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자유게시판

김학렬 신부님의 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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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donghune] 쪽지 캡슐

2015-08-19 ㅣ No.20944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난 7월 10일 굿뉴스 자유게시판에 천진암 성지 게시판에서 퍼온 김학렬 신부님의 "한국천주교 초기교회사의 쟁점연구에 대한 소견"이란 글이 실렸더군요.


작년에 수원교구 손골성지의 윤민구 신부님이 국학자료원에서 출간한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 - 성교요지/십계명가/만천유고/이벽전/유한당 언행실록은 사기다》란 책에 대해 천진암 성지의 김학렬 신부님이 비판한 글이었지요.


윤신부님의 책을 꼼꼼하게 읽어본 저로서는 김학렬 신부님의 비판 글이 전혀 타당하지가 않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마침내 윤민구 신부님이 김학렬 신부님의 글에 대한 반박글을 쓰셨더군요.


총 4쪽 자리로 된 김학렬 신부님의 글에 대해 윤민구 신부님이 총 34쪽에 걸쳐 학자답게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셨네요. 


그래서 윤신부님의 글을 여기에 퍼와서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고어가 제대로 표시 안 되고 잘리네요.

읽으시다가 단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고어라서 잘린 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관심있으신 분은 한국순교자연구소 홈페이지 (www.rimartys.pe.kr) 에 가서 <자료실>에 있는 "김학렬 신부님의 글 비판"을 찾아보시고 첨부된 파일을 다운받아 읽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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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렬 신부님의 글 비판 

 

                                                                         - 손골성지 전담 윤민구 신부

 

차례

1. 들어가는 말

2. 문제의 본질

3.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 김학렬 신부님 주장 비판

4.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작년, 20146월 말 필자는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인 얼마 전 김학렬 신부님이 반론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책이나 논문 형식이 아니었고, 분량도 A4 용지 4쪽짜리였으며, 천진암성지 게시판과 수원교구 사제들의 게시판에 올렸다

 

   사실 처음에 필자는 김학렬 신부님이 쓴 반론 글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김학렬 신부님은 본질적인 문제 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고 있고, 글 내용 이 전반적으로 앞뒤가 안 맞거나, 이상한 논리에서 나온 엉뚱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글에 시간과 노력을 소모해서 반박의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김학렬 신부님의 글에 대한 대답은 이미 필자가 낸 책에 다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의 글에는 도무지 사실이 아닌 것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고, 필자가 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어 혹시나 필자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혼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대한 반박의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김학렬 신부님의 글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필자가 책에서 제기했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짚고 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김학렬 신부님은 필자가 제기했던 문제의 본질과 아오스딩문제를 언급하게 된 대전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에만 집착한 결과, 문제의 본질이나 핵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거롭더라도 필자의 책에서 말한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들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려 한다.     


2. 문제의 본질

 

  필자가 책에서 말한 내용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이벽이 성교요지를 썼다는 기록이나 전승(구전)은 어디에도 없었다. 초기교회 때는 물론 그 이후에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1967년에 고() 김양선 목사에 의해 갑자기 성교요지의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김양선 목사가 자신이 수집한 성교요지등 다수의 초기 천주교 관련 자료들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천주교 측 연구자들이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그 성교요지를 이벽이 쓴 것이라며 열광하였다.


  2) 하지만 성교요지에 나오는 성경 인명과 지명 중에는 이벽이 죽고 나서도 100년이나 지난 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용어들이 무더기로 들어 있다. 감람’, ‘야화화’(耶和華-여호아), 방주, 이색열(以色列 -이스라엘) 등 천주교에서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개신교 용어들이 성교요지에 상당수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용어들은 이벽이 죽고나서도 한참 후에 중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사용한 용어들이다. 그리고 그 후 일본과 한국 개신교에서도 받아들여 사용한 철저한 개신교 용어들이다. 그러니 이벽이 이런 개신교 용어들을 알 리도 없고 그런 용어들이 들어있는 성교요지를 썼을 리가 없는 것이다.


  3) 내용 또한 문제이다. 성교요지에 나오는 내용 중에는 언뜻 보면 성경이나 예수님에 관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성경과 천주교 교리에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내용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대단하고 복잡한 성경 내용과 천주교 교리가 잘못 써져있다는 것이 아니다. 가장 기초적인 성경 내용과 가장 기본적인 천주교 교리에조차 안 맞는 엉터리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면 성교요지에서는 원죄아벨의 형인 카인이 양을 죽인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어릴 때부터 일찍 서둘러 꾸짖는 것을 말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세례에 대해서도 씻고 머리를 감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노아의 홍수에서 홍수를 일으킨 것은 노아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로지 즐겨하시는 것은 나귀 타고 거니는 것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취미가 나귀타고 노니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곡식의 씨와 상한 짐승을 간수하는 일을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다라고 하기도 하고 예수님은 죽은 자는 그냥 무덤에 내버려두셨다고 하여 예수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런 글을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였던 이벽이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한 이벽이 죽은 지 100년 후에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용어들과 엉터리 성경 내용들로 가득찬 글들을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이 썼을 리도 없다. 한 마디로 성교요지는 이벽이 쓴 글일 수가 없으며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가 쓴 글도 아닌 가짜이다.


  4) 김양선 목사가 수집해서 기증한 소위 정약종이나 정약전이 썼다고 알려진 십계명가도 마찬가지이다. 십계명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십계명의 분류가 완전히 개신교식으로 되어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십계명을 다르게 분류하는데 이 십계명가는 철저하게 개신교식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식 분류 방법을 버리고 그런 개신교식 십계명가를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 십계명가역시 가짜이다.

 

  5) 이벽전이나 유한당 언행실록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이벽전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무엇보다도 이벽전에는 개신교 용어와 엉터리 성경 및 교리 내용으로 가득찬 성교요지를 이벽이 1778년에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두말 할 것도 없이 이벽전도 가짜 천주교 자료인 것이 확실하다.


   이벽의 부인이 썼다고 알려진 유한당 언행실록에는 이혼에 대해서도 나온다. 칠거지악에 의거하여 부인을 내쳐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천주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결혼에 관한 교리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칠극등과 같은 천주교 서적들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른 것이다.

 

  〈유한당 언행실록에는 시집가기 전에 제사지내는 법을 철저하게 배워라는 등의 내용도 나온다. 그리고 초기 교회와 박해시기까지의 한국교회 상황과도 전혀 안 맞는 내용들도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런 내용들이 나오는 유한당 언행실록역시 이벽의 부인이 썼을 리도 없고 초기 천주교 신자나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도 쓸 수 없는 글이다.


  6) 이런 사실들을 볼 때 성교요지를 비롯한 이런 글들은 사기를 목적으로 지어낸 글임에 틀림이 없다. 즉 마치 이벽이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쓰고 그것을 다시 다른 천주교 신자들이 필사한 것처럼 꾸며 사기를 치려고 만들어 낸 글이다.


   특히 성교요지는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에 개신교 성서를 대충 읽어본 누군가가 사기를 칠 목적으로 대충 얼기설기 내용을 엮은 다음 마치 이벽이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쓴 것처럼 꾸민 것이다.

 

   고 김양선 목사가 수집하고 기증한 성교요지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동안 알려진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와 한글본 성교요지, 그리고 이번에 필자가 새롭게 소개하게 된 당시초선성교요지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와 한글본 성교요지에서는 그것을 이벽이 쓴 것이라고 되어 있고 당시초선성교요지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쓴 것처럼 되어 있다. 이런 사실들을 보더라도 이 세 종류의 성교요지는 모두 사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글인 것이다.


  7) 그런데 굳이 이런 글들을 누가, 언제 썼을까 따져본다면, 그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

 

  첫째,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에서는 필사자가 정아오스딩이라고 되어 있고 유한당 언행실록에서는 정아우스딩으로 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이런 자료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거나 서로가 서로의 자료를 보고 위조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둘째, 세 종류의 성교요지에서 모두 개신교 용어들과 개신교식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고, 더욱이 그 내용 중에는 아직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소개하지 않은 구약성서 내용들이 나온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성교요지는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중국에서 들여온 중국 개신교 신구약 한문성서를 보고 썼거나, 한국 개신교에서 구약성서 내용을 조금씩 번역하여 소개하기 시작한 1906년 이후 혹은 한국 개신교에서 신약과 구약 내용 전체가 모두 번역되어 소개된 1911년 이후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필자의 책, 292).

 

  셋째,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등에서 소위 필사자로 되어 있는 정아오스딩이라는 이름의 철자법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는 초기 교회부터 박해시기까지 한 번도 아오스딩이라고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오스딩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초기교회부터 박해시기가 지난 1887년 이후까지 한글로 쓸 때 아오스딩이라고 하지 않았다. ‘?스딩이라고 하였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이 읽었던 성경직해성경광익, 성년광익에는 성 아오스딩에 대해 수없이 많이 언급한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모두 아오스딩을 한자로 奧斯定(오사정)’이라고 하였다. 중국식 발음은 ?aosiding?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는 ?스딩이라고 하였다...

