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영화ㅣ음악 이야기 영화이야기ㅣ음악이야기 통합게시판 입니다.

The Final Countdown - Europe│제국주의 국가가... 과학, 과학 하다가?

스크랩 인쇄

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8-06-02 ㅣ No.10137

The Final Countdown - Europe
The Final Countdown (Single 1986)
Europe 1979–1992
No.A -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Europe
We,re leavig together But still It's farewell And maybe We'll come back to earth Who can tell?
I guess there is no one to blame We're leaving ground Will things Ever be the same again?
It's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We,re heading for Venus And still we stand tall Cause maybe they've seen us And welcome us all
With so many light years to go And things to be found I'm sure That we'll all miss her so
It's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It's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The final countdown
It's the final countdown We,re leavig together The final countdown We'rell all miss you so It's the final countdown It's the final countdown It's the final countdown
우린 지금 함께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건 그저 이별을 의미하는거예요 아마도 우리가 지구로 다시 돌아 올지 모른다는 걸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아무도 탓할 사람은 없을거예요 우린 지금 지구를 떠나고 있어요 과연 모든게 다시 예전과 같아질 수 있을까요?
지금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어요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거죠
우린 지금 금성으로 향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서 우리 모두를 반갑게 맞아줄지도 모르기에 우린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수 광년이 걸리는 거리를 미지의 것들을 찾아서 떠난 챌린저호를 우리 모두는 분명히 그리워 할겁니다
이건 마지막 카운트다운이예요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거죠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최후의 카운트다운 지금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어요 최후의 카운트다운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지금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지금 함께 떠나고 있는거예요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많이 그리워할 거예요 이것은 최후의 카운트다운이예요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거죠 최후의 카운트다운을
The launch date had been postponed several times because of poor weather but on 28 January the space shuttle Challenger finally lifted off at 11:38 am EST.
     
It's been 20 years since the Challenger space shuttle disaster, but those who watched the launch will still remember this shocking image of the explosion that led to the deaths of all seven crew members.
     
President Ronald Reagan honoured the crew as national heroes. In the back row from left to right: Ellison Onizuka, Sharon Christa McAuliffe, Greg Jarvis, Judy Resnik. In the front row from left to right: Pilot Mike Smith, Commander, Dick Scobee, and Ron McNair.
     
The Space Shuttle Challenger Memorial, where some remains were buried & Time magazine Challenger' Explodes Feb. 10, 1986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 폭발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제1호기인 컬럼비아호는 1981~1982년에 걸쳐 4회의 실험비행(STS 1∼4)과 1회의 실용(상업)비행(STS 5)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그 뒤를 이어 챌린저호가 3회(STS 6∼8)의 실용비행을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① 제1차 비행(STS 6):1983년 4월 4일 플로리다주(州)에 있는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이 비행은 미국 스페이스 셔틀의 6번째 비행이자 STS 5에 이은 2번째 실용비행이다. 승무원은 P.J.와이츠(기장), K.J.보브코(조종사), S.머스그레이브(전문가), D.H.피터슨(전문가)의 4명이었다.
