함.(창세기 3장)

2).환경 : 에덴동산에서는 저절로 열매맺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노동할 필요가 없슴. 그러나 추방 당한
이후에는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고통 중에 얼굴에 땀을 내어 노동해서 양식을 땅에서
부쳐 먹게 정하심.
 
자세히 보시면 에덴동산 안과 밖이라는 거주지와 그에 따른 환경(축복과 저주)이 이미 하느님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자세히 인과관계를 놓고 고찰해 보면 에덴동산 안에서 살게 정하신
것도 하느님이요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하신 분도 하느님이시지만 추방당한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
기인하기 때문에 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로되 선택은 사람이 했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하느님께서 절대적으로 정해 놓으신 환경(축복 저주)과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몇날 몇시에 어느 가정에 태어나서 어떠 어떠한 환경과 상황 하에서 살다가
정해진 시간에 누구나 죽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정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즉, 정해지지 않았다 라는 의미는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용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정해진 것은 환경과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과 환경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지를 우리 대신
하느님게서 정해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두가지(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 만 놓고
볼 때에는 모든 게 정해진 것 같지만 어떤 것을 택할 지를 하느님이 우리 대신 정하시지는 않았다 라고 성경은
해석됩니다.
 
다음의 창세기 말씀을 먼저 읽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16 :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창세기 2:17 :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하느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서로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는 "모든 나무에서" 라는 표현을 통해 아무 열매든지 따먹어도 된다 라고 말씀하시나 17절에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먹으면 안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말씀이 충돌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을 정하신 것일까요? 
 
먼저 정하신 것은 아담이 자유의지로 어떠한 나무건간에 아담의 임의대로 선택하여 열매를 따먹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선악과를 포함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있는 자유의지적 선택을 아담에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애시당초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고 따먹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두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아담이 하느님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뱀의 유혹에
넘어가 불순종의 길을 택함으로써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높은 단계의 뜻)은 아니었지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허용하시지
않았더라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따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불순종도 마지못해 허용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하느님의 허용적인
뜻 안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허용적인 뜻은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허용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나타납니다.

모든 게 정해졌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운명론자들은 위의 상황을 이해함에 있어 하느님께서 따먹도록
정하셨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예 선악과 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지 않았으면
원천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아가서 뱀이 유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선악과를
취하지 않았을텐데 결과적으로 보아서 그러한 불순종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허용하신 하느님의
책임인데 이는 환경과 상황을 안배하시는 주권이 바로 전능하신 하느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하느님의 뜻 중에서도 가장 낮은 단계의 허용적인 뜻 안에서만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온전하시고 궁극적인 뜻인 구원(영생)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하느님의 허용적인 뜻이란 "하느님께서 마지못해 한시적으로만 허용하시는
가장 낮은 단계의 뜻"임. 온전하시고 영원하신 뜻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허용적인 뜻을 이해해야 함.)
 
창세기 2장에 보시면 하느님께서는 선악과 나무에 앞서서 생명나무(영생, 그리스도 예표)를
아담 앞에 두시어 하느님의 뜻은 사람에게 영생(구원)을 주시고자 하심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생명나무를 선택해서 하느님의 임재(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심을 성경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도록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완전 절대 예정론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아담이
먹기 싫은 선악과를 하느님의 예정에 의해 억지로 먹게 된 것이라면 운명이 정해졌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인용한 성경말씀을 누구라도 읽어 보면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선악과를 따서 아담에게 억지로
먹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므로 아담에게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임의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의지적 선택권을 주신 것임을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정하신 것도 아니고 불순종하도록 정하신 것도 아니고 순종과 불순종을
아담이 임의(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세기의 성경말씀은 인간이 로보트로 피조된 게 아니고,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 심지어 하느님께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피조되어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권리를 지녔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의 모든 운명은 완전히 정해진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분명 우리 앞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앞에 특정한 환경과 상황을 펼쳐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그러한 상황하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맡겨두신 것임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드린 내용을 요약하면 특정한 환경과 상황(이중으로 예정되어 항시 순종과 불순종, 축복과 저주,
영생과 죽음, 보상과 징벌, 그리스도와 사탄, 새창조와 옛창조, 속사람과 옛사람, 영과 육, 하느님 나라와
세상으로 대비되어 성경에 나타남)은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 정해진 것임이 분명하지만 정해진 환경과
상황 하에서 우리가 취하는 의지적 행동(선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는 결과(축복 또는 저주)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무제한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상한선과
하한선이 있으므로 그러한 한도 안에서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선택의 범위가 무제한적인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됨) 안에서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와 답이 정해져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어떤게 정답인지 하느님의 뜻을 물어가면서 자유의지적
선택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찾아야 한다 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왜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가
하면 살다보면 우리로서는 정답을 찾기가 불분명한 상황을 수도 없이 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정답은
출제자이신 하느님께서만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 가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선악과가
죽음과 저주를 불러오듯이 우리 앞에 탐스럽게 보이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만 낭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만 가지고는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므로 항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면서
좁은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야만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가게 되어있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고찰할 부분은 자유로운 선택은 우리에게 맡겨두셨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는 하느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아담에게 말씀하신 대로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행위에는 죽음(저주)이
결과로 정해졌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불순종의 행위로 인해 말씀대로 아담이 영적으로 사망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하느님의 임재에서 떠나는 것이 영적인 사망임), 저주 받고 살다가 930세에
육신적으로도 사망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저주가 이루어짐)

