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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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오 - 김민기│내가 좋아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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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9-06-28 ㅣ No.13834

잘가오 - 김민기

김민기 1 (1993) 가을편지 / 아침이슬

김민기 (1951 ~ )

Track.11 - 잘가오

 

     

앞마당

1. 가을 편지 (작사:고은)
2. 내나라 내겨레 (작곡:송창식)
3. 두리번 거린다
4. 꽃 피우는 아이
5. 아침 이슬 (연주곡)

뒷마당

6. 아침 이슬
7. 잃어버린 말
8. 아름다운 사람
9. 그날
10. 친구
11. 잘가오

     

     잘가오 - 김민기 작사, 작곡

     먼 길 가는 친구야 이 노래 들어요 나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이 노래 드려요 언제나
     또 다시 만나게 될는지 잘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김민기

     출생 : 1951년 03월 31일 / 한국
     학력 : - 서울대학교 회화과
     프로필 : - 극단 학전 대표
     김민기' 의 음악 활동 : 도비두 (1970)

                                      with 김영세

 

     

한국 대중음악사 100대 명반에 뽑힌 김민기 1집 (1971)

1971년 약관을 갓 넘긴 한 섬세하고 문약해 보이는 청년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내뱉은 조용한 목소리는 그 즉시 대중가요의 판도를 뒤흔들었고 곧 제3공화국 정권에 의해 신화로 사라져갔다. 대중가요사에 있어서 형식적인 면에서의 혁명이 신중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김민기의 치열한 가사 쓰기는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비판과 도전의 메시지를 대중가요계에 또 하나의 화두로 던져놓았다.

자의든 타의든 간결한 멜로디에 얹혀진 시들은 시인을 신화적인 사회 운동가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이렇듯 그의 노래들은 미학과 저항성을 따지기 이전에 당시부터 지금까지를 아우르는 저항적 성향의 가요들에 미쳤던 영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나의 노래가 우리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아침 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들이 보여주었고 또한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부표처럼 떠도는 어설픈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대학, 즉 지성의 중심에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로서 자리매김했던 이 자그마한 노래들에 대한 추모는 바람결을 타고 떠도는 민들레처럼 아직까지도 그 씨앗들을 뿌리고 있다. (황정)

     

[삶으로서의 노래. 그 힘과 아름다움] - 김민기

소리는 철저히 현재형이다.

소리는 음을 타고 달려와서는 내 속을 훑고 들어온다.
단지 한번 달려오면 그뿐이지만, 소리에 실려온 사람
냄새는 오래 남는다.

지금 막 내뿜어졌을 호흡이 나의 호흡과 섞이고,
섞인 체취는 내 속 한귀퉁이에 차곡이 쌓인다.

 

[삶으로서의 노래. 그 힘과 아름다움]

노래는 그런 것, 노래하는 이의 삶이 내 삶에게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것이다. 목소리, 어조, 말투 혹은 창법, 그 주위를 배회하는 악기들의 움직임으로 우리는 그 발걸음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자기 자신의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노래는 그리 많지가 않다.

바람에다 대고라도 어떻게든 노래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천천히 흥에 겨워 우리몸이 떨려 말하기 시작하던 노래의 처음에서 우리시대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돈으로 환산하기 위해 짜여진 틀거리에 맞춰 대량으로 제조되는 노래상품에는, 노래하는 이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진실이 없다.

우리 대중가요의 주류는 출발에서부터 지금까지, 소리의 형식은 외국 것의 차용이었고 노랫말은 과장된 감상이거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한, 삶으로부터 붕 뜬 통념이었다.

근대 이후, 우리는 한번도 우리만이 가진 재료로 스스로 우리의 대중음악을 만들어낸 적이 없었다. 서구로부터 들여온 창가였으며,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뽕짝이었으며, 미군부대로부터 전파된 락(rock)과 블루스(blues)였으며, 바람타고 AFKN 심야방송을 흘러들어온 포크(folk)였다.

정치와 문화가 맞물리면서 진행된 이 지배는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이를 부정하려는 생각만으로도 심하게 불편해진다. 남에게서 배워온 음악형식에 남들이 다들 그렇다고들 하는 이야기를 담아 노래해 왔던것이다.

하지만 그런 빈 깡통같은 역사속에서도, 자신의 다리로 확고하게 이땅을 딛고자 한 이들은 적지 않다. 그 중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한 이름이 김민기, 그리고 전설이 사라진 시대를 서서히 싸아하게 번져가고 있는 또 한 이름은 안치환이다.