바오로?라고 하였으며, 그레고리오는 그레고?라고 하였다. 아오스딩을 ?스딩이라고 한 것은 활판본 긔해일기치명일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도 아오스딩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모두 ?스딩이라고 썼다...

이러한 철자법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23년에 간행된 회쟝직분을 보면 ?스딩아오스딩이 같이 쓰이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그러면서도 629일의 성인 바오로 사도는 아직도 “Paulus ?로 종도라고 하였다.

한편 1931년에 나온 會長避靜(회장피정)에는 저자가 ?스딩 신부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당시까지 아직도 ?스딩이라고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볼 때 1920-30년대는 한글 표기에서 ?아오가 혼용되면서 차츰 아오로 변환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따라서 한글본 성교요지에서 아오스딩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곧 한글본 성교요지가 필사된 시기가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되던 시기이거나 완전히 아오스딩으로 정착된 시기 이후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한글본 성교요지는 아무리 빨라도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되던 시기인 1920~1930년대 이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필자의 책, 295~297)

 

  넷째,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단서들이 있다. 그것은 1920~1930년대에 걸쳐 천주교 순교자들을 이용한 천주교 자료 사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 천주교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있었던 1925년을 전후하여 보감등을 통해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지식들이 많이 알려지게 되고 1930년에는 청구학회가 발족하여 한국천주교회사와 천주교 순교자들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과 정보들이 알려지게 되자, 천주교 순교자에 대해 한층 높아진 관심을 이용하여 순교자들을 이용한 사기 사건들이 1920~1930년대에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주재용 신부님과 보성보통전문학교가 1937년에 겪은 사기 사건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볼 때도 성교요지이벽전등 가짜 천주교 자료들이 사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1920년대~1930년 이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필자의 책, 298~303)


   다섯째, 또 다른 단서는 이벽전에 나오는 홍대용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홍대용에 대한 이야기는 1933년 청구학회를 통해 야마구찌가 홍대용에 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런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도 성교요지이벽전등 가짜 천주교 자료들은 193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렇듯 사기를 쳐서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글들을 이벽이나 초기교회 신자들이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분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고 한국천주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필자가 책에서 말한 본질적인 내용이고 대전제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필자의 책에서 주장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 아오스딩문제의 대전제이며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은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단순히 아오스딩의 철자법의 변천 문제에만 집착하여 필자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것도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로 가득찬 주장들을 하며 필자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의 그런 주장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들인지 이제부터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1) 1800년대에도 아오스딩이라고 한 적이 없다.  


   김학렬 신부님은 필자가 아오스딩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1895을미년에 간행된 치명일기에서, 223. 손 니고나오와 444. 홍 다니스나오, 622. 김 비오의 경우에도 그대로 풀어서 쓰고 있으므로, 1800년대에도 벌써 현대적인 철자법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7년에 감목 민와스딩 감준으로 발행된 [일과절요]의 련옥도문에서, 셩 마토라 하면서도 셩 니고나오는(p.63) 풀어서 쓰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1900년에 민와스딩 감준으로 발행된 [텬쥬셩교공과]의 련옥도문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셩 마토라 하면서도 셩 니고나오는(p.62) 풀어서 쓰고 있다. 여기서 성 제르바시오와 성 쁘로다시오의 경우에는 셩 열왜(熱爾瓦削 제르바시오)와 셩 뵤?(?羅大削 쁘로다시오) 라고 하였다.(p. 63; 경향잡지 1920, p. 56 참조)”

 

  필자가 아오스딩의 철자법을 거론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글본 성교요지등에 정아오스딩이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오스딩이란 이름의 철자법이 초기 교회부터 아오스딩이라고 계속 써왔다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천주교회에서는 그 초기부터 박해시기가 지난 1887년 이후까지는 계속해서 한글로 ?스딩이라고 쓰다가 그 이후에 아오스딩이라고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필자가 주목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벽이 썼다고 알려진 한글본 성교요지등에 필사자가 정아오스딩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는 단순히 라는 철자법과 다르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이 필자를 반박하기 위해 증거로 내놓은 니고나오다니스나오비오란 이름은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등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등장하지도 않은 이름들에 필자가 주목해야 하고 거기에 대해 논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오스딩이란 이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성교요지이벽전에 나올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자법이 박해시기까지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이 썼던 철자법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교회나 박해시기 천주교회에서 ?스딩아오스딩을 혼용해서 썼다면 설령 아오스딩이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에 필사자로 나왔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교회부터 박해시기가 끝난 이후까지도 한동안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은 한글로 아오스딩이라고 쓴 적이 없다. 그때까지 천주교에서는 ?스딩이라고만 썼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박해시기가 끝나고 한참 후부터 아오스딩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에는 초기 교회부터 박해시기까지 천주교 신자들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아오스딩이란 철자법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문제가 되고 그 이름과 그 철자법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등은 그 내용으로 볼 때, 처음부터 사기를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그래서 사실상 원본을 쓴 자가 필사자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그런데 바로 그런 글들의 필사자가 정아오스딩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글들이 쓰여진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스딩?아오로 변하면서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되던 시기인 1920~1930년대이거나 아오스딩으로 정착된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스딩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변화를 보이는 사례가 ?그레고?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한글본 성교요지등에 한 번도 등장하지도 않는 니고나오”, “다니스나오”, “비오등과 같은 이름들을 거론하면서 필자를 비판하고 초기 교회부터 현대적인 철자법을 썼다는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김학렬 신부님은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전혀 파악하지 못 한 채, 더 나아가 필자가 왜 혼용이라는 말을 했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 한 채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학렬 신부님의 글만 읽은 사람들은 마치 박해시기와 1800년대에도 이미 천주교 안에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아오스딩이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혹은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되었던 것처럼 착각하여 혼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더 큰 문제는 김학렬 신부님의 이러한 주장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속임수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김학렬 신부님이 증거 자료라고 제시한 1895년에 나온 치명일기1897년에 나온 일과절요, 1900년에 나온 천주셩교공과?에는 모두 아오스딩이 아닌 ?스딩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치명일기?스딩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필자의 책에서도 언급하였고 자세하게 도표까지 만들어서 소개하였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그런 내용은 일체 말하지 않은 채 성교요지에 나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필자도 거론하지 않았던 니고나오등의 사례를 들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1897년에 나온 일과절요에는 김학렬 신부님이 반박 증거라고 내세운 니고나오와 같은 페이지인 63쪽에 ?스딩이 나온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그런 사실을 일체 말하지 않으면서 엉뚱하게 니고나오를 언급하며 문제의 초점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두 페이지 앞에 있는 61쪽 에는 ?스딩과 같은 맥락의 철자법으로서 필자가 책에서도 언급하였던 ?도 나온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이런 사실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1900년에 나온 천주셩교공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김학렬 신부님은 62쪽에 셩 니고나오의 사례가 나온다고 말하면서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하지만 셩 니고나오62쪽이 아닌 61쪽 후면에 나온다. 게다가 셩 니고나오바로 옆에는 ?스딩도 나오고 셩 그레고?도 나온다. 또한 바로 앞 페이지인 60쪽에는 ?도 나온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이런 사실들은 일체 말하지 않은 채 온갖 현란한 말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논지를 흐려놓았다.


  그리하여 필자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1800년대에 나온 치명일기일과절요, 그리고 1900년에 나온 천주셩교공과? 등에 ?스딩이 아닌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2) 1700년대에도 아오스딩이라고 한 적이 없다.

 

  김학렬 신부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주장까지 하였다.


. 1700년대 말에 번역되어, 신유박해시에 압수되었던 한글본 성년광익에서도, 현대적인 표현이 혼용되고 있었다. [성년광익 I] 춘계 제 이편의 목록에서 십구일셩어서비오쥬교, 일이일 셩나사로현슈라 하였고(p. 258), 본문에서도 그대로 어서비오와 나사로로 표현하고 있다.(p. 321, 332). 1700년대에 번역되어 1800년대에 필사되었을 [성경직해광익] 한글본의 성모승천 첨례성경에서도, ‘엇디 에사오를 보디 못하엿나냐하면서 에솨라고 하지 않았다. 11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경우에는, ‘셩 바아랑시스구 사베뤼 셩 이나쉬로 표현하고 있다.(천진암성지자료집 111, p. 266, 268.) 그러나 [성교감략, 1897년 민 와스딩 감쥰]에서는 인노성시오, 방지거 사베리오 원션시오로 풀어서 쓰고 있다.(p.80, 86, 89, 99).”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역시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등에 나오지도 않는 이런 이름들은 문제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등에 아오스딩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것의 철자법이 초기 교회나 박해시기에는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학렬 신부님은 필자를 반박하는 증거로 1700년대에 나온 한글본 성년광익성경직해광익을 제시하고 있지만, 필자가 이미 책에서도 자세하게 말하였듯이 1700년대에 나온 한글본 성년광익성경직해광익에는 ?스딩이라고 되어 있지 아오스딩이라고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문제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름들을 나열하며 문제의 초점을 엉뚱하게 끌고 간 것이다.