불순종에 따른 저주는 하느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것이지만, 불순종이라는 행위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므로 사실상 불순종과 그에 따른 결과인 저주는 팩키지로 주어지는 것임을 볼 때 우리가 이러한
불순종과 저주를 팩키지로 선택한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정하신 것은 하느님이시지만 선택하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축복(순종)과 저주(불순종) 중에
하나를 우리는 선택하게 되므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선택으로 우리의 몫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이중예정 교리를 이해함에 있어 이러한 이중예정(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라는 두가지 길을 우리 앞에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하심)
을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은 성경에 보면 맞는 이야기 이지만 누구는 구원으로 누구는 멸망으로
완전히 미리 정해놓으셨다 라는 극단적 이중예정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순종하여 축복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누구는 멸망으로 누구는 영생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아예 미리 확정해 놓았다 라는 
절대 예정론은 성경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공부할 때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이시라면 뭐하러 강생하시어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돌아가심으로
모든 이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겠습니까?
 
절대예정론은 하느님을 사랑이 없는 비정한 분으로 오해시킬 수 있으므로 건전한 믿는 이들이 이러한
극단적 교리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창세전에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예정되었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실 필요조차도 없었겠지요. 일부는 그냥 미리 정해진대로 구원해주고 일부는 그냥 정해진대로
멸망시키면 되는 것이지 뭐하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요? 복음을 전해봐야
멸망당할 사람은 멸망당하는 것이고 전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 바로 절대 예정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또한 이러한 절대예정론은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려 해도 영접할 수 없게 창세전에 미리 정해졌다 라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인색하셔서 구원을 베푸시지 않으시는 것으로 오해된다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함이 보편적인 뜻이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공로가
완성되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오늘날에도 구원사업을 하느님께서 펼치고 계심을 의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에 장황하게 설명드린 내용을 정리하면 특정한 때에 특정한 환경과 상황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정해진 대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가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탐욕에 의해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살 것인가 는 각자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섭리하시어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는 믿는 이들에게는
심령에 죄책감을 줌으로써 평화와 기쁨을 앗아가고 환경적으로도 저주스러운 상황을 때에 따라 안배하시어
불순종에 따르는 댓가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성경말씀대로 섭리하고 계심을 믿는 이가  깨닫게 되면 점차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심령에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되고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환경적으로도 축복이 임하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영적인 축복이 먼저 임하여 감사함과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고
이어서 물질적인 필요까지도 하느님께서 충족시켜 주신다 라고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일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정해진 대로 펼쳐지는 환경과 상황 아래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가며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시고 궁국적으로 바라시는 바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미래를 점치기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점쟁이가 과거는 맞추지만 미래를 맟추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미래는 우리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따라 가변적인 상황(순종에 따른 축복 또는 불순종에
따른 저주)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이렇게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길인가를 항시 분별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세상적
지식으로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고 심령에 살아계신 성령의
인도로 순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의 운명을 확실하게 정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궁극적이고 온전하신 예정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고 지옥의 불못에서 영원한 벌(영멸)을 받는 사람은 누가 정한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심에도 자유로이 응답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을 포함한 모든 운명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우리가 할 일이 없다 라고 운명론적으로
체념하거나  죄중에 살고 있으면서도 착각 속에서 근거없이 확정적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낙관해서는
안되고 항시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의 길,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을 따라 하느님 나라까지 인도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두가지 상황을 예정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시는 섭리와 관련된
성경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이미 설명드린 대로 하느님께서는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놓으시고 우리가 생명을 선택하기를
바라고 계심을 모세를 통하여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대신 선택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선택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 생명은 신약에 와서 영원하신 생명이시자 하느님 나라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우리가 좁은 문을 선택해야 됨을 강조하십니다. 다음에 인용된 대로 주님께서
좁은문을 우리 대신 선택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위 복음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 있음을 알게 되고 주님이
우리 대신 좁은 문을 선택해 주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좁은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야 됨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완전히 정해졌다 라는 운명론 또는 절대예정론은 성경에 비추어 보아 옳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라는 주장 또한 성경에 비추어 보면
옳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 앞에 특정한 환경과 상황을 정해진 대로 펼쳐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러한
환경과 상황 아래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순종할 때 보다 나은 환경과 상황으로 축복해주시는 하느님이신
것을 의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특정한 환경과 상황 아래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인지
불분명할 때가 있는데 이 때 우리는 항시 깨어서 기도함으로써 내면에 살아계시는 성령하느님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조차도 하느님의 은혜로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 "모든 게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 이라고 코린토1서 15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1)특정한 환경과 상황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대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예정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다.
 