챌린저호는 인공위성 TDR-A(대형의 인공위성 추적용 데이터 중계위성)를 궤도에 올리기 위해 발사하였으나, 정지궤도(靜止軌道)에 오르지 않아 실패하였다. 또, 4월 7일 머스그레이브와 피터슨이 이 비행의 임무 중 하나인 새 우주복의 성능과 궤도상에 있는 인공위성을 보수(補修)하기 위한 능력을 실험하고자 우주유영(宇宙游泳)을 4시간 동안 실시하였다.
챌린저호는 5일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4월 9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② 제2차 비행(STS 7):1983년 6월 18일 제1차 때와 같은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이 비행은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이 탑승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 여성은 천문학자인 S.K.라이드였으며, 이 밖에 R.크리펜(선장), F.호크(부조종사), N.새가드(전문가), J.페이비언(전문가)의 5명이 탑승하였으며, 이것은 스페이스 셔틀의 비행계획 중 처음 있는 일이다.
챌린저호는 캐나다의 통신위성인 애닉(Anik) C 및 인도네시아의 통신위성인 팔라파(Palapa) B를 정지궤도에 발사 ·투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로봇팔(머니퓰레이터)에 의한 인공위성 회수실험에도 성공하였다. 6월 24일 챌린저호는 6일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에드워드 공군기지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③ 제3차 비행(STS 8):챌린저호의 제3차 비행의 특색은 야간(夜間)에 발사되고 야간에 착륙한다는 점과 미국의 우주비행사상 처음으로 흑인 승무원을 태운다는 점에 있었다.
발사는 8월 30일 새벽 2시 32분(현지시간)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실시되었으며, 승무원은 R.S.트룰리(선장), D.C.브랜덴스타인(조종사), D.A.가드너(전문가), W.E.손턴(의학박사) 및 최초의 흑인 승무원 G.S.블루포드의 6명이었다.
우주공간으로 올라간 챌린저호는 인도의 다목적 통신위성 인샛(Insat) 1B와 제1차 비행시에 실패한 TDRS를 다시 발사하여 정지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하고, 다음에 화물칸을 열어 로봇팔로 3,384 kg의 덤벨을 들어올려 작동기능을 실험하였다.
한편, 손턴박사는 당뇨병의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처음으로 무중량 상태에서 인체의 신장세포(腎臟細胞)를 비롯하여, 개의 췌장세포 및 쥐의 뇌하수체 등 생세포(生細胞)에 대한 분리실험을 실시하였고, 또 우주비행사의 절반 정도가 경험한 것으로 알려진 욕지기 ·무력감 등 ‘우주적응증’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챌린저호는 6일간에 걸친 제3차 비행을 마치고, 미국의 노동일(Labor Day)인 9월 5일 새벽 3시 42분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챌린저호의 비행계획은 그 후에도 꾸준히 추진되었으나, 1986년 1월 28일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약 73초 후 공중폭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빚었다. 이 폭발사건으로 미국의 우주방위계획은 치명타를 입었다.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공중폭발 사고...
1986년 1월 28일 7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플로리다주의 케이프커내버럴기지에서 발사된 후 75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 선장 프란시스 스코비를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승무원 중에는 민간우주비행사 제1호인 고교 교사 크리스타 맥얼리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기불순과 연료계통의 이상 등으로 4차례나 연기된 끝에 이날 발사된 챌린저호는 미국의 25번째 우주 왕복선이었으며 챌린저호로서는 10번째의 우주비행이었다.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설치된 대통령조사위원회는 6월 9일 `오른쪽 고체연료 로케트 이음새 부분의 결함`으로 판명되었으나 과학기술을 과신한 인재라는 측면도 뒤늦게 밝혀져 챌린저호 사건은 전인류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었다. 이 사고로 미국의 유인우주왕복선 계획이 막대한 차질을 빚었을 뿐만 아니라 챌린저호가 폭발하는 순간의 극적인 모습이 TV방송으로 실황 중계되어 특히 그 비극성을 더해주었다.
이후 미국의 우주왕복선 발사계획은 대폭 미루어졌다가 사고 후 2년 9개월만인 1988년 09월 29일 우주왕복선 비행이 재개됐다.
     