 

  ⟨성교감략의 경우에는 더 재미있다. 김학렬 신부님 제시한 위의 글에도 나와있듯이 1883년에 나온 성교감략에는 ?스딩이라고 되어 있다. 즉 그때까지도 ?스딩?스딩이었지 아오스딩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1931년에 나온 성교감략에서 변화가 생겨 민아오스딩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문제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이야기들을 하며 마치 1700년대와 1800년대에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이미 아오스딩이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혼란을 일으키며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3) 1910년판 사사성경에서도 아오스딩이라고 하지 않았다.

 

  김학렬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주장도 하였다.


. 탁덕 한바오로 역주 四史聖經(1910초간 1922년판)에서도, 한바오로와 민와스딩과 같이 혼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태오 10장에서 종도를 간택할 때도, 그 이름을 다 현대적 철자법으로 쓰고 있다.”

 

  그리하여 김학렬 신부님은 마치 1910년에 발간된 사사성경에도 한바오로?스딩이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0년에 나온 사사성경에는 ??스딩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다 1922년에 나온 사사성경에는 ?한바오로로 변화되었을 뿐 이번에도 ?스딩은 변함없었다. 한 마디로 ?1922년판 사사성경에 가서야 바오로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스딩의 경우는 김학렬 신부님 자신이 제시한 글에도 나타나듯이 ?스딩1910년판 사사성경이나 1922년판 사사성경에서 모두 여전히 ?스딩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학렬 신부님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눈 가리고 아웅식의 속임수까지 쓰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4) 1906년에 나온 보감아오스딩이 나온다고 하여 성교요지가 이벽의 글이 되고, 필사자가 정규하 신부님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필자가 책에서 아오스딩문제를 거론한 데에는 그 대전제가 있었다. 용어 문제로 보나 내용 문제로 보나 성교요지는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에 쓴 글이라는 것이 그 대전제인 것이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은 여기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십계명가가 철저하게 개신교식 십계명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벽전유한당 언행실록의 문제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단순히 아오스딩의 철자법의 변천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경향신문의 별지 부록으로 발간된 보감 (1906) 은 처음부터 현대적인 풀어쓰기를 하고 있어, p. 6 에서만 아오스딩과 그레고리오를 9회나 현대적 표기법으로 풀어서 쓰고 있다.”

 

  물론 김학렬 신부님의 지적대로 1906년에 나온 보감아오스딩그레고리오란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작년 필자의 책이 나온 직후에 열린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움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이다. 그런 표현을 쓴 것은 파리외방선교회 삐숑(송세흥) 신부님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필자가 제시하였던 대전제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즉 소위 이벽이 썼다고 하는 성교요지에는 이벽이 살아있을 때는 물론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도 쓸 수 없는 개신교 용어와 코미디 수준의 성경 내용들,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성경 내용과도 전혀 맞지 않고 가장 기초적인 천주교 교리 내용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어 그것은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개신교 성서들을 대충 보고 마치 천주교 신자가 쓴 것처럼 지어낸 글이라는 대전제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십계명가, 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등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1906년에 나온 보감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이 나온다면 천주교 신자가 필사한 것처럼 위장하여 한글본 성교요지등과 같은 거짓 글들을 지어낸 시기가 조금 더 앞당겨져서 1906년 이후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아울러 1906년에 나온 보감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이 나온다 하더라도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된 시기가 “1920~193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결국 한글본 성교요지등이 쓰여진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1906~1930이거나 아오스딩으로 완전히 정착한 이후라고 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1906년에 나온 보감에서 빠리외방선교회 프랑스 신부가 쓴 글에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용어들이 나올 뿐만 아니라 거의 코미디 수준의 내용으로 가득찬 한글본 성교요지가 이벽이 쓴 글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성교요지를 이벽이 썼다고 되어있는 ?이벽전?과 칠거지악에 의거하여 아내를 쫓아내라라고 가르치는 ?유한당 언행실록?이 초기 교회 신자나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가 쓴 글일 수가 없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고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만 집착하여 본질을 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보았듯이 엉뚱한 것들을 증거라고 제시하면서 마치 1700년대와 1800년대에 이미 천주교에서 아오스딩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착각하게 하였다.

 

  김학렬 신부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그 시기를 끌어올리려고 하였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존에 자신과 천진암성지에서 주장했던 대로 성교요지는 이벽이 쓴 것이며, 이벽전역시 박해시기의 천주교 신자가 쓴 것이고, 유한당 언행실록은 이벽의 부인이 쓴 것이라는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김학렬 신부님은 심지어 이런 주장까지 하였다.


교회사의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대의 기준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과 관련하여서, 우리들이 자주 착각하는 오류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시대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은 신앙초기의 열성으로 천주교를 찾고자하던 분들이었지, 지금의 박사들(?)과 같이 많은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따로 배워서 완벽한 지식을 갖춘 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부족한 신앙지식으로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은 그동안 이벽에 대해서 김학렬 신부님을 비롯하여 성교요지를 이벽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벽전은 이벽에 대해 증언한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의 글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의 입장을 스스로 번복하고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그들은 이벽이 1779년 강학 이전에 이미 천주교에 대해 모든 것을 터득하여 성교요지를 짓고 그것을 동료 학자들에게 나누어줬을 뿐만 아니라 1779년 강학에서는 권철신 같은 대학자들을 설득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하였던 대학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성교요지에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너무도 풍부하여 한반도 5천년 역사에서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벽밖에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만일 성교요지를 누군가 거짓으로 장난삼아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벽 선생보다도, 정약용보다도 훨씬 더 박학하고 위대한 학자이며, 신앙인이고, 신학자라고 주장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역설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은 신앙초기의 열성으로 천주교를 찾고자하던 분들이었지, 지금의 박사들(?)과 같이 많은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따로 배워서 완벽한 지식을 갖춘 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시대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부족한 신앙지식으로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감안해야 한다고 하며 필자를 비판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김학렬 신부님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성교요지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성경 내용과 천주교 교리에도 안 맞는 엉터리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는 필자의 분석과 주장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 나아가 그동안 성교요지등이 진짜 이벽이 쓴 글이고 진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쓴 글이라고 주장하며 온갖 학설들을 만들어냈던 자신들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은 이벽을 비롯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명예를 모욕하는 것이다. 이미 필자가 책에서 자세하게 말하였듯이, 이벽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는 그 오래 전부터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을 통해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등과 같은 천주교 서적들이 우리나라 지식층에게 많이 전해져서 많이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었다. 그래서 성호 이익 같은 지식인들은 그런 책과 천주교에 대한 논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성호 이익조차도 천주실의, 칠극등에 나온 천주교와 예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성경과 교리 내용을 천주교식 한자 용어를 이용해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천주가 크게 자비를 베풀어 친히 세상을 구하러 오시니 동정녀를 어머니로 택하고 인간과 아무런 교감없이 모태를 빌어 여덕아국에 강생하셨으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라고 아주 간단명료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필자의 책, 227)

 

  그런데 어려서부터 그토록 수많은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고 천주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여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하였다는 이벽은 어찌하여 성교요지에서 천주교에서는 쓴 적이 없는 개신교 용어들을, 그것도 자신이 죽고나서도 30년도 더 흐른 후에 중국 개신교에서 등장한, 그리고 자신이 죽고나서도 100년 후에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성서 한자 용어들을 무수히 썼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성호 이익도 쓴 천주님의 섭리라든가 동정녀라는 표현은 일체 쓰지 않은 채 한문본 성교요지에서는 슬씨의 처인 어머니가 꿈속에서 감도하심으로 인연을 만나 갑자기 사내아이를 낳으셨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예수님의 어머니가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아이를 낳은 것처럼 말하였단 말인가!

 

  더 나아가 한글본 성교요지에서는 어머니란 표현도 없이 실씨 부인이 홀연 몽중에 홀로 회임하시니 한 아들 얻으시도다라고 함으로써 누구의 자식을 회임한 것인지 알 수 없게 써놓았음으로써 성령으로 회임하거나 천주의 아들을 회임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홀로 꿈꾸다가 회임을 한 것이라고 하여 마치 실씨 부인이 요술을 부린 것처럼 해놓았단 말인가!

