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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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화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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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0-06-01 ㅣ No.5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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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화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 마르코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씀>


    언젠가 복음서를 쭉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만 한번 추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유형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말씀들을 하셨더군요. 수많은 비유들, 제자들의 특별 교육용 일화들, 정신 못 차리던 제자들 혼내시던 말씀들, 잘 알아듣지 못하던 군중들을 위한 재미난 이야기들,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대화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들, 그 많은 위로의 말씀들, 희망의 말씀들...


    예수님의 말씀을 유형별로 정리하다가 느낀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상황 상황에 너무도 적절했고, 기지로 넘치는 말씀이어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올가미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계책을 마련해서 다가왔을 때, 그래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지혜로 흘러넘쳤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언변은 더욱 빛을 발했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용감하게도 홀로 맞서셨습니다.


    적대자들은 논리 정연한 예수님의 말씀, 순금과도 같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 어쩔 수 없이 승복해야하는 진리 앞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뺍니다. 그리고 치를 떨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눈앞에 놓여있던 먹잇감을 놓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강경하게 맞서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약자들이 상처받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으로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셀 수도 없이 구해내셨습니다. 박해자, 위선자, 이교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우셨지만, 길 잃고 방황하던 양떼들에게 그분의 말씀은 한없이 감미로운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랜만에 좋은 건수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잡아넣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소원성취 하는구나, 하면서 희희낙락,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발되어 구속될 상황이었습니다.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 인간들 분명히 예수님을 유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이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나온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한 상황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장황하게 이것  저것 설명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한마디 강력한 말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주시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우위성, 하느님의 우선권에 대한 강조도 놓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요? 어찌 그리 지혜로운지요? 어찌 그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지요?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의 깊이 있는 수행생활 탓도 컸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진리를 깨쳐나가셨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일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일치상태에 계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 설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건네주셨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군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늘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심사숙고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 하느님의 견해를 구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시라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경우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늘 고민하셨습니다. 그 결과 단 한마디도 버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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