The Final Countdown - Europe
Origin Upplands Väsby, Sweden
Genre(s) Hard rock, Heavy metal, Glam metal
Years active 1979–1992
1999 (partial reunion)
2003–present
Label(s) Hot Records
Epic Records
Sanctuary Records
Associated acts Tone Norum, Easy Action, Dokken, Brazen Abbot, Last Autumn's Dream
Website
www.europetheband.com
Members : Joey Tempest / John Norum / John Levén / Mic Michaeli / Ian Haugland
Former members : Kee Marcello / Tony Reno / Peter Olsson / Marcel Jacob
유럽이라는 밴드는 80년대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스웨덴 출신의 메탈밴드이다. 유럽의 출발은 1978년 베이시스트 Peter Olsson, 기타리스트 John Norum, 드러머 Tony Reno이 주축이된 밴드 Force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Roxanne라는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던 Joey Tempest를 영입하고 밴드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오랜동안의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쌓아갈 무렵 1981년 Peter Olsson이 밴드를 떠나게 되고 얼마후 밴드는 새로운 베이시스트 John Leven를 영입한다. 그러나 당시엔 거의 무명이었지만 스웨덴에선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Yngwie Malmsteen의 Rising Force(Alcatrazz 가입 전의 밴드)로부터 가입요청이 왔고 결국 밴드는 서로의 베이시스트를 교환하여 John Leven은 Rising Force로 그리고 후엔 다재다능한 뮤직씬에서의 활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탁월한 베이시스트 Marcel Jacob이 Force에 가입한다. 하지만 잉위의 독재에 싫증난 John은 다시금 Force로 돌아오게 되고 Marcel Jacob은 다시금 Rising Force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Marcel Jacob은 밴드의 앨범에 많은 도움을 주게되고 John Norum의 첫 솔로 앨범에 참가하는 등 이때 맺은 인연은 그뒤로도 계속된다.
1982년 Thomas Erdtman은 "Rock SM"이라는 로컬 밴드들의 경연대회를 기획, 1등을 한 밴드에게는 앨범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여기에 많은 무명밴드가 자신들의 데모테잎을 제출한다. 약 4,000개 정도의 밴드가 참가한 대회에 Force 역시 Joey의 여자친구의 권유로 자신들의 데모테잎을 제작하고 "The King Will Return","Seven Doors Hotel", "Rock On", "Children Of This Time", "Paradize Bay"등 후에 자신들의 데뷔 앨범에 실릴 노래가 담긴 데모를 제작하지만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밴드는 대회 참가를 포기한다.
하지만 Joey의 여자친구는 멤버들 몰래 이 테잎을 제출하게 되고 결국 밴드는 1차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듣게된 밴드는 자신들에게 온 기회를 잡기위해 연습에 몰두하고 밴드명 역시 Europe으로 변경한다. 하지만 당시 대회의 기획자이자 후에 Europe의 매니저가 되는 Thomas Erdtman는 당시에 스웨덴 내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팝락밴드 Gyllene Tider(여기엔 후에 Roxette을 결성 전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게되는 기타리스트 Per Gessle이 제적하고 있었다)와 같은 밴드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밴드를 만나 Joey Tempest의 목소리에 반한 그에 의해 Europe은 경영대회에서 1등을 하게되고 밴드는 그들의 앨범을 제작할 수 있게 되며 Thomas는 밴드의 매니저 역할을 맡게된다.
준비끝에 1983년 2월 발매된 Europe의 첫 셀프타이틀 앨범 [Europe]은 사실 저예산 독립 앨범이라 할만큼 녹음상태가 좋은 앨범이 아니었지만 당시의 메탈씬에선 보기드물게 새로운 감각을 가진 앨범이었으며 한 일본의 락 저널리스트에 의해 소개된 이 앨범은 이웃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되고 일본내에서 발매되기까지 한다.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은 " Seven Doors Hotel"을 비롯해 발라드 넘버인 "Words Of Wisdom", 기타리스트 John의 정통파적인 접근이 돋보이는 연주곡 "Boyazont"등은 바로크 메탈과는 또다른 클래식적인 접근과 정통 하드락에 기초한 새로운 감각의 메탈넘버를 들려준다. 앨범 발표 후 자국내의 투어를 통해 밴드의 이름을 알리는 한편 밴드는 다음 앨범 준비에 착수한다.
이어 전영혁 아저씨의 소개로 국내에 자신들의 이름을 처음 알린 앨범이기도 하다. 뛰어난 발라드 넘버인 "Open Your Heart"과 "Dreamer"를 비롯해 뿐만 아니라 Marcel Jacob과 공동작곡한 곡으로 공격적인 기타리프가 매력적인 "Scream Of Anger", John의 멜로디 감과 메인테마에서 두드러지는 실험적인 프레이즈가 귀에 쏙들어오며 80년대 국내 인기 메탈밴드였던 태백산맥의 라이브에서 들을 수 있었던 명 연주곡 " Aphasia"등은 일신우일신한 밴드의 역량이 엿보이는 곡들이기도 하다. 밴드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강화하기 위해 그전까지 Joey가 맡고 있던 키보드 파트를 Avalon 출신의 키보디스트 Mic Michaeli에게 넘기고 드러머 Tony Reno 역시 Ian Haugland로 바꾼다.
밴드를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앨범 [The Final Countdown]은 1986년 5월에 발매되었다. 사실 이 앨범은 앨범 작업이 끝난 뒤 앨범 커버가 아직 나오지 않아 상당기간 멤버들의 속을 태운 앨범이기도 하고 실제 미국내에서의 인기는 다른 국가에서 이미 많은 인기를 얻은 후 이루어지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Kevin Elson의 지휘아래 완성된 앨범은 이후 전세계적으로 650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밴드를 주류 메인 스트림에 올려준 앨범이기도 하다.