 

  요컨대 무슨 대단히 낯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실수를 해서 써놓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용처럼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성호 이익조차 정확하게 아는 천주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조차 엉터리로 써놓았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성교요지에서는 천주교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성경 내용이자 교리 내용인 원죄세례에 대해서도 너무나 엉뚱하게 말하였다.

 

  그런데도 어쩌자고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는 성교요지를 온갖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이벽이 썼다고 끝까지 주장한단 말인가!! 이것이 진정 이벽을 위하는 일이며 초기 교회 신자들을 위하는 일인가! 이제 그만 이벽과 초기 교회 신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을 그만두길 바란다.

 

  만일 김학렬 신부님 등이 주장하듯이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는 성교요지를 정말로 이벽이 썼다면 진실로 이벽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 이벽은 천주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동안 김학렬 신부님 등이 주장한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학렬 신부님을 비롯하여 성교요지가 이벽이 쓴 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이벽은 5세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15세가 되기 전에 이미 천학에 대한 책들을 모두 통달하여 당대의 많은 선비들을 굴복시켰고, 1778년에는 홍대용에게서 천학초함을 전해받고 큰 깨달음을 얻어 성교요지를 지을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신앙과 지식이 대단하였으며, 1년 뒤인 1779년에 강학이 열렸을 때는 눈 속을 헤치고 달려가서는 권철신 같은 대학자와 강학에 모인 젊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천주교로 인도하였으며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성교요지유한당 언행실록등에 나오는 내용대로 라면, 이벽은 예수님과 천주교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전혀 제대로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천주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님의 탄생과 원죄가 무엇인지조차 전혀 알지 못 한 채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이 된다. 그 내용대로라면 이벽이 받아들인 종교는 천주교가 아닌 전혀 엉뚱한 종교가 된다. 천주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이벽교이고 이벽은 그 종교의 창립 성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학렬 신부님은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이벽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기를 바란다.

 

  김학렬 신부님이 이런 말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한글본 성교요지등을 필사한 사람이 1900년을 전후하여 살았던 정규하 신부라는 것을 되풀이해서 주장하기 위해서 이다. 즉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에 필사자로 나오는 정아오스딩유한당 언행실록의 필사자로 나오는 정아우스딩이 바로 우리나라 다섯 번째 방인 사제인 정규하 신부님이라는 것이다

 

대안; [니벽전]에서는 뎡유 뎡아오스딩셔우등셔졍이라하였고, [유한당언행실록]에서는, ‘경자납월 뎡아우스딩 셔우슈표라 하였고, [한글본 성교요지]에서는 임신년 뎡아오스딩 등셔우약현셔실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본들은 용지의 통용시기와 간지의 기록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900년대를 전후로 한 1897정유년에 [니벽전]을 필사하고, 1900경자년에 [유한당 언행실록], 1932임신년에 한글본 [성교요지]를 필사하였다고 여겨진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과 이벽 성조에 대하여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신학교 역사교과서 참조), 초기교회의 역사적인 사실을 잘 알고는 있었으나, 모두 다 배교자로 여기는 교회내의 분위기 속에서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를 살았던, 정규하(1863 - 1943) 신부를 필사자로 추정하여 볼 수 있겠다. 정규하 신부는 자신이 쓴 영세대장 등에서 와스딩이라고 자신의 본명을 쓰면서도, 라틴어의 S. Augustinus를 알고 있었기에 [유한당 언행실록]에서는 무의식 중에 아우스딩이라고(라틴어의 발음을 모르면서 아우스딩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표현했으리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규하 신부님이 라틴어를 알았기 때문에 유한당 언행실록에서는 아우스딩이라고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라틴어에서는 아오스딩을 아우구스띠누스라고 한다. 따라서 정규하 신부님이 라틴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라틴어 발음대로 표기했다면 적어도 아우스딩이 아닌 아우구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김학렬 신부님의 이런 주장은 결국 정규하 신부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미 필자가 책에서 말하였듯이, 가장 기본적인 성서 내용이나 천주교의 교리와도 맞지 않는 허접한 내용들을 이벽이 썼다고 되어 있는 한글본 성교요지와 칠거지악에 근거하여 아내를 쫓아내라고 되어 있는 유한당 언행실록을 이벽의 부인이 썼다고 되어 있는 이런 글들을 정규하 신부님이 정성스럽게 베껴썼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되며 정규하 신부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필자의 책, 294~295)


5) 개신교 세례명이라고 제시한 若瑟(약슬)”보록은 철저한 천주교식 세례명이다.

 

  김학렬 신부님은 한글본 성교요지가 이벽이 쓴 것이며 이벽전유한당 언행실록등도 진짜 천주교 자료일 뿐만 아니라 그런 자료들을 정규하 신부님이 필사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하기 위해 또 다른 억지 주장들을 하였다. 정규하 신부님이 살았던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증거 중에 하나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32번째로 서품된 이 若瑟(1895-1961) 요셉 신부는 1919년에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로서 서품을 받았다. 75번째 송남호 요셉 신부(?)若瑟이란 필명으로 [소주교의 수기문](1835.10.20에 서거한지 100주년을 맞아) 가톨릭 청년 19359월호와 10월호에 번역하여 발표하고 있다....(중략)...1900년대를 전후하여서, (즉 만천유고 등에 관한 문헌들이 필사되던 시기에도) 천주교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개신교의 용어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중략) 이는 당시의 우리 신부님들이 열교라고 부르는 개신교의 성경을 읽어 참고하였을 리는 만무하고, 용어들이 변화하여 가는 과정에서 개신교의 용어와 같은 것들도 천주교회에서 사용하였던 결과라고 판단된다. 오히려 개신교의 성경이 천주교의 성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개신교식 필명으로 글을 썼던 여러 신부들이 열교(개신교)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를 두고 논자의 추정대로라면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열교의 신자들이 가짜 세례명(피득, 약슬, 보록)으로 위장하고 신학교에 들어와 신부가 되었고, 또 사기를 치기 위하여 [가톨릭 청년] 등에 글을 썼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학렬 신부님이 개신교식 세례명이자 가짜 세례명이라고 제시한 若瑟(약슬)”보록은 개신교식 세례명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천주교 용어이다!

 

  필자가 이미 책에서도 자세하게 밝혔지만 원래 천주교에서는 요셉을 한자로 若瑟(약슬)”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約瑟(약슬)”이라고 하였다. (필자의 책, 214). 그러니까 김학렬 신부님이 천주교 신부들 중에 개신교식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며 그 사례로 제시한 이 若瑟 신부와 宋 若瑟은 모두 철저하게 천주교식 한자 세례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엉터리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보록역시 마찬가지이다. “보록도 개신교 용어가 아니라 철저하게 천주교 용어이다.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간 후 바오로를 한자로 ?祿(보록)” 혹은 保祿(보록)”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한문본 성경직해에서는 ?祿(보록)”이라고 하고 성경광익과 한문본 성년광익에서는 保祿(보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책을 통해 이를 접한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그것을 우리말로 ?라고 하였다. 그것은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처음부터 바오로를 다르게 표현하였다. 중국 개신교 성서에서는 바오로를 保羅(보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인 이수정이 최초로 쓴 개신교 한문현토 성서 신약성서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를 한자로 播羅(파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초창기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바오로를 한글로 보라혹은 바울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점차 보라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바오로에 대한 천주교의 한자 표현과 개신교의 한자 표현이 전혀 달라 천주교에서는 바오로를 한자로 ?祿(보록)” 혹은 保祿(보록)”이라고 하였는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제대로 알지도 못 하고 보록이 개신교식 세례명이라고 하면서 엉뚱한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엉터리 사례를 근거로 우리나라 다섯 번째 방인 사제인 정규하 신부님이 살았던 1900년대를 전후하여 천주교에서 자유롭게 개신교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그 결과 성교요지에 개신교 용어들이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마치 우리나라 천주교 신부들이 그런 개신교 세례명을 가진 것으로 볼 때, 개신교 성서에서 그런 용어들이 생긴 것이 마치 천주교의 성경 때문인 것처럼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이런 주장 역시 전혀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


6) 천주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나자렛이라고 한다.


   김학렬 신부님이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주장한 것은 그밖에도 또 있다. 그 대표적이 예가 바로 나사렛이다. 김학렬 신부님은 1900년대를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또 다른 예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략)...1900년대를 전후하여서, (즉 만천유고 등에 관한 문헌들이 필사되던 시기에도) 천주교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개신교의 용어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성년광익, p. 469 나자릣 => 나사렛, 가톨릭청년 1933. 10월호 p. 15, 17. =빠리 외방선교회 송세흥 신부의 글).”