2)그러나 그러한 환경과 상황 아래에서 무엇인가(순종과 불순종 중에서)를 선택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인데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우리가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3)이러한 우리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의해서(순종 또는 불순종),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환경과 상황이 선택의
   결과로써 펼쳐지게 되는데 순종한 이에게는 축복불순종한 이에게는 저주가 내리게 된다.
 
4)우리가 가진 문제는 어떠한 선택이 과연 순종의 길,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사를 행함에 있어 기도로 깨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가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5)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 입장에서는
  선택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하느님께 의지할 때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시어 성화의 완성을 이루어내신다 는 것이다.
 
6)우리의 자유의지적 선택이 중요하지만 어떠한 선택이 바른 것인지를 우리가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느님께 의지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가 성화의 완성,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도록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인도하신다 라는 것이다.
 
7)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그 많은 일을 하시고도 모든 게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2.우리의 선행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원(구속)받는다는데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티모테오1서 2: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위 성경말씀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보편적인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멸망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심이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의 몸으로 강생하시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의 삯을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를 속량(구속)하시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지 않으셨다면 뭐하러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그 모진 수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
구속 공로를 세우셨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볼 때 우리로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구원 예정 섭리에 의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공로)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 하면
뭐하러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흘리고 돌아가셨어야 할까요?

성경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입장은 타락하여 죄중에 살고 있는 죄인으로서 죄의 삯인 사망에 매였는데
자력으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설령 죄인이 선을 행하더라도 이는 개인적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선으로써 하느님의 절대의에 입각한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할 힘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 입장에서 상대적인 선은
행할지라도 대부분 자기의 의로움을 쌓는 것으로써 하느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죄악된 인간에게서 나오는 자기의를 쌓기 위한 선행과 공로는 하느님 보시기에 추악한 것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구원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행과 공로는 회칠한 무덤인
바리새인들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식적으로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
랑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추악한 자기 만족을 위해 가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간주하신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30절 이하에 이스라엘이 자기의, 즉 행위로 구원을 추구하였기에 실패했다
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왜 구원 받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의로워서 구원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내가 죄인임에도 구원해주시어
구원(구속, 속량)받은 나의 심령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어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나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오게
하신다. " 