김민기의 음악은 포크로 시작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한 것은 69년으로 대학에 들어가 낙제를 하고 1학년을 두번째로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미국 대중음악계의 60년대를 주름잡았던 밥 딜런이 서서히 순수포크에서 포크락으로 옮겨가고 있을 때였다.

40, 50년대 좌파 지식인들에게 지지받았던 우디거스리와 피트시거가 창시했던 포크음악이 피터 폴 앤 메리, 존 바에즈 등을 거치면서 저항성을 잃고 점차로 퇴색하여 트래디셔널 포크라는 협소한 틀 안에서 매너리즘에 빠져 들고 있었을 때, 밥 딜런은 백인 노동요에 뿌리를 둔 초기 포크의 정신을 이어 현실에 바탕을 둔 문제의식에 흑인음악적 생명력을 첨가하여 60년대를 노래했다.

(주1)이처럼 반문화적인 성격을 지닌 미국포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전까지 성인취향의 뽕짝과 스텐다드 팝만으로 제한되어있던 가요의 폭이 넓어지고,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청년문화가 형성되게 된다.

김민기 역시 이러한 대학생 중심의 청년문화 주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린시절부터 누나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자랐기에, 그는 세련되고 기초가 탄탄한 서양음악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미국 민요이며 피트 시거의 곡으로 유명한 '우리 승리하리라(Weshall overcome)'를 부른것은 당시 이 노래가 우리 대학가에 많이 퍼져 있었으므로 주목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71년에 처음으로 낸 그의 앨범에서 미국민요인 '저부는 바람'을 번안해 부르고, 특이하게도 영국 하드락밴드인 딥 퍼플(Deep Purple)의 'April' 앞부분을 실은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서구의 대중음악, 그중에서도 포크 뿐만아니라 락에까지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 가요에서 보기 드물게 노랫말과 잘 어울어든 선율과 곡 하나하나의 완전성, 그리고 편곡의 세련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침이슬'에서는 클래시컬한 피아노와 바이얼린으로 단아하게 받쳐주며, '혼혈아'(해금전까지는 검열에 의해 '종이연'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에서는 중간부터 색소폰이 등장하고, 끝부분에서는 피아노와 베이스가 전형적인 재즈분위기로 진행된다.

그동안 수많은 입으로 전해지고 거리에서 불리워졌을 때, 그리고 그처럼 오랜 세월을 기다린 후 93년도에 새로 녹음된 4장짜리 전집이 나왔을 때 그동안의 시간을 관통하는 정서를 싸안고 고갱이에 힘을 담은 선구자의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아침이슬'이 그런 실내악적이고 고전적인 단아한 자태를 보였으리라고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다.

71년도에 나온 이 음반이 72년 봄 완전 압수조치 당하고 금지된 이후, 김민기의 음악은 김민기의 목소리와 터치로 불리워질 수 없었고, 양희은의 목소리를 타고, 혹은 대학가에서 전파되며 또다른 역사를 겪었다.

금지와 음반 전량 압수로 인해 2-30만원을 홋가하는 희귀음반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소수매니아들을 제외하고는 스무살 김민기의 목소리로..

'친구','아하 누가 그렇게','세노야','길','아침이슬','그날','혼혈아', '꽃 피우는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우기, '가을편지', '내나라 내겨레','잘가오','상록수','가뭄','늙은 군인의 노래', '주여, 이제는 여기에','봉우리','백구','작은 연못', '천리길'은 아예 김민기의 목소리로 불리워 지지조차 않았으며 양희은의 음반에 실려도 작곡자의 이름은 숨겨졌다.

93년도에 비로소 이들 노래들은 처음으로 김민기의 목소리를 입었지만, 그 이전에 이 노래들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이는 없을것이다.

김민기라는 한 가수의 노래로 고정되어 남아있기 보다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자꾸만 확산되며 옮겨 다니고 변해 오면서, 한 세대의 정서를 관통하고,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뿌리없는 향수를 일으키게 하는, 소리 없는 노래, 그러나 노래를 듣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목소리를 가진 노래로 존재해 온 것이다.

따라서 새로 불리워진 김민기의 노래들은 김민기 혼자 부른것이 아니라, 22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각인된 파장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22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의 목소리 는 더욱 깊어졌지만, 그는 오히려 덜 진지하게, 아주 편안하게, 그냥 숨쉬듯이, 긴장하지 않고 노래한다.