 

  그러니까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에 따르면, 초기 교회 때부터 천주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자렛나자릣이라고 하였는데 1933년에 발표된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의 글에서는 그것을 개신교식으로 나사렛이라고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볼 때 천주교에서 이미 1900년대를 전후해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은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물론 1933년에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가톨릭청년에 쓴 글에 나사렛이란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 나온 나사렛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자렛혹은 나자릣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이 글에서 1836129일에 모방 신부님이 쓴 편지를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런데 그 편지에 이승훈이 북경에 갔을 때 프랑스 인() “나사렛회신부를 만났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자로 된 부분은 한글 토를 달아 소개하고자 한다.


李氏(이씨)北京佛國人(북경불국인) 예수()聖堂(성당)에 차저가서 글니슬랭 佛國人(불국인) 나사렛()神父(신부)訪問(방문)하고....”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나사렛이란 예수님이 어릴 때 살았던 마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선교단 라자로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나사렛회라고 잘못 쓴 것이다. “라자로회의 정식 명칭은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이다. 그런데 그 수도회가 프랑스 빠리에서 성 라자로 마을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라자로회(Les Lazaristes)”라고 별칭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 모방 신부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프랑스 라자로회 신부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번역하면서 나사렛회 신부라고 번역한 것이다.


“Ly entra dans l'Eglise des R.R.p.p. Jésuites Français, alors gouvernée par les R.R.p.p. Lazaristes français.....”

 

  한 마디로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예수님이 어렸을 때 살았던 마을 나자렛이 아니라 라자로나사렛이라고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프랑스어를 잘못 읽은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가톨릭청년에 쓴 같은 글에서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드 그라몽 신부혹은 드 그람몽 신부 그람몽 신부라고 잘못 읽은 적도 있다. 더욱이 그 옆 괄호 속에 프랑스어까지 첨부해서 말이다. 데 그람몽 신부(P. de Grammont)”라고 하였다. 이렇듯 송세흠(삐숑) 신부님이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까지 첨부해 놓고 그것을 데 그람몽 신부(P. de Grammont)”라고 읽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1906년에 보감에서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을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천주교에서는 아오스딩이라고 하지 않고 ?스딩이라고 썼다. 그런데도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아오스딩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한동안 천주교에서는 아오스딩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두고 1906년부터 ?스딩아오스딩이 혼용되어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설령 그것을 변화된 사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설명했듯이 문제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나사렛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잘못 번역한 내용을 김학렬 신부님은 제대로 파악도 하지 않은 채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자란 마을을 나자릣이라고 하였는데 1933년에 송세흥(삐숑) 신부는 나사렛이라고 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1900년대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물론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잘못 번역한 나사렛이란 용어는 개신교식 표현이다.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그 초기부터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자렛을 한자로 納?肋(납잡륵)이라고 하였다 그것의 중국어 발음은 ?nazalei? 혹은 ?nazale?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천주교회에서는 그것을 한글로 쓸 때 나자릐혹은 나자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전통이 이어져 나자렛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자란 마을을 한자로 아주 다르게 표현하였다. “拿撒勒(나살륵)” 혹은 拏撒勒(나살륵)”이라고 하였다. 그것의 중국어 발음은 ?nasale?이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초기 개신교에서는 나사렛이라고 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나사렛이라고 한다.

 

  그런데 1933년에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가톨릭청년에 쓴 글에서 이 개신교 용어인 나사렛이란 말을 썼던 것이다. 그것도 용어를 착각하여 잘못 번역하면서 그런 개신교 용어를 썼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하였듯이 천주교회에서는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나자렛이라고 한다. 그것이 천주교의 변함없는 전통이다. 그런데 왜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1933년에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개신교 용어인 나사렛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며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근거로 1900년대 천주교에서 자유롭게 개신교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그런 억지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1900년대 전후를 살았던 정규하 신부님이 개신교 용어들이 등장하는 한글본 성교요지등을 필사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7) 유빠치피코 신부님은 빠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아니라 이탈리아계 교구 신부이다.


   김학렬 신부님의 오류는 그것만이 아니다. 김학렬 신부님은 이런 말도 하면서 필자를 비판하였다.


논자는 인명과 지명에서 개신교 성경의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짜이며 사기라고 표현하였다.(p. 62- )...(중략)...

대안; 중국어의 성경과 기도문에서 인명과 지명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중국 북부의 예수회의 번역에서는 예수와 아멘이라고 하였으나, 중국 남부의 파리외방선교회의 구역에서는 이를 여수와 아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유 빠치피코 신부의 성모경은 아래와 같다.

Da una lettera cinese del P. Pacifico Ju, L‘Ave Maria in Coreana.’

<야우 마리아, 만피 에라지아쟈, 쥬여이?어 녀즁이위찬미, ??여수, 병위찬미,

(亞物 瑪利亞, 滿被 額辣濟亞者, 主與爾偕焉 女中爾爲讚美, 爾胎子耶蘇, ?爲讚美,

텬쥬셩모마리아, 위아등죄인, 금긔텬주, (?)아등사후 아믄.>

天主聖母瑪利亞, 爲我等罪人, 今祈天主, 及我等死候 阿們.)

우리말로 아멘과 아믄을 중국어로 표기함에 있어, 처음 라명견 역본에서는 亞明이라 하였고, 이마두 역본에서는 亞孟이라 하였다. 영국 Cambridge 대학에 있는 Jean Basset 신부의 필사본에서는 아직도 亞孟이라고 하였으나, 로마Casanatese 도서관에 있는 Jean Basset의 필사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필레몬서 25절 등에 이르는 말미에서 阿孟이라고 표기하였고, 이후 개신교의 모리슨 역(1823)에서는 口亞口門이라 하였고, 유 빠치피코 신부는 阿們이라 함으로써 아멘의 중국어 표기가 꾸준히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은 여기에서도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다.

우선, 김학렬 신부님은 중국 북부의 예수회의 번역에서는 예수와 아멘이라고 하였으나 중국 남부의 파리외방선교회의 구역에서는 이를 여수아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그 사례로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유빠치피코 신부님은 예수회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가 아니다. 유 신부님은 중국인으로서 이탈리아계 선교사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교구 신부이다. 그것도 중국 남부가 아니라 중국 북부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대목구 소속이었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마치 유빠치피코 신부님이 빠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것처럼 말하였던 것이다.

 

  만일 유빠치피코 신부님이 빠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였다면 우리나라 초대 대목구장 소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하려 할 때 생겼던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유빠치피코 신부님이 모방 신부님에게 쫓겨 자신의 대목구로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학렬 신부님은 논리적으로도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윗글에 나오듯이 김학렬 신부님은 중국어의 성경과 기도문에서 인명과 지명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북부의 예수회의 번역에서는 예수와 아멘이라고 하였으나, 중국 남부의 파리외방선교회의 구역에서는 이를 여수와 아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예수아멘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말이다. 즉 한글이다. 결코 중국어도 한자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여수아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글로 된 예수아멘”, “여수아믄등이 어떻게 중국어의 성경과 기도문에서 인명과 지명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최소한


  “예수아멘”, “여수아믄의 중국어 표기를 제시해놓은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국어 표기도 제시하지 않은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대로 라면 결국 중국보다 우리나라에 먼저 천주교가 보급되어 그 결과 우리나라 말에 따라 중국어 성경과 기도문 용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용어들을 다시 각 수도회가 채택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김학렬 신부님이 제시한 소위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에도 문제가 있다. 그 성모경에는 김학렬 신부님 자신이 앞에서 한 주장을 뒤엎는 내용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김학렬 신부님은 예수회 구역에서는 예수란 말을 쓰고, 빠리외방전교회 구역에서는 아믄이란 말을 썼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미 지적하였듯이 예수아믄은 어디까지나 한글이지 중국어 표기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의 중국어 표기는 耶蘇(야소)”이다. “아믄은 한글로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말도 중국말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중국어 표기인 한자로 표현하자면 阿們(아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중국식 발음은 ?yamen?이다. 그런데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을 보면 耶蘇(야소)”阿們(아문)”이 모두 등장한다. 즉 김학렬 신부님의 말과는 달리 소위 예수회 구역에서 쓰는 말과 빠리외방전교회 구역에서 쓰는 말이 모두 등장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은 김학렬 신부님 자신이 주장한 내용을 뒤엎는 사례인 것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앞뒤가 안 맞는 사례를 가지고 필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김학렬 신부님은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을 제시하면서 그 밑에 다음과 같이 이탈리아어로 된 대단히 긴 각주를 달았는데 그 내용도 문제이다.