성령의 인도에 따른 선행과 자기의를 쌓는 선행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게 그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 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행을 일으키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절대선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안다 할지라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성령)께서만 가능하십니다. 죄인에게서는 절대선이 나올 수 없지만
구원받은 믿는 이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선행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우리가 의무적으로 의지적으로 억지로 선행을 행함에는 그에 따른 보상심리가 작용하게 되고
사실상 부담때문에 힘들고 어려워서 입에서 불평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불행 중에 노역하듯이
선행을 억지로 행한다 라고나 할까요? 하느님을 섬기는게 안식이 아니고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되어 스스로를 불행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잘해봐야 스스로 자기의를 쌓고 생색이나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구원(구속) 받은 후에 성령(새생명)께서 믿는 이의 심령에서 역사하시면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선행을 행할 때 감사함과 기쁨과 평화 가운데 행하게 되고 그러한 선행 후에는 더욱 능력으로 역사하시어 더 큰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감사함을 느끼게 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합당한 선행이 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어
선행이 나오도록 하심으로써, 선행을 행하는 주체가 하느님이 되시고 하느님의 도구로써 선행을 행하는
그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기쁨과 평화로 보답하시어 믿는 이는 자발적으로 감사함으로(보상심리 없이)
선행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선행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그 사람에게서 선행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선행은 심령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기쁨과 평화를 샘솟게 하시어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행함으로써 보상을 원하지 않는 선행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봉사(하느님을 섬김)할 때 봉사자가 상처를 받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선행을 하겠다고 하면서
뭔가 힘들게 봉사를 했는데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오해를 하면 상처를 받게 되는 봉사는 내면에
생명으로 계신 성령의 인도라기 보다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옛사람(하느님 입장에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죄인임)의 행위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걸려 있어야 할 옛사람이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봉사한다 설치면서 상처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능력이 없을 뿐더러 본인도 힘들어서 억지로 밖에 못하고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복음(그리스도)을 전한다는 것은 믿는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물과 성령(부활생명)으로 거듭 난
생명(성령)이 되실 때에만 그러한 생명이 봉사가 되고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됨으로써 주위에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생명으로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어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시면 비로소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성령(생명,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어 그날 생명의 전도가
이루어져, 베드로 사도께서 당일에 삼천명을 구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까지는 벌벌 떨며
마르코의 다락방에 숨어 기도에 전념하였던 120명의 믿는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비로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방언등의 능력으로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 안에 생명이 되시고 능력이
되어 주셔야만 믿는 이는 그리스도를 주님의 뜻대로 전하게 됩니다. 성경에 사도들의 전교를 위한 설교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사도행전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의 설교가 처음입니다. 즉, 성령에 인도되지
않는 전교(오순절 이전의 사도들의 설교)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이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완성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 안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릴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 안에 생명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인의 자리를 억지로 내어드릴 때 주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깨달음으로
주님의 쉬운 멍에를 자발적으로 지겠다고 고백하고 주님을 우리의 삶에 있어 첫째되는 자리, 즉 주인으로
모시게 될 때 주님은 비로소 우리 안에 보좌를 펼치시어 생명(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러한 생명에서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하시어 주변에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참고로 삼위일체의 분리되지 아니하시는 진리에 의하여 성령이 계시면 성부와 성자도 함께 계십니다.
승천하시어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 안에 성령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속성인 무소부재하심과도 관련이 있고 삼위일체의 천주성에 있어서 한분이신 하느님(위격으로는 세 분이심)
과도 관련이 있읍니다.  오직 성령(생명)이 충만할 때 그리스도께서도 믿는 이 안에 생명으로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3.왜 공로나 선행으로 구원(구속)받지 못하는가?

첫번째 이유로는 이미 설명드린대로 구속받기 전의 타락한 죄인에게서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행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있읍니다. 즉, 하느님의 법에 의하면 죄인은 죄의 삯인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므로, 죽어야 되는 것이지 선행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옛사람이
스스로 선행을 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옛사람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생명(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어 이러한
거듭난 생명(성경에서는 속사람 또는 속생명, 새생명으로 나타남)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선행을 행해서 공로를 인정받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스스로 자력으로 선행을 행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데 무엇하러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야 했을까요?
 
