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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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의 상처와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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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5-09-23 ㅣ No.12470

9월 23일 금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루가 9장 18-22절


“선생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50년 동안의 상처와 고통>



이탈리아 반도는 장화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그 반도의 뒤꿈치에 해당되는 곳에 ‘산 죠반니 로톤도’란 소도시가 있는데, 그곳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지요.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비오 신부님 때문에.


몇 년 전 여름, 저는 ‘산 죠반니 로톤도’에서 그리 멀리 않은 한 시골본당에 잠시 머무르면서 휴가를 떠난 주임 신부님의 ‘땜빵’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쪽 사람들의 대화는 크게 두 가지더군요. 아침에 일어나면 즉시 나누는 대화가 그 유명한 축구 이야기였습니다. 지난 밤 자기네 고장 축구팀의 경기 내용이 어땠는지? 어떤 선수가 잘했는지? 심판의 판정이 어땠는지?


그리고 나머지 다른 한 가지 주제는 ‘빠드레 비오(Padre Pio)’를 주제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곧 시성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둥, 친척 중에 누군가가 비오 신부님께 전구했더니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 자기 삼촌이 비오 신부님 살아계실 때 열흘 동안 줄서서 기다리다가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적당히 고백했다가 혼이 났다는 이야기, 다음 달에