너무나 유명한 "The Final Countdown", 경쾌한 멜로디에 John의 개성적인 기타솔로가 매력적인 락넘버 "Rock The Night", 발라드 넘버 "Carrie"등은 MTV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뮤직 비디오가 되기도 한다. 하나 이 앨범은 이전작에서 보여준 하드하면서도 고급스런 메탈음악을 추구하던 밴드의 스타일이 미국 밴드 스타일의 팝적인 감각을 많이 띠게 되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러한 밴드 스타일의 변화는 팝메탈 경향을 추구하던 밴드의 두목인 Joey와 원초적인 하드락 사운드를 원하던 기타리스트 John Norum과의 음악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John은 1986년 가을 일본투어를 마치고 자신의 솔로 활동을 위해 다른 밴드멤버들에게 자신의 탈퇴를 통고한다. 실제로 이 앨범 수록곡 "Love Chaser"를 들어보면 팝메탈적인 곡의 메인테마에 비해 거의 잉위스타일의 기타솔로위에 강력한 얼터너티브 피킹이 가미된 헤비하고 스피디한 기타 솔로는 약간의 이질감을 갖게 하기도 하며 밴드내의 음악적 균열을 보여주는 곡이다.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찾아야만 하는 밴드는 같은 스웨덴 그룹인 Easy Action의 기타리스트인 Kee Marcello - 본명은 Kjell Lovbom - 에게 가입을 요청하게 되고 그가 Europe의 노래를 연습하는 동안 John Norum은 활동을 계속하여 다음해 10월까지 밴드와 투어를 계속한다. 독일 Dortmund에서 열린 라이브를 통해 팬들에게 첫선을 보인 Kee는 John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꿀 만한 역량을 가진 밴드였으며 그 역시기타 솔로의 기교보다는 메인리프에서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잘 만들어 내는 실력있는 기티리스트임을 증명한다. 한편 John 역시 자신의 솔로앨범을 통해 솔로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1987년부터 시작된 미국 시장 공략은 - 개인적으로 썩 내키지 않는 음악적 잣대이기는 하지만 상업적 성공이라는 면에선 하나의 표준이 될 수 있는 - 빌보드 싱글 차트 8위에 오른 "The Final Countdown"의 인기에 힘입어 큰 성공을 이루고 미국 전역을 도는 투어를 통해 밴드는 드디어 메인 스트림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투어와 함께 밴드는 새로운 싱글 "Superstitious"을 발표한다.
1988년 발표된 앨범 [Out Of This World]은 역시 인기 프로듀서인 Ron Nevison의 지휘아래 이루어졌다. 하지만 팝락넘버를 주로 만들던 Ron의 지나친 오버프로듀싱에 의해 밴드 멤버들은 사실 앨범에 대해 그리 만족할 순 없었으며 오히려 라이브 퍼포먼스에서 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기도 한 앨범이기도 하다. 첫 싱글의 시큰둥한 반응에 이은 발라드 넘버인 "Open Your Heart", 경쾌한 락넘버인 "Let the Good Times Rock" 모두 전작의 큰 성공에 비해 큰 성공을 얻진 못했다.
또한 1989년부터 시작된 헤비메탈의 추락 - 사실 타성에 젖은 스스로가 자초한 몰락이기도 한 - 과 얼터너티브 락이 점차 메인 스트림을 넘보는 상황에 의해 밴드의 미국측 메니지먼트는 밴드에게 계약종료를 통고하여 밴드의 주무대는 유럽과 일본, 남미대륙으로 변하게 된다. 미국 시장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남미에서 밴드에게 보낸 팬들의 성원에 의해 칠레에서만 3만명 이상이 모일정도로 투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1991년 발매된 밴드의 다섯째 앨범이자 밴드의 마지막 (?) 앨범인 [Prisoners In Paradise]은 여성 락커 Fiona의 남편이자 실력있는 키보디스트로서, Ratt, Warrant와의 작업을 통해 인정받는 프로듀서 Beau Hill의 프로듀싱으로 완성되었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밴드는 강력한 얼터너티브에 맞설 밴드의 새로운 스타일에 고심했고 그들의 출발이기도 했던 하드락으로 돌아서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그들의 매니저와의 불화를 낳았고 결국 데뷔때부터 이들을 도와주던 매니저 Thomas Erdtman와 결별한 밴드는 자신들의 미국 데뷔와 투어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Herbie Herbert를 새로운 매니저로 맞아들인다.
앨범 발표후 밴드는 메탈리카와의 일본라이브를 마치고 유럽투어를 벌이고 MTV의 언플러그드 라이브에 초대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만 팬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얻기엔 힘겨웠고 이미 많은 락팬들의 귀는 얼터너티브의 원초적인 사운드에 익숙해져갔다. 결국 다음해인 1992년 밴드는 잠정적으로 활동 중지를 선언한다.
그해에 Joey는 John Norum의 솔로앨범에 참가하여 "We Will Be Strong"을 불러 팬들을 이로하기도 하였고 1995년과 1997년 자신의 솔로앨범을 발표하기도 한다. John Leven은 키보디스트 Mic과 함께 Glenn Hughes의 솔로앨범 [From now on...]에 참여하기도 하고 이를 계기로 드러머 Ian Haugland와 함께 Fortune 출신의 보컬 Benny Soderberg를 영입하여 Clockwise를 결성 활동하고 있다. 기타리스트 Kee Marcello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세션활동을 병행하며 자신의 솔로앨범 [Shine On]을 1996년 발매한다.
밴드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게된다. 80년대 락음악에 목말라있던 국내 고삐리 락팬들에겐 -이젠 거의다 30대지만 - 정말 청량제와 같았던 밴드이기도 했지만 초기의 유니크한 스타일이 점차 대중지향적 - 정확하게는 미국 지향적으로 - 변모되면서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이렇게 상실된 방향감각에 의해 결국 밴드는 해산의 길을 걷게된다. 그 아쉬움들 만큼이나 밴드의 초기 음반 특히 1,2집에서 느껴지는 그들만의 유니크한 스타일은 지금 들어도 인정해 줄 만하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6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