사람의 힘으로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강생하시어 믿는 이에게 값없이
구원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그렇게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구원(거듭남)이 일어난 후에는
자동적으로 믿는 이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의 인도로 선행을 하게 됨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억지로 힘들게 선행해서 품삯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발을
들여 놓으신 많은 분들이 교회에 속함이 은총이며 감사한 일이고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어 감사함과
기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게 되는데 이러한 섬김은 노역이라기보다 감사함과 기쁨에서 나오는
자발적 섬김으로써 오히려 섬기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 이해해서 힘들게 노역으로 봉사함으써 스스로 고통과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를 근본에서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사적계시를 믿는
우상숭배자들이 흔히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은데 이는 우상숭배로 인해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성경의 진리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귀신들의 사적계시에 현혹되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 함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죄악된 본성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죽었으므로 새생명의 삶을 사는 것, 즉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죄에서 먼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십자가를 고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됨. 오히려 은총으로 이해해야함)
이미 십자가 수난은 주님께서 완성하신 것이지 우리의 힘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께서 완성하셨음을 믿을 때 우리의 심령에 주님께서 오시어 완성된 진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일부 개신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함으로 인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선행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선행을 행하고 있지 않음에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자랑하는 착각에 빠지는 잘못된 경우가 있는데 믿는 이는 이러한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성경적 진리이고 또한 구원받은
그 사람에게서는 틀림없이 선행(성령의 인도에 의해)이 나오게 되어 있으므로 만일 믿음으로 구워받았다 라고
주장하는 그 사람에게서 합당한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야고보 사도께서 야고보서에서 주장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게 살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거듭남을 입고 이후로 성령의 인도에 의해 거듭난 새생명이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임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적인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로써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외적인 의로움을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내적으로는
항시 교만함과 탐욕이 있어서 겉으로만 의로운 척하는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망하시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신 것이나 이들의 행위는 항시 모범적인 것이었으므로 주님께서도 믿는 이의
행위는 바리새인보다 의로운 행위가 나와야만이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내적인 믿음과 외적인 행위의
일치, 즉 신행(믿음과 행위)의 일치가 이루어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행함으로 구원받았음이
증명된다 라고 주장하시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사실상 동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깨달음으로 성경을 읽으시면 성경 안에 수도 없이 많은 언어적 충돌(논리적 상충),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또는 이것도 틀리고 저것도 틀리는 것 같은 말씀들이 영적으로는 완벽하게 들어 맞게 하느님께서
신비로 성경말씀을 완성하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식으로 깨달을 수 없고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도해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만일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을 가져오는 주체는 바로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지요. 내가 힘센 내 팔뚝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나는 내 행위에 대한 품삯을 받는 것이므로 나는 하느님께 고마와할
이유도 없고 하느님을 믿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으로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시고 스스로
희생제물(속죄제물,화목제물,보상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바벨탑을 쌓듯이 행위로 쌓아서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님), 오직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영)에서 땅(세상, 육)으로 오시어(강생하시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은총으로 선물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록에 최종적으로 보시면 하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하느님(어린양)
께서는 도성의 빛이 되시고 보좌에서 생명강수가 솟아 도성안의 길을 따라흐르며 길 양편으로 생명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성(하느님 나라)에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시므로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시공간에 제한된 우리의 언어나 논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에 남아 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이 만들어낸 신앙이나 종교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나타나시어
계시하신 말씀으로 시작되어 하느님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완성하신 구원(성령)을 값없이 믿는 이에게
선물하심으로 믿는 이는 감사함과 기쁨과 평화로 이 땅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고 죽어서는 하늘나라에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주님 재림 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 불멸의 몸(영화)을 입고 입성함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주권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종교들은 자력적으로 수행 또는 선행을 쌓음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겠다 라는
인간 중심의 종교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 스스로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하겠다 라는
인본주의적 발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심에
감사하며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믿음과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김으로써 땅에서도 기쁘게 평화롭게 살며 복을 받고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에서 불멸의 영화로운
몸을 받고 영원한 생명(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행을 쌓은 의인이라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구속공로로 값없이 구원해주시어 구원받은 의인으로써 심령에 계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와
능력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선행을 자발적으로 기쁘게 감사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주님께서 의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헛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되고
죄의 삯인 사망에 매이게 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밝히고 있는 성경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으로 하느님께서 부르심에 있어 우리가 자유로이 응답한다 라는 의미는 죄인임을 하느님 앞에
인정한다 라는 의미인데 의인이라서 구원받는다 라고 만일 누구라도 주장한다면 성경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물세례와 성령세례) 나서 우리의 심령 안에는 성령(새생명, 속생명)이 거하시는데
이러한 새생명의 입장에서 하느님 앞에 우리가 자녀가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즉, 거룩하신 하느님
(성령님)의 내적인 인도에 의해서 우리가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속받기 전(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기 전)에는 죄인이므로 선행을 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지만
구속받은 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새생명(속생명)에는 성령께서 능력으로 인도하시어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이 나오게 하는 주체가 바로 우리의 믿음에 의해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드리면 구원이라는 문을 통과한 후에 성화의 완성을 위해 성령에 의지하여 성화의 길을 걸으며
기쁨으로 선행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문을 통과하기 위한 입장권(구속)은 우리의 선행이라는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공로를 믿음에 의해 값없이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값없이(선행과 관계없이) 구속을 받고 이후에 성령의 내적인 인도에 의해 자발적 선행이 믿는 이에게서
나오는데 이러한 선행을 이루시는 분은 바로 믿는 이의 심령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이십니다. 믿는 이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점차로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성화는 시공간에서
시간적 흐름에 의해 나타나는데 이는 마치 씨(의화)가 발아하여 성장하고(성화되고) 개화(꽃을 피움, 영화)하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데 씨앗(의화) 안에 발아, 성장, 개화, 결실까지의 전과정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의당 성화의 전과정이 완성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교리적으로는 의화가 성화를 포함하는 듯이 해석되기도 하고,
실제 신앙체험에서는 성화된 자만이 의화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성화가 의화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의화는 시공간을 떠난 신비차원에서의 영의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화는 시공간
안에서 믿는 이가 점차로 거룩하게 변하는 변화의 측면을 다루는 것으로써 어느 쪽도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영의 입장이냐 육신을 지닌 혼의 입장이냐 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받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하느님을 의지하며 기도를 통해 대화하며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가며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성령의 인도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심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자비하심에
기대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하느님께 기도로 다가가야 하겠습니다.(그래서 더욱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4.구원으로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원리는 무엇인가?

