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자유게시판

그러니 아직은 멀었다 할 수 밖에

스크랩 인쇄

양명석 [stephan47] 쪽지 캡슐

2008-07-24 ㅣ No.122347

 

그러니 아직은 멀었다 할 수밖에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들의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인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야고버 서에서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두 주장이 서로 다른 듯 보인다. 믿음을 머리에만 가두어서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믿음의 의미를 확장해서 광의(廣義)로 해석한다면 믿음은 마음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구체적 실천은 삶을 통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께서는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느님께서 명하시면, “예”하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떠났다. 무조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의 명하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침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바쳤다. 우리들에게 이러한 하느님의 명이 떨어졌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을게다. 그렇지 않다면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울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온전한 믿음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한 일인가?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끊어내는 아픔 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나? 이 완악(頑惡)한 우리 죄인들의 가슴은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열릴 수가 도대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승이시고 “길이며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신앙인임을 자처하며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것은 무엇일까? 머뭇거림 없는 답변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일이다. 고3 아들이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공부에 지장이 있을까 꺼림칙하고, 무언가 직책을 받아서 회장님 호칭을 듣는 것이 싫지는 않다. 그러니 아직은 멀었다 할 수밖에, 몸통은 놓치고 비늘만 손에 묻히고 있으니!



 



458 9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