유 파치피코 신부의 편지, 홍콩 1847619(최승룡신부 제공)- 'Dopo il mio ritorno dalla Corea, all'anno 1839 i cristiani venisero scoperti; un vescovo e due missionari Europei furono presi e massacrati, due cento e piu' fedeli perdettero la vita, diversi in poi la persecuzione ha continuato, ogni anno abbiamo dei martiri. Anno dopo venne catturato un missionario di cognome Kao, che meco entro' nella Corea chierico, ed ordinato sacerdote vi entro' di nuovo, con cui furono presi otto cristiani, tutti furono versi? ancora in carcere. Appena giunte le tre navi da guerra francesi vennero martirizzati. Il vescovo coll'ammiraglio finissero un ultimatum al Re della Corea, nell quale concludevano, che il seguente anno ritornerebbero a prendere la risposta.' ; 主敎 類斯田 准, 揀言要理, 1873 增刊, p. 2.”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 각주를 보면 그 내용이 마치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이나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 속에 드러난 문제를 뒷받침해주는 내용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각주 내용은 김학렬 신부님의 주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을 풀이한 내용이거나 그 안에 들어있는 문제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주 엉뚱한 내용이다.

 

  김학렬 신부님이 붙인 이탈리아어 각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유빠치피코 신부님이 자신이 조선을 떠나온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프랑스 군함 3척이 와서 조선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다음 해 답을 받으러 오겠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마치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과 관련이 있는 대단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처럼 그런 각주를 달았던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김학렬 신부님의 이런 이탈리어 각주까지 달면서 역설했던 주장은 필자가 책에서 주장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세 종류의 성교요지에서 성서에 나오는 인명지명들 중에 많은 것들이 천주교 성경과 초기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이 썼던 용어들이 아니고 개신교 성서와 개신교 신자들이 쓰는 용어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 사례들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도표로까지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같은 천주교 서적 안에서도 성서에 나오는 인명지명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그 사례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것은 개신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차이와 변화가 있어도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들과 박해시기까지의 우리나라 천주교 서적들 중에서 개신교 용어를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였고 그 사례들을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중국어의 성경과 기도문에서 인명과 지명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고 하면서 마치 자신이 처음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처럼 말하였다. 더욱이 김학렬 신부님은 아멘의 중국어 표기 용례들을 제시하였지만 그것은 필자가 문제 삼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한 마디로 필자가 문제 삼은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과 사실도 아닌 것들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앞뒤도 안 맞는 엉뚱한 주장을 하며 필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김학렬 신부님이 제시한 아멘의 중국어 표기의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필자의 논지를 오히려 더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선, 김학렬 신부님은 중국 남부의 파리외방전교회 구역에서는 아멘아믄이라고 표기했다고 하면서 엉뚱하게 유빠치피코 신부님의 성모경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Jean Basset(쟝 바쎄) 신부님은 빠리외방전교회 소속이다. 그러나 김학렬 신부님이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빠리외방전교회 Jean Basset(쟝 바쎄) 신부님은 亞孟(아맹)”이나 阿孟(아맹)”이라고는 했으나 김학렬 신부님이 앞에서 주장하듯이 阿們(아문)” 혹은 아믄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한 마디로 스스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김학렬 신부님 자신이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개신교의 모리슨 역 성서에 나오는 口亞口門(아문)”이라는 한자 표현은 천주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 마디로 김학렬 신부님 자신이 제시한 사례에서 드러난 아멘의 중국어식 한자 표기 사례에서조차도 필자의 주장대로 천주교에서는 결코 개신교식 표현 방식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것이다. 비록 아멘이 필자가 문제 삼는 성교요지와 성경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나 지명도 아닌데도 말이다.

 

  이렇듯 김학렬 신부님은 도무지 처음부터 끝까지 앞뒤도 안 맞고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필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8) 1930년대에 극소수의 천주교 신부가 개신교식 용어를 썼다고 하여 성교요지가 이벽이 쓴 글이 될 수 없고 필사자가 정규하 신부님이 될 수는 없다.


   김학렬 신부님은 또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하면서 필자를 비판하였다.


반론; ...(중략)...서울 교구의 83번째 양기섭(1905-1982)베드로 신부는 [가톨릭청년]19336월에 창간되었을 때, 梁 彼得이란(성교요지 4彼得後書 참조) 필명으로 <비오 11세와 출판물>을 썼으나, 다음 호부터는 梁基涉이란 실명으로 글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88번째 김 彼得(1907-1954) 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풍천 출신으로, 11세에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후 1930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30년대에 金 彼得이란 필명으로 [가톨릭 청년]에 많은 글을 쓰며 활동하였다(19345월호에 [천국의 존재]를 시작으로, 19353,4,5,9,10월호 등). 82번째 이복영(1905 -1958) 요셉 신부는 이문근 신부의 삼촌으로서, 수원 (북수동) 본당신부로 사목하다가 선종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은 어디로]란 제목의 가톨릭청년 19358월호 글에서, ‘예호아(天主)의 간선하신 백성 유태민족(猶太民族) 구세주 예수를 학살한 죄벌로 말미암아.. 유태인으로 표현하고 있어, 1900년대를 전후하여서, (즉 만천유고 등에 관한 문헌들이 필사되던 시기에도) 천주교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개신교의 용어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성년광익, p. 469 나자릣 => 나사렛, 가톨릭청년 1933. 10월호 p. 15, 17. =빠리 외방선교회 송세흥 신부의 글). 이는 당시의 우리 신부님들이 열교라고 부르는 개신교의 성경을 읽어 참고하였을 리는 만무하고, 용어들이 변화하여 가는 과정에서 개신교의 용어와 같은 것들도 천주교회에서 사용하였던 결과라고 판단된다. 오히려 개신교의 성경이 천주교의 성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개신교식 필명으로 글을 썼던 여러 신부들이 열교(개신교)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를 두고 논자의 추정대로라면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열교의 신자들이 가짜 세례명(피득, 약슬, 보록)으로 위장하고 신학교에 들어와 신부가 되었고, 또 사기를 치기 위하여 [가톨릭 청년] 등에 글을 썼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미 필자의 책에서도 자세하게 소개했지만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물론 우리나라 천주교회에서도 그 초기부터 박해시기까지 베드로를 한자로 피득이라고 한 적이 없다. “伯鐸羅(백탁라)” 혹은 伯多祿(백다록)‘이라고 하였다. (필자의 책, 442)

 

  그런데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한참 되던 시기인 1930년대에 두 분 신부님이 필명을 베드로의 개신교식 표현인 彼得(피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1900년대를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고 일반화해서 주장할 수는 없다.

 

  게다가 김피득 신부님은 이름 자체가 피득인데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양기섭 신부님은 필명으로 딱 한 번 피득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더욱이 이복영 신부님이 쓴 글은 시오니즘에 대한 논문식 글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상황과 글의 내용으로 보아 일본 논문을 많이 차용하여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 논문 속에 나오는 개신교식 용어들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더욱이 이복영 신부님이 쓴 예호아란 용어도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초기 개신교 성서에서는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耶和華(야화화)”를 우리식으로 그대로 읽어 야화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다 나중에 여호와라고 고쳐서 사용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그것을 우리말로 예호아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이복영 신부님은 이런 정체불명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 개신교에서는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한자 耶和華(야화화)를 일본어로는 エホバ (에호바)”라고 읽는다.

 

  어떻든 이렇게 이복영 신부님이 여호아예호아든 이런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사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책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듯이,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천주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사용했어도 하느님의 이름인 “YHWH”를 함부로 부르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말로 야훼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1958년이다. 그 전에는 공식적으로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다.


   따라서 이복영 신부님이 하느님의 이름을, 그것도 개신교풍의 표현인 예호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 역시 이복영 신부님이 일본 논문에 나온 내용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본 논문에 나오는 개신교풍의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이복영 신부님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또한 천주교 신자들이 예호아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옆에 괄호에다 그것이 천주를 가리킨다는 것을 부연 설명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근거로 “1900년대를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고 일반화해서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은 이런 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근거로 개신교 용어들이 나오는 한글본 성교요지등을 1900년대를 전후해서 살았던 정규하 신부님이 필사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심지어 김학렬 신부님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펼치며 천주교 성서에서 이미 먼저 개신교식 용어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천주교 신부들이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였던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영향을 받아 개신교에서도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게 된 것처럼 주장하였던 것이다.


9) 설령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번역 성경이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의 중국어 번역 성서와 용어와 내용이 같다 해도 ?성교요지?가 이벽이 쓴 글이 될 수는 없다

 

   김학렬 신부님은 이런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근거로 처음으로 개신교 중국어 성서를 번역한 로버트 모리슨의 사례를 들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개신교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로버트 모리슨은 개신교 목사로서, 파리외방선교회의 쟝 바쎄 신부의 백여년전 번역을 저본으로 하여, 모리슨역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1819.11.25.자 편지에서, ‘제가 처음으로 인쇄한 사도행전은 앞서 말씀드린 중국어 성경사본에 의한 것으로, 이 사본은 신실한 로마교회 선교사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육받은 어느 중국인 로마 가톨릭교인이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책을 내가 번역한 이단서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환진, 19세기와 20세기 중국어 성서, 2000, p. 51).”