성경에 의하면 창세전에 택하시고 택한 자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모든 섭리가 하느님에 의해서 미리 정하신 대로 집행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문을 갖게되는 것은 창세전에 택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인데,
사랑의 하느님께서 과연 어떤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멸망시키기 위해서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시기로 일방적이자 선행적인 결정을 하셔서
그러한 하느님의 미리 정하심에 의해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느냐 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심판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대로 나중에 심판을 받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분명한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예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셔서 정한 대로 움직인 죄 밖에
없는 사람을 불못에 집어넣는 영원한 형벌을 주시는 하느님이시겠습니까? 그런 하느님이시라면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심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어찌하여 그분의
전능하심을 행사하시어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에 남아 있으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원하지 않는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인용하신 야곱과 에사우 관련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예뻐하셨고
에사우는 미워하신 것으로 성경에 나옵니다. 에사우에 대한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미워하신 이유는 장자의 상속권을 죽 한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넘긴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이야기합니다.(다음의 히브리서 12장 말씀 참조)
  
16 그리고 아무도 음식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넘긴 에사우와 같이 불륜을 저지르거나 속된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17 여러분도 알다시피, 에사우는 나중에 아버지의 축복을 상속받기를 원하였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축복을 받으려고 애썼지만, 회개할 기회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축복은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축복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장자권)을 죽 한그릇에
팔아 먹음으로써 영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축복을 거부한 에사우는 나중에도 회개조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미워하신 것이라고 히브리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장자의 상속권은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레위인들이 하느님 앞에 맏아들로
봉헌되어(금송아지 사건 때 우상숭배자 삼천명을 척살한 공로로 하느님 앞에 봉헌되어
하느님의 영적인 맏아들로 성막에서 일하는 직무를 받게됨) 땅의 상속을 차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상속받는다 라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신명기 10:9 :그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동족과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다. 그 대신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신다.

위 말씀은 땅(육신)의 축복만을 다루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늘(영)의 축복, 즉 하느님 자신을 상속받는다
라는 신약의 영적축복을 다룸으로써 앞으로 하느님의 궁극적인 축복은 신약에 가서 영적인 축복이 될 것임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의 상속권은 영적으로 하느님 스스로를 상속재산으로 받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사우가 장자의 상속권을 포기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겠다는 영적인
의미를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도성은 장자(맏아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라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영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상속권에 있어서의 맏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2장 아래와 같이 인용함)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는 거듭난 새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거듭난 새생명만이
하느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속성을 지니시는데 시간에 있어서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통시적으로 현재의 시간으로 하느님 앞에 전개되므로 하느님께서는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택하심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미리 아시기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에 누구는 예뻐하고 누구는 미워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선택하신 대로 되는 이유는 미리 아시기 때문에 구원받을 만한 사람을 실수없이
정하실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임)

창세전에 택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에 분명하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심도 분명하지만
하느님께서 구원의 은총으로 부르심에도 끝내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가는 사람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의한
멸망을 억지로 말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멸망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멸망시켜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구원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멸망을 선택해서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므로 이를 믿고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구원을 거부하고 불순종하여 멸망하느냐 는
자유의지에 맡긴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구원에로 초대받은 믿는 이가 자유로이 구원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은총을 베푸시어(십자가 구속및 오순절 성령강림)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므로
응답을 하도록 미리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구원을 거부하는 이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그사람에게 전능하심을 행사하시어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를 청하면 구원을 거부하는
자유의지(불순종의지)를 전능하심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시므로 자비를 베푸시리라
믿습니다.

성경을 영적으로 묵상해보면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즉 옛창조에 속하는 아담 안의 모든 것들(불순종, 저주, 죽음, 불못에서의 영원한 벌)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심으로 없이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바오로 사도께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바오로 사도에게 죽은 것이고 바오로 사도는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라고
서간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첫째 사람 아담과 그의 육적인 모든 후손은
옛창조에 속하는 것인데 이미 영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없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되어 낳으신 하늘(영, 하느님)에 속한 둘째 사람(그리스도)은 새창조에 속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영생, 하느님 나라)을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 세우신 영원한 생명이고 이러한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한 몸이
된 교회(믿는 이들의 집합체)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한 몸을 상징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도 묘사되는데 묵시록에서 말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오늘날 가톨릭 교회(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을 머리로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록에서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한 몸에서 나와 다시
한 몸을 이루는 혼인의 관계, 즉 하나가 됨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도 한 몸이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도 혼인으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보시면 남자(아담)와 여자(하와)가 결혼으로 한 몸이 된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사도께서 에페소서 5장 31절에서 32절 말씀에서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영적으로 예표된 큰 신비가 담긴 것이라고 계시를 통해 밝히고 계십니다. 아담에게서 나온 갈비뼈인
하와만이 아담과 다시 한 몸을 이룰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서 나온 교회만이 다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흙으로 만든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늘(영)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믿는 이들은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육적인 출생이 아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적인
출생인 것입니다. 출생적으로 근원이 같으므로 같은 근원으로 돌아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육적인 출생에 그치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거듭난 새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상속받을 상속권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라고 말할 때 신격(GODHEAD, 하느님의 머리되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몸의 지체로써 참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교리서 260 을 보시면,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궁극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한 분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라는내용이 있읍니다. 이와 관련 신구약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상고해 보면,구약에서의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일치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에 의지하여 일년에
단 한차례 지성소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에,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느님 안에라는 상징적인
일치가 이루어졌읍니다.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라는 십자가 구속을 전제로 일치가 있고, 비로소 묵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이르러서야 십자가의 역사로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심으로 모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선택의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이 성화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도록 선택하신 것입니다.즉, 그리스도 안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없이 하시고 그리스도 안의 새창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하느님의 섭리에 신비로 남아 있지만 보다 신비스러운 것은 선택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성령의 인도로 성화시켜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품성의 새창조에 속한 새생명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하시고 궁극적인 뜻이자 선택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실 분은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코린토1서 15장28절).
 
