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한다면한다?...1989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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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남 [oyoo] 쪽지 캡슐

2000-10-30 ㅣ No.1992

 백창기님의 <세가지 큰 죄>를 읽으면서

이런 분의 심성은 얼마나 고운 분일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만큼 감동을 받았기에  짧지만 또박또박 퍼올렸을까...부러웠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신앙을 갖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지요...<마음의 평화>는 정말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의 평화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하면 막연합니다.

 

 평화라는 것은 언뜻 머리로는 이해가 쉽게 되는 듯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가슴으로는  깊이 느껴지기가 쉽지 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평화>라는 말을 정말 쉽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미사시간 중에도 우리는 빠지지않고 <평화를 빕니다>라고 축복하지요....

저는 어쩐 지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을 할 때...어줍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옆으로 인사를 나누려고 하면 그곳에 서있는 사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고...

그래서 뒤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그 사람은 또 다른곳을 향해있고...

유독 저만 그런 지는 알 수가 없지만 타임을 잘 맞출 수가 없습니다.

몹시 쑥스럽지요.

 어느때는 급한 마음으로 돌며돌며 인사를 할 타임을 맞추다가

옆 사람과 이마를 부딪친 적도 있습니다. 행여 타임을 잘 맞춰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하면

그는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어느새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계면적기 짝이 없습니다...분심이 듭니다...

그래도 평화를 빕니다라고 열심히 외어야 하겠지요.우리는 평화를 원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있는 그런 물건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평화는 역시 그냥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어야 할 겝니다.

그런데 어떤 입교자는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라며

그 사람의 신심을 닮고자 입교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의 모범적인 생활태도가 비신자였던 어떤 사람에게

 <작은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삶!- 그것이 평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을 보면 어쩐지 평화스럽다....라는 표현이 그럴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거나...아니면 상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은

아마...

주님을 닮는 생활태도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쯤에서 본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간혹,우리는 신앙심을 강요당할 때가 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핍박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름으로  편파적인 집단을 형성하기도 하고...

그 이름으로 상대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그런 일은 종종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하는 설움은

<모리배에게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클 것입니다>

 

 백창기님이 올리신 글을 천천히 읽으면서

한단계 더 깊이 들어가는 은총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렇지요..세상만물이 모두 주님의 은총일터인데...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만물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주님이 계실터인 데...

우리는 그것을 깜빡깜빡 잊고선 잘못을 저지릅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주님의 보호가 있음에도...

우리는 주님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습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랬던 행위는 모두 개인적 이해타산의 결과일 것입니다.

개인적 이해타산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의 용서를 구하면서도..

이해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상대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신앙안에서의 모든 분란과 싸움과 투쟁적인 모습들을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고함칩니다.

목에 힘줄이 돋도록 힘을 주어 한다면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주님을 위해서 멱살을 잡고,쓰러뜨리고,고소하고,농성을 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위하여, 혹은 주님의 신앙을 지키기위하여 폭력을 행사한다...??

어떤 정의라도, 어떤 사랑이라도,어떤 진리라도...

강제가 있다면...폭행이 동원된다면...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존심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주장했던 언어에 대한 체면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한다면 한다!라는 용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언어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없는 용서와 화해>라는 주님의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억울한 줄 알면서...

뻔히 속는 줄 알면서...

뼈를 깎는 고통인 줄 알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주님의 크나큰 뜻을 생각해 봅니다.

 

 찬미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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