 

  즉 모리슨이 파리외방전교회의 쟝 바쎄 신부님의 백여년 전 번역을 저본으로 하여 개신교 성경인 모리슨역을 출판하였고, 그래서 그 내용과 용어가 바쎄 신부님의 번역과 다를 바가 없는데 중국인 천주교 신자가 이단 서적이라고 생각하여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어 개신교 성서가 천주교 성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간 것은 천주교 선교사들보다 200여 년 후의 일이다. 따라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성서 내용을 중국어인 한자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보다 앞서 성경과 교리서적들을 어려운 중국어로 번역하여 많은 책을 출판하였던 가톨릭 선교사들의 중국어 번역 서적들을 참고하였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쟝 바쎄 신부님의 번역본을 자신의 성서 번역의 저본 중에 하나로 참고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리슨이 쟝 바쎄 신부님이 한 성경 번역을 그대로 똑같이 베껴서 중국어 개신교 성서를 출판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그리했다면 모리슨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중국어 성서 번역을 위한 성서 연구에 쏟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리슨이 쟝 바쎄 신부님이 중국어로 번역한 이른바 ?바쎄역? 성경을 본 것은 모리슨이 중국으로 출발하기 1년 전의 일이다.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기 1년 전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있던 그 필사본을 본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도착한 후 본격적으로 중국어 성서 번역을 하면서부터는 그 필사본의 내용과 라틴어 ?불가타역? 성경, 그리고 모리슨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된 개신교 성서 ?흠정역?과 그리스어(희랍어) 성서인 ?공인본?를 서로 비교해가며 연구하고 끊임없이 수정해나갔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개신교와 천주교는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개신교의 신학과 교리는 천주교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따라서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 역시 천주교 선교사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용어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교리에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모리슨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모리슨이 쓴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로마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天主 티엔추(하늘의 주님, 어쨌든 좋은 표현이다)란 말을 강요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에게 성인과 순교자 등 다른 수많은 예배 대상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이는 중국인들의 보살(菩薩) 개념과 별로 다르지 않다. 보살이란 반 신격화된 영혼들로 살아 있을 때 존경을 받았던 선한 이의 죽은 영혼을 가리킨다. 언젠가 나는 중국말로 된 가톨릭 기도서를 읽은 적이 있다. 참으로 슬펐던 것은 열심히 노력을 들이긴 했으나 비성서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기도나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 그리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그런 것들이다.”(앞의 글, 11)

 

  그래서 모리슨은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경 번역본인 이른바 바쎄역성경을 참고하긴 하였지만 그 내용을 자신이 속한 개신교의 신학과 교리에 입각한 개신교 영어 성서와도 비교해 보고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 성서와도 비교하여 개신교 신학과 교리에 입각한 성서 번역을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을 나타내는 용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모리슨이 번역한 개신교 성서에는 쟝 바쎄 신부님이 사용하였던 성서 인물과 지명과는 다른 용어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인 쟝 바쎄 신부님이 한 성경 번역를 참고로 해서 번역한 모르슨의 개신교 성서를 보고 중국인 천주교 신자가 불태운 데는 바로 이런 이유들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본적으로 당시 천주교에서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개신교 성서라는 이유만으로도 불경하게 생각하여 불태워버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모리슨이 번역한 성서에 나오는 용어들 중에는 천주교에서 쓰는 용어들과는 너무도 다른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너무도 낯설어서 더더욱 불경하다고 생각하여 불태워버렸을 가능성도 큰 것이다.

 

  사실 필자가 지금 쟝 바쎄 신부님의 ?바쎄역? 중국어 성경을 확인할 수는 없다. 쟝 바쎄 신부님은 중국어 성경 번역을 완성해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 아니라 미완성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 책으로 출간되지 못 하고 그 원본 필사본이 영국과 로마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당장 확인할 수 없다고 해도 쟝 바쎄 신부님이 한 중국어 성경 번역이 그 전후로 가톨릭 신부들이 번역한 천주교 서적에 나오는 성경 용어들과 그 전통과 맥락 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속 선교회는 다르지만 같은 프랑스계 선교사인 마이야가 쓴 성경광익성년광익에 나오는 성경 인명과 지명의 용어들이 다른 가톨릭 신부들이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교 서적에 등장하는 그런 용어들과 그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장 바쎄 신부님만이 다른 가톨릭 신부들과는 완전히 그 맥락이 다른 성경 인명과 지명 용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런 용어들을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이 그대로 똑같이 차용해서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선, 모르슨이 중국어로 번역한 개신교 성서는 이벽이 죽고나서도 30년 후에 출간된 것이어서 이벽이 볼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다. 그리고 쟝 바쎄 신부님도 이벽이 태어나기 이미 50년 전인 1707년에 사망한 상태인데다가 그의 중국어 성경 번역본은 책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서 쟝 바쎄 신부님이 죽은 지 50~70년 후에 이벽이 중국을 통해서 얻어 볼 수 있었을 가망성도 없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경 번역 필사본을 이벽이 얻어보았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달라지지 않는다.

 

  앞에서도 가정해서 말했지만, 모리슨이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번역 성경을 그대로 옮겨왔고 성경 인명과 지명까지 그대로 똑같이 차용했다면, 그것은 결국 모리슨의 중국어 번역 성서에 등장하는 성서 인명과 지명 용어들이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번역 성서에 등장하는 성경 인명과 지명이 똑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벽이 그런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서 번역 필사본을 기적적으로 입수해서 보게 되었고, 다른 천주교 신부들이 쓴 천주교 서적의 성경 인명과 지명들을 일체 무시한 채 그 필사본에 나오는 성경 인명과 지명 용어들만 채택해서 성교요지를 썼다면, 당연히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명과 지명이 그 필사본에 등장하는 성경 인명과 지명과 똑같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명과 지명 용어들은 모르슨이 번역한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 등장하는 성서 인명과 지명과 똑같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명과 지명 용어들은 모리슨역 개신교 성서 인명이나 지명의 용어들과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성교요지에서는 베드로를 한자로 彼得(피득)”이라고 했지만 모르슨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서는 彼多羅(피다라)”라고 했다. 그리고 성교요지에서는 이스라엘을 한자로 以色列(이색열)”이라고 했지만 모르슨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서는 以色耳以勒(이색이이륵)”이라고 하였다.

 

  요셉도 성교요지에서는 한자로 ()”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모르슨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서는 若色弗(약색불)”이라고 하기도 하고 若西(약서)”라고도 했으며, “若色(약색)”이라고도 했다. 헤로데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교요지에서는 헤로데를 한자로 希律(희률)”이라고 했지만 모르슨 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서는 希羅得(희라득)”이라고 하였다.

 

  노아도 성교요지에서는 ?亞(나아)”라고 했지만 모리슨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서는 다른 한자로 ?+妥亞(나아)”라고 하였다. 아벨도 성교요지에서는 亞伯(아백)”이라고 했지만 모르슨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서는 亞比利(아비리)”라고 하였다. (한미경, 초기 한국성서와 중국성서의 인명 비교연구, 319~340).

                

성교요지와 모르슨역에 나오는 성서 인명과 지명 비교

성교요지

모리슨역

베드로

彼得(피득)

彼多羅(피다라)

이스라엘

以色列(이색열)

以色耳以勒(이색이이륵)

요셉

()

若色弗(약색불)/若西(약서)/

若色(약색)

헤로데

希律(희률)

希羅得(희라득)

노아

?亞(나아)

?+妥亞(나아)

아벨

亞伯(아백)

亞比利(아비리)

 