 
다. 맺는 말
 
예정론, 즉 "모든 운명이 이미 정해져서 멸망당할 사람은 멸망당하고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게 되어있다"
라는 주장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감성적인 측면과 이성적인 측면 양쪽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감성적인 측면이란, "나는 구원받았는데 너는 멸망당한다" 라는 자기기만적인 자기위안에서 발동되는 일종의
선민의식인데 이는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어서 그토록 심하게 책망하셨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셨던 바리새인에게서
보여졌던 교만스러운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그 사람(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이 멸망당할 지 구원받을 지는 마지막 날이
되어 보아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멸망당할 것 같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기의 몸을 내어주어서라도 구원받게 하기위해 열심으로 주님을
그사람에게 전할 것이며, 또한 열심으로 주님께 기도하여 그사람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기를 간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위안적이고 감성적인 근거를 들이대면서  자기는 구원받았고 다른 사람은
멸망당한다는 식으로 착각하여 예정론을 받아들이거나 주장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미 설명드린대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되도록 예정하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원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멸망하도록 정하셔서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거부함으로써 본인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성적인 측면이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면 누구라도 구원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사람을 멸망하도록 미리 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정론으로 해석되는 성경구절을 수도 없이 찾아내어
근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읽어보면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칼빈의 주장이 이러함).  설령 그러한 주장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들린다 해도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흐르는 하느님의 법에는 상위법과 하위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한 국가의 법체계
안에도 헌법과 같이 가장 높은 상위법과 낮은 수준의 하위법인 조례등이 있듯이 성경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법에도
헌법과 같이 가장 높은 상위법으로써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은총)이 있는 것이며 가장 낮은 하위법인 허용적인 법으로
불순종과 멸망을 마지못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인간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구속을 하신 것입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성경 안에 서로 다르게 해석되는 많은 법과 언어문자들은 하느님의 법의 체계(상위법과
하위법) 안에서만 온전하게 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하느님께서 인도하시어 알려주셔야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법은 하느님의
사랑(은총)과 전능하심이고 두번째로 중요한 법은 사람의 (불순종하고자 하는)자유의지입니다. 이러한 법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면  설령 불순종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전능하심을 행사하시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순종의지로 바꾸시어 구원받도록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된 바오로 사도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어 죄인을 위한 구원을 베푸심에 있어 누구에게는 이러한
구원을 베푸시지 않기로 작정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시려고 강생하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가장 위대한
법이자 진리이고 그 무엇보다 앞서는 상위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로마서 8장에서 외치시는 것입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놓고 볼 때,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고자 하는 보편적인 뜻에 대해 의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씨뿌리는 사람(하느님)의 비유에서도 보시듯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씨를 뿌렸는데 어떤 이는
마음 밭이 길과 같고 자갈 밭과 같고 가시덤불이 많은 밭과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이는 마음 밭을
가꾸어야 되는 의무와 책임이 하느님께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으며 순종하는 마음이 될 때 그러한
마음 밭에서 주님의 구원의 씨가 잘 자라서 30 배 60 배 100 배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유는 주님의 십자가 구속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만 스스로 순종하는 마음 밭이 되도록
가꾸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일부 인간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도록
허용하시는가? 라는 본원적인 질문에 우리가 봉착하게 됩니다.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 남아있으므로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감히 헤아려 본다면 첫째로는 멸망당하게
되는 사람의 불순종하는 자유의지로 하느님에게서 스스로 멀어지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말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싫다고 거부하는 구원을 억지로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주변의 누구도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을 때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그사람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의 불신자들을 위해 첫째로는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것이며 둘째로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선택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은혜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 안에 첫째 자리를 차지하시는
주인이 되시어 주님의 보좌가 우리의 심령 안에 펼쳐지고 보좌로부터 생명강수가 흘러나와 우리의
심령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고 이웃에게도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제글을 읽으신 분들께서 혹시라도 제글을 오해해서 구원을 사람이 결정(선택)하고 사람이 노력(순종및
선행)으로 쟁취한다 라고 오해하시지 않기를 빕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이미
은총으로 완성하시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우리의 결정이나 노력, 선행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할 때, 그러한 선택은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이어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만들었다 라는 회개(통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회개를 통해 주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입게되는데 이러한 선택조차도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회개할 은총을 주심으로
가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몫은 의지적 순종이고 하느님의 몫은 믿는 이를 하느님 나라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길도 모르면서 내 맘대로 걸어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말씀에 순종하고
하느님께 의지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가 성화되도록 역사하시어 마지막 날에 영화로운 몸(구속의 몸)을 입고
 하느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글을 읽는 분들께 주님 안에서 평화를 빕니다.

