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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가 학생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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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bukhansan] 쪽지 캡슐

2017-01-21 ㅣ No.212038

 

 

 

                                                                                                            Graham Sutherland

 

 

신학교가 학생들을...

 

 

무슨 일로 신학교에 갔었습니다.

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기숙사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침묵 속에 한 줄로 줄지어 걷는 앳돼 보이는 신학생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바깥세상 여느 젊은이들 같으면 간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늦도록 몰려다니다 자정이 다 되어서 집에 들어와 아직도 곤한 잠에 빠져 있을 이른 시각에 아침 미사를 드리고 있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주님께서 저 어린 아이들을 그물을 쳐 낚아다가 당신의 구원사업을 위해 아! 이렇게 기르시는구나! 하면서 숙연해 졌습니다.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 신학생들의 청아한 성가를 들으며 교회가, 전 신자가 성소와 신학교에 정성을 다하는 소이를 새삼 느끼면서 여기 있는 모든 신학생들이 한 사람도 탈락자가 없이 훌륭한 사제로 태어나길 소원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제 뇌리는 착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렇게 풋사과 같은 학생들을 신학교에서 버려놓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불쑥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선 교구사제들이 어찌 그리 미운 분들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노드나 설문조사나 무슨무슨 포럼이나 간에 교회쇄신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 으레 1위가 사제의 권위주의가 꼽히는 등 사제가 타깃이 되는 것만 보아도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신학대학이 일곱 개나 있습니다. 2016년도 각 교구 신학대 합격생은 합해서 117명입니다(미등록자 포함). 2011년에는 179명이었는데 불과 5년 사이에 무려 35%가 감소한 셈입니. 입학 정원 충원률은 연평균 61.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입시 지원자 수능성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의 수도권 일반대학지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교구마다 막대한 재정을 신학교 설립에 쏟아 붇고 연간 운영비만도 엄청납니다. 1년에 몇 분 서품을 위하여 쏟아 붓는 재물이 아깝다는 뜻이 아니라 과연 학문과 영성과 인성 면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성취하느냐 하는 기우가 스멀스멀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신비를 풀어 낼 수 있고 영원한 진리를 꿰어 낼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대신 베풀어 사람과 자연을 모두 품을 수 있는 신과 인간의 중간쯤의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 곳이 신성한 곳이기는 하나 신품성사가 단박에 자동적으로 영성이나 인격을 칩을 바꿔 끼듯이 높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한 교구에 한 개의 신학교를 운영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 권고를 오늘의 한국교구도 따르고 있음인가? 참 어이없는 노릇입니다. 이 권고는 종교개혁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열렸기 때문에 사제 지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온실 같은 신학교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천사와 신부가 같이 있으면 신부에게 먼저 인사하겠다는 사제 우선추앙론도 당시 심각하게 타락한 성직과 교회의 부흥을 위한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중세시대 사제양성에 갇혀있습니다. 권위주의와 독선 그리고 성속이원론 등 모든 부정적 적폐가 신학교에서 내리물림으로 배태되고 있음입니다.

 

 

7년간의 수강 과목을 대충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미심적은 건 우리 사제들에게서 신비주의를 한 꺼풀 걷어내면 곧바로 들어나는 건 그지없는 독선과 무례라는 민망한 실정입니다.

헬만 헤세의 데미안은 읽었을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읽었을까?..... ’죄와 벌이야 읽었겠지.......’도덕경이나 능엄경까지도?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The Study of History)‘, 버틀란드 러셀이나 한스 큉 등을 정독 해 볼 기회는 있는지.... 혹시 서점 문 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리처드 도킨스나 티모시 프리크 등을 훑어 본 적은 있는지....

신학이나 철학에 눈을 트여주고 사회과학의 맛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사고팔고(四苦八苦)를 요해하고 희로애락을 종잡을 줄 아는 멋진 인품을 닦는 일입니다.

제대위에서 강복을 내리시는 모습, 말씀 선포하시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엔간한 인간적 허물은 덮어지고도 남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목불인견의 분란과 고통 속으로 몰아대는 성직자들이 정말 너무 쌨습니다.