  한 마디로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물과 지명들의 한자 용어는 거의 대부분이 모르슨역 중국어 개신교 성서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결국 모르슨이 저본으로 썼던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경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들의 용어와도 거의 대부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물과 지명들의 용어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다른 한문 천주교 서적이나 기도문은 물론 초기 천주교들이 쓰던 한글 천주교 서적이나 기도서에 나오는 성서 용어와 지명과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경 필사본에 나오는 용어나 그것을 그대로 베껴썼다는 모리슨역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용어들과도 거의 대부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물과 지명들은 모리슨역 중국어 성서들보다도 훨씬 뒤에 나온 대표역본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용어들이다. 즉 이벽이 세상을 떠나고나서도 거의 80년이 지난 후에 출간된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용어들인 것이다. 그런 중국 개신교 성서들이 그로부터 20년 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이벽이 죽은 지 거의 100년 후에 그런 중국 개신교 성서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필자의 책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에서는 국적이나 교파에 따라 개신교 선교사들의 성서 번역 내용과 용어들이 차이가 났다. 그리고 모리슨역 이후에 나온 대표역본 중국어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인물과 지명의 용어들은 모리슨역 중국어 성서에 나오는 것들과 다른 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개신교 성서들은 모리슨역 이후에 나온 대표역본 중국어 개신교 성서들을 저본으로 해서 번역한 것들이다. 즉 이벽이 죽고나서도 80년이 지난 후에 중국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우리나라에는 이벽이 죽고나서 100년이 지난 후에 들어온 대표역본 개신교 성서를 저본으로 해서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성서 번역을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경 인물과 지명의 한자 용어들이 바로 그 대표역본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의 용어들과 똑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성교요지를 이벽이 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내용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천주교 선교사인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경 필사본이든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역 중국 개신교 성서이든간에 예수님의 탄생이나 그 밖의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들을 그토록 엉터리로 되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성서 내용은 아주 기초적인 것까지도 너무도 엉터리로 되어 있다. 성교요지에 나오는 성서 내용들은 전통적인 천주교의 가르침과도 안 맞을 뿐만 아니라 쟝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성경 필사본이나 모리슨 역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내용들과도 전혀 다른 이상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글인 것이다. 이런 성교요지를 이벽이 신앙심에 불타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성교요지는 그것이 한문본이든 한글본이든 이벽이 썼을 리도 없고 박해시기까지의 천주교 신자들이 썼을 리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성교요지에서는 그것을 이벽이 썼다고 되어 있으니 그 성교요지들은 모두 가짜이며, 더 나아가서는 개신교 성서를 대충 훑어본 사람들이 사기를 목적으로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급조해 낸 허접한 글들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벽전에서는 그 성교요지를 홍대용이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이벽이 전해받고 천주교에 대해 깊이 깨달아 쓴 후 동료들에게 나눠줬다고 되어 있으니 이벽전역시 거짓 글이고 그것 역시 사기를 목적으로 만들어낸 글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런 성교요지를 정규하 신부님이 필사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 된다. 개신교 용어와 엉터리 성서 내용으로 가득찬 이런 성교요지를 정규하 신부님이 정성스레 필사했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는가.

 

  정규하 신부님이 할 일이 없어서, 그것도 김학렬 신부님의 말에 따르면, ‘교회 내에서는 배교자로 여기는 이벽을 정규하 신부 혼자만은 이벽을 순교자라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정성을 다해 필사를 했다고 하면서, 그런 정규하 신부님이 천주교 용어들을 일일이 개신교 용어로 바꾸고, 더 나아가 가장 기초적인 성서 내용들도 완전히 코미디 수준의 엉터리 내용으로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정규하 신부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요컨대 김학렬 신부님이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1900년을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들 자유스럽게 썼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근거로 그 시기를 전후해서 살았던 정규하 신부님이 성교요지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등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말도 안 되며 근거 없는 주장인 것이다.


10) 성교요지彼得(피득)”이란 용어가 나왔다는 것은 성교요지가 이벽이 쓴 글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필자는 책에서 성교요지에 나오는 개신교 한자 용어들과 개신교 교리에 바탕을 둔 개신교식 표현들, 그리고 개신교 한글 성서 용어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박해시기까지의 천주교 용어들과 자세하게 비교 분석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친 게 있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개신교 용어를 간과한 것이다. 바로 彼得(피득)”이라는 한자 성서 용어이다.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본문 밑에 붙여진 주석에는 見彼得後書(견피득후서)”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彼得(피득)”이라는 한자 성서 용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신교 용어인 것이다. 즉 베드로를 개신교식으로 표현한 한자 용어이다. 그런데 그런 용어가 만천유고에 나오는 한문본 성교요지에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이벽이 썼다고 알려진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에 베드로를 개신교식으로 표현한 한자 용어가 들어있다는 것은 그 성교요지가 결코 이벽이 쓴 성교요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는 물론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도 쓸 수가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인 것이다. 결국 성교요지에 등장하는 개신교 용어가 또 하나 추가되고, 그 글을 이벽이 쓴 것이 아니라는 이유도 또 하나 추가된 것이다.


11) 사기치기 위해 만든 글의 원본을 필자보고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책에서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를 비롯하여 고 김양선 목사가 수집하고 기증한 소위 초기 천주교 자료라는 것들이 가짜이며 사기를 쳐서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만들어낸 글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직간접적으로 개신교 성서들을 대충 읽고 지어낸 허접한 글들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러면서 그런 글들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들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그런데 김학렬 신부님은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4. 논자는 왜 이 시기에 그런 사기극들이 많이 벌어졌을까에 대한 이유로, ‘1925. 7. 5일에 있었던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계기로, 순교자들과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1930년 이후부터는 청구학회가 발족되어 논문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여, 순교자에 대해 더욱 깊은 지식과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며, 이를 빙자한 사기를 치는 무리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고 하였다.’(p. 302-303). 논자는 사기를 쳐서 사본을 만드는 원본의 구체적인 논거는 제시하지 못한 채(!), 마치 청구학회의 글들이 이벽 성조를 순교자로 만들어내는 위작의 원본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일제강점 전략 중에 하나로 1930년에 청구학회가 설립되어 한국 역사와 천주교 역사 등에 대한 연구 논문들과 간행물들이 쏟아져 나와 이를 통해 천주교회사와 천주교 순교자들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당시 시대적 배경 중에 하나라고 설명하였지, 결코 청구학회의 글들이 이벽을 순교자로 만들어낸 위작의 원본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김학렬 신부님은 필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펼치지 않기 바란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는 책에서 위작이라고 하지 않고 사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책의 부제도 성교요지/십계명가/만천유고/이벽전/유한당 언행실록은 사기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위작이란 원본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베껴서 마치 저자가 직접 쓴 것처럼 혹은 그린 것처럼 선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그것의 원본을 운운하고 원본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교요지를 비롯하여 십계명가, 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등 고 김양선 목사가 수집하고 기증한 초기 천주교 자료들은 무슨 원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기를 쳐서 한 몫을 챙기려고 만들어낸 가짜 천주교 자료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기란 단어를 쓴 것이다.

 

  그러니 필자에게 원본을 찾아내라고 요구하지 말고, 이벽이 정말로 성교요지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원본을 찾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 교회 때부터 고 김양선 목사가 가짜 천주교 자료들을 기증할 때까지 한 번도 이벽이 그런 글을 썼다는 기록이나 전승 혹은 구전은 없었다. 그러니 그 원본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보고 그 원본이 되는 이벽이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글을 찾지 못 했다고 비난하면서 그것을 찾지 못 하면

  〈성교요지등이 가짜가 아니라는 듯이 주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원본이 되는 이벽의 글이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글 자체가 없는데 어찌 그것을 필자보고 찾으라 한단 말인가.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억지 주장을 하지 말기 바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계속해서 이벽이 성교요지를 썼다느니, 한글본 성교요지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등을 우리나라 다섯 번째 신부인 정규하 신부님이 필사했다느니 하는 주장을 하는 것은 이벽과 초기 순교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다. 아닌 것은 깨끗하게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4. 나오는 글


   누구나 글을 쓰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글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은 필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도 않는 논리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글을 쓰며 거듭 거듭 왜곡하는 것은 연구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한 어떤 글을 인용할 때도 좀 더 정확하게 옮겨서 글을 썼으면 좋겠다. 김학렬 신부님은 [이벽전], 부친의 호가 사연이며 휘는 부만이고...”라고 말하였는데 이벽전에는 부친의 호가 아니라 ()”가 사연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는 부만이 아니라 박만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성교요지등에 관한 문제들이 모두 정확히 하지 않고 적당히 하려는 데서 일어난 것이니만큼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을 정확히 하자는 의미에서 덧붙여 쓴 것이다.

 

  고 김양선 목사가 수집하고 기증한 성교요지등은 가짜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작정하고 만들어낸 가짜 천주교 자료들이다. 더 이상 구차한 변명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말고 깨끗이 인정할 건 인정하자. 사기치려고 작정한 이들에게 고 김양선 목사도 당하고 한국천주교회의 일부 연구자들도 당했다고 깨끗이 인정하자. 그래야 빨리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한국천주교회도 빨리 그 구정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욱이 작년에 필자의 책이 나온 직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열렸던 심포지움에서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2003년경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자료들을 검토하고 성교요지이벽전등 윤 신부님의 저서에서 거론된 모든 자료를 위작이라고 결론 내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주교회의 시복시성특위에서는 이미 필자가 문제를 제기한 성교요지등이 가짜라고 오래 전에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이런 가짜 사기작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끌어안은 채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그 불명예스런 구정물에 발을 담그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수원교구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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