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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단지' 끌어안고 죽은 남자(2) - 오기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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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12-26 ㅣ No.40923

                          

'돈 단지' 끌어안고 죽은 남자(2)


   "신부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아니 아버지에게 무서운 분노와 불 붙는 적개심을 품고 자랐어요. 지금 신부님이 제 손을 잡고 제 등을 어루만지시니 처음으로 훈훈한 부정(父情)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제 신상과 제 가정의 사정을 물어 보시는 그 인자하신 음성은 가슴을 저리도록 감격하게 합니다. 신부님, 제 차가 있으니 저하고 같이 어디고 가시죠. 노늘 실컷 드라이브하며 35년 간 제가 살아 온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오늘만이라도 신부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싶어요!"


   "고맙네! 그런데 이를 어쩌지, 교구의 모든 신부들과 신학생들이 같이 새 신부님을 축하하는 파티 겸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이 일을 어쩐다지?


   "신부님! 언제든지 이리로 전보만 치세요. 제가 만사를 제쳐놓고 모시러 올게요!"


   나의 난처한 기색을 알아차린 그는 명함을 주며,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 동안 쓰세요! 아버지가 있어도 아버지 없이 자라난 몸이라 신부님을 아버지로 모시겠어요!"


   "이게 무엇인가?"


   "신부님 그대로 넣으셔요."


   "이것이 무언데!"


   나는 수상히 생각하여 펼쳐 보니 백만 원 짜리 보증수표였다. 깜짝 놀라 그럴 수는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며 도로 그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돈 보내라고 할 테니 그 때는 꼭 보내 주어야 해! 알아들었지? 내가 이렇게 늙었으니 불원간 은퇴하면 돈이 많이 들 거야. 백만 원이 문제가 아닐 거야!"


   "네, 신부님! 걱정 마세요. 이 머리통을 보세요. 그 때 신부님이 고쳐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 머리통이 썩어 벌써 죽었을거예요. 저는 이 머리통의 흉터를 보고 만질 때마다 신부님을 생각했어요. 나를 낳은 아버지는 나를 죽게 내버려 둔 매정한 아버지였지만 신부님은 저를 살려 주신 아버님 이예요. 제가 신부님을 모시겠어요. 여생이나 편히 쉬시라고요!"


   "그래라, 그래야지! 늘그막에 호강 한번 해 보자! 어서 타라!"


   나는 그를 차 안에 밀어 넣으며 단시일 내에 전보 친다는 약속을 했다.


  축하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가 준 명함을 꺼내 봤다. 그는 쟁쟁한 어느 무역회사의 회장이었다. 나는 명함을 테이블 위에 놓고 35년 전의 기막혔던 사연을 옛 추억에서 더듬어 봤다. 다만 저명한 인사요 재벌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사회적 체면 때문에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천만 유감이다.

 

 - 치마 입은 남자의 행복 중에서


        ▒ [고 오기순 신부님. 전 전주교구 부주고, 96년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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