추신 :
 
 
1.완성된 구원과 시작되는 구원에 대하여 
 
 
위 글에서 사용한 "구원"은 완성된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구속(속량)을 의미하기도 함을
미리 밝혀둡니다.
 
구원의 완성은 주님 재림 후에 믿는 이들이 몸의 구속(영화, 불멸의 몸을 받는 것, 주님 재림 후에 일어날 일임)을
받고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입성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일부 개신교인들이 경망스럽게 구원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주님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
속량을 받은 것, 즉 REDEMPTION(구속)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즉 구원의 문에 들어선 초입의 단계를 구원을 완성한 완성의 단계로 오해해서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
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문자적으로는 오해가 일어날 수 있게 사용된 경우가 많이 있지만 시공간에서 펼쳐치는
의화 성화 영화의 단계를 놓고 볼 때, 영화까지의 완성이 아닌 의화의 초기 단계를 말하는 경우를
"구원받았다." 라고 일부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보면 의화(영의 중생)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므로 그러한 부활생명 안에는 성화와 영화의 전과정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로 있습니다. 그렇지만도 시공간을 사는 우리에게는 시공간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성화의 삶을 끝까지 은혜로 견디어 살아내면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영화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성경과 교리서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의화및 주님 재림시에 부활의 몸을 받는 영화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성화는 의화된 후에도 일생을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성화되지 못하면 죽어서 연옥에서라도 정화를 거쳐 성화가 완성되어야
하는 것으로써 시공간 안에서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끝까지 믿음을 견지해야 하는 믿는 이의 순종의무가
필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순종을 견지할 때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영화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구원의 내적 확신에 대하여
 
본글에 구원받을지 못받을지는 마지막 날이 되어봐야 안다 라고 기술한 것은 객관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객관적 구원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몸의 구속(영화로운 불멸의 몸을 마지막 날에 받게 됨)
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디모테오2서 2장 5절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이 "의로움의 화관이 바오로
사도를 위해 마련되어 있음" 을 확신하실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확신에 의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이러한 내적확신은 내면에 살아계신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써 믿는 이가 죽을 때까지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믿음을 견지할 때 성령께서 기쁨과 평화와 함께 구원에 대한 내적인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 있는 믿는 이들의 구원에 대한 내적확신은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확신을 지닌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며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생명되심을
전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죄악된 삶을 살며 구원의 내적확신을 주관적으로 지녔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만일 있다면 과연 그러한 내적확신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인지 아니면 착각에 의한 자기기만적인
(self-deceiving) 환상(망상)인지는  마지막 날에 알게 될 것입니다.
 
교리서에 나오듯이 대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고백성사를 보지 않는다면 은총지위를 상실하여 멸망할
것이고 소죄를 지은 경우라면 연옥에서 정화된 후 주님께서 죄악된 영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제가 속한 가톨릭의 교리서에 의하면 설령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그 사람이 반드시 구원된다 라고
해석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슴. 따라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임)
 
우상숭배는 대죄에 해당하므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확신이 아닌 환상임에 틀림이 없다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따라서 우상숭배자가 주장하는 구원에
대한 확신은 정반대로 멸망에 대한 확신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신앙 안에 들어와서도 명백히 우상숭배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우상숭배의 문제점을 지적해줌으로써
바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우상숭배란 하느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하느님께만 합당한 호칭이나 흠숭 (통공 안에서의 전구가
아닌 직접 대놓고 기도하는 것 등 등...) 등을 바치는 경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3. 관련 교리서 내용을 하기합니다.
 
멸망을 예정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예정섭리 관련해서는 교리서 1037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 자유의지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세례받은 신자일지라도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은총지위를 상실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친교를
박탈당하고 영원한 벌을 받게됨을 교리서 1472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참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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