71년도의 그의 노래가 하나의 작품이었다면, 93년도의 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기중에 퍼질대로 퍼진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93년도에 새로 노래하는 그의 손에는 기타 한대가 달랑 들려 있을 뿐 스무살 함께 했던 피아노도, 플룻도 자취를 감춘다.

단지, 그의 이야기를 깊숙이 각인했을 몇몇 음악인들 조원익, 김광민, 노영심, 한영애, 권혁진, 안치환, 조동익, 배훈, 여행스케치, 장필순, 이병우, 한동준 등이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의 파장은 더 넓게 넓게 퍼진다. 이제는 그 혼자만의 노래가 아닌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노래를 단지 미국포크의 영향을 받은 청년문화의 선두 정도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한대수, 양병집과 함께 60년대의 미국 모던 포크의 영향을 받아 주류 문화에 대한 반발로서의 청년문화를 형성시켰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김민기의 노래 정신은 단지 곱고 맑고 순수한 감성으로 통기타를 튕겼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포크 조류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을 뿐 아니라, 70년대를 휩쓸다가 주류 문화에 편입되고 만 통기타 문화에만 국한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포크의 우리식 수용이라고만도 볼 수 없다. 서태지가 랩의 특성을 잘 살리고 미국의 얼터너티브 락을 그럴듯하게 모방하였다고 해서 훌륭하다고 볼 수없는 것처럼, 크래시(Crash)가 스레시 메틀(thrash metal)을 단지 잘 소화했다고 해서 ?섟窩岵?밴드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김민기의 노래들이 60년대 미국 포크를 수준높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71년도의 김민기 앨범을 들어보면, 그의 음악이 미국적인 냄새를 풍기기보다는 오히려 유럽적 색채를 띠고 있는것에 놀라게 되는데 가령 '아하 누가 그렇게'가 가벼운 비트와 함께 약간 재즈맛이 섞인 화려하게 춤추는 우수를 지닌 플룻과 피아노로 받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런 식의 연주는 브리티쉬 포크 락(British folk rock)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0년대말부터 시작된 브리티쉬 포크락이 같은 시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영국 전래민요들을 적극적으로 채록하여 락으로 소화해내고 (주2), 대중음악의 틀에서 상당히 벗어난 실험까지도 불사했던 브리티쉬 포크 락은 당시 우리나라는 커녕 미국에도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희은의 음반에 실린 '서울로 가는 길'의 반주가 이와 똑같다는 사실, 한대수의 75년도 앨범 '멀고 먼 길'에서도 비슷한 플룻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밥 딜런을 흉내내는 대신, 클래식, 재즈, 락, 미국포크 등 자신이 물먹은 것들을 자기방식으로 소화하여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역시 비슷한 물을 먹은 당시 영국인들의 음악과 아주 우연한 지점에서 뜻하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분명 그가 받쳐 주었을 양희은의 노래가 거의 매너리즘에 빠졌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은 방식의 반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그가 그런 음악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모색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이 브리티쉬 포크 락과의 이 뜬금없는 비교에 끝점을 찍게 한다. 그렇다면 그가 관심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가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인이었고, 음악인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었고 시인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부정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암담한 그의 시대를 부정하고, '이 길 뿐이라고' 한 곳만을 가리키는 억압의 손가락을 부정하고('길'),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말하'는 왁자지껄한 세상의 시끄러움을 부정하고('친구'), 마침내는 자신의 노래를 부정한다.

그는 한대수의 노래를 받아 '자유의 바람' 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어하고('바람과 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자신이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아하 누가 그렇게') 그의 소망은 막연하다.

그는 서울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고, 김지하등과 함께 토론회에 참여하는 인텔리였다.

자유에 대한 막연한 바램과 세상에 대한 불투명한 답답함은 점차로 깨어 갔지만, 그가 서있는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들은 의문문으로 가득하며, 세상을 응시하는 그의 눈은 맑고 열려 있지만 그 눈속에 비친 풍경들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식이기도 하다.