성직자를 존경하고 공경을 드리는 이유는 그 분들이 진리와 사랑의 화신(化身)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사랑을 입으로만 전한다면 그 건 중고동학교 교사 쪽입니다. 무당이 고래로 천민에 속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 지방교구 본당에 다닐 때 본당출신 신부님이 지금 어느 본당 보좌이실까 궁금해 하다가 놀라 넘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보좌가 아니라 당당히 주임사제라는 겁니다. 서품 만 3년도 안됐는데 말씀입니다. 그래서 좀 들춰봤더니 꽤 여러 본당이 엇비슷한 경우였습니다.

30세 약관으로 기천 명 신자 가족,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 끌끌한 지식인도 상당한데 서른 살 어린목자라니! 얼마나 평신도를 병신도로 보기에 이런 병폐를 자행하는가 싶었습니다.

하긴 예수님께서는 약관 서른에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만!!!

사제는 신학생 때부터 신자대중 평신도를 받들고 두려워하는 걸 배워 익혀야합니다.

 

 

교회쇄신이나 복음화나 본당공동체 활성화나 교회가 피폐되어 퇴화하는 경우나 그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본당사제의 탓이 90%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좋든 싫든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주임신부의 삿대에 실려 갈 뿐입니다.

사제는 적어도 교회 쇄신에 대한 관심을 한 자락 깔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집이 비가 새는지 기둥이 기울지는 않았는지 살펴볼 줄 모르면 주인 될 자격이 없습니다. (사회)을 향한 진보적, 좌파적 사고만큼 성교회를 돌아보는 자성의식은 의무요 책임입니다.

 

 

필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발칙하고 무례한 생각이 가끔 머리를 듭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우리 성직자보다 더 금수저는 없고, 더 무비의 무능에 무비의 공대를 받는 계층도 없고, ‘시거든 떫지나말지라는 비속어보다 더 맞는 답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시답잖은 일들이 신학교에서부터 알게 모르게 몸에 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에 안 가본 놈이 가본 놈을 이긴다는 격이겠지만 도대체 신학교에서 뭘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의문이 안 들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이 시대를 진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제들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늦기 전에 개혁을 단행해야합니다. 개혁의 항목은 이미 들어나 있습니다.

각 교구의 신학교를 줄여 통합하므로 서 양성의 질적 수준을 극대화하고 전국적으로 사제의 연대를 이루는 일입니다. 우선 시급한 사항은 현재 겪고 있는 교수진의 질적 양적 부실을 일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 철학에서부터 일반교양과목과 예능에 이르기까지 평신도 강의가 상당비율로 조율되어야 바람직합니다. 장님 제 닭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소통공감능력을 키워주는 사제 양성 과정이 실증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개혁은 신학교 혁신에서 시작됩니다. 성직자가 교회의 맏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는 사제양성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신학발전의 구심점이 되는 일입니다.

교계의 유일한 정론 지였던 40년을 면면히 이어온사목지가 20074월 쥐도 새도 모르게 하루아침에 주교회의 산하 사목연구소해산과 더불어 폐간되었던 황당한 참변을 잊을 수 없습니다. 광주가톨릭대학에서 발행하는 신학전망 유일하게 명줄을 잇고 있습니다만 광범한 연구패턴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1997. 5. 16 블라이티스 주한 교황청 대사는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이제민 신부, 서강대학교 교수 서공석 신부, 정양모 신부에게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이 전하는 경고장을 우리 주교회의에 전하였고 곧바로 위 세분은 교단을 떠나야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신학의 부재는 희망의 부재입니다. 신학이 미약한 종교,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새 부대에 담는 신학의 융성을 도모하지 못하는 종교는 진로를 상실한 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온 지 250, 신교는 120.

불교가 신라 땅에 들어 온지 1백년 만에 원효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4백여 년 전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세기를 초월하여 세계적 명저입니다.

과연 한국 그리스도교의 원효는 언제쯤에나 나타날까..... 원효의 신학은 천년이 훨씬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사상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인입니다. 원효 말고도 삼론종의 승랑이나, 의상, 지눌 등등 학문과 실천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많은 거봉들과 중국대륙에 까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 있었습니다. 유교도 토착화를 이룬 봉우리들이 기라성 같습니다.

 

 

현재 한국 가톨릭신학은 민간신학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학교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7개로 분산되어 속 빈 강정 같은 상태로는 결코 도모할 수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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