'두리번거린다', '아침이슬', '잃어버린 말', '차돌 이내몸', '아무도 아무데도' 뿐만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풍경을 노래하는 듯이 보이는 '새벽길', '나비', '바다', '눈산'조차도 그렇다. 그가 가는 길은 '희부연 바람이 헤진 옷새로 스며들어오는' 어두컴컴하지만 싸아한 공기에 스스로를 곧추 세우는 새벽길이고('새벽길'),

꽃샘바람 무서워 개인 하늘을 날아가고 '저 산 넘어 먹구름이 소나기 몰고' 오기전 '메마른 들판을 지나' 날아가는 지난한 나비의 길이며 ('나비'), '하얀 눈 내려와 온 땅위를 뒤덮어' '내 갈 길 어딘지 (기꺼이) 살펴나 보'는 눈길이며('눈산'), 아무도 없는 텅 빈 바닷가에서 바람과 물결을 부르며 작은조각배를 스스럼없이 띄우는 밤바닷길이다('바다')

춥고 힘들고 홀로인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불평하거나 감상에 젖거나 비장감을 무기로 하여 과장된 목소리를 내지르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당연히 가야 하는 길을 돌아보지 않고 털털털 걸어가는 사람의 담담한 응시이다. 그 목소리에는 속으로 치열하게 파고들며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하는 과장된 몸부림도 없고,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줄곧 압축되어 가는 집요함도 없다.

오히려 그의 의식은 늘 넓게 넓게 퍼진다. 눈 내린 산 위로, 나비가 날아가는 공중의 길로, 밤바다의 파도로 퍼져가고 분산된다. 심지어 괴로와할 때조차도 '산산이 부서져라 차돌 이내몸 깨뜨리고 깨진듯이 외쳐라'라고 노래한다('차돌이내몸').

이렇게 세상의 구석구석에까지 소리의 파장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가는 그의 노래는 비로소, 작고 여리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에게 가 닿는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 늘 두리번거리는 ('두리번거린다') 그의 눈은 세상에 대해 열려 있었고, '이 길 뿐이라고, 저 길 뿐이라고' 말하는, 세상을 거머쥐고 있는 이들에게 붙어 앉기보다는 '죽기 전에라도' 심지어 '죽은 후에라도' 스스로의 다리로 직접걸으며 세상 구석구석을 보기 원했으므로('길')

소중한 꿈을 키워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압제적인 이 나라의 정치 현실('꽃피우는 아이')과 그 암담함('가뭄'), 분단된 조국('철망 앞에서', '작은 연못', '내 나라 내 겨레')과 아직도 남아있는 전쟁의 상처('기지촌', '혼혈아'),

그리고 늘상 삐딱하게 아다리가 안맞아 있는 이땅의 현실('인형'), 고향을 떠나 연명해야만 하는 사람들('고향 가는 길', '서울로 가는 길', '강변에서')과 늙은이들의 회한('늙은 군인의 노래'), 상처받기 쉬운 여린 것들('백구','식구생각','미운 내 얼굴','혼혈아')에게까지 고루 미쳐 닿았던 것이다.

(주1)
신창호(ID:procol), [Bob Dylan의 디스코그래피] 1, 2, 3,
[포크의 쟝르 문제에 대해서]1, 2
(하이텔 언더그라운드 뮤직 동호회 포크 게시판) 참조.

60년대 밥 딜런에 의한 포크의 발흥을 흔히 '모던 포크'라고 부르지만, 이것을 이전의 포크사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새로운 시작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비판적 시각을 가진 포크의 뿌리는 이미 40, 50년대 포크의 창시자인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인디언의 전래민요, 애팔래치안 민요에 바탕을 두고 삶에 발딛고 선 노동요의 건강성을 적극 흡수한 창작곡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동부 대학가들, 소위 아이비 리그의 지식인들에게 지지받았을 뿐 대중적으로 퍼져나가지는 못했고, 50년대 말부터 60년대의 메카시즘의 돌풍으로 인해 그 좌파적 색채를 거의 탈색하고, 포크 음악은 추상적이고 민요를 복원하거나 맑고 고운 감성만을 노래하는 것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밥딜런의
모던포크는, 히피즘을 포함하여 60년대에 들어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던 광범위한 반문화의 초기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주2)
영국의 포크 락그룹인 펜텅글(Pentangle), 트리즈(Trees)등이 구전민요를 채록하여 리어 레인지하고 스웨덴의 사이키델릭-포크락그룹인 케브네카이제(Kebnekaise)가 역시 적극적으로 북구의 구전 민요를 소화해내고, 이태리의 깐따또레(cantataure:singer song writer) 인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의 포크곡들이 르네상스 시대 민요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것을 볼 때 이것은 상업성보다는 예술성과 독창성을 추구했던 음악인들의 공통된 노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 대중음악이 서양의 음악만을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 우리 자신의 뿌리위에 서기에 소홀했던 것은 아무런 다른 대안을 창조해내려 애쓰지 않았던 우리의 척박한 문화풍토를 반성하게 한다.

출처 : http://my.netian.com/~nigazota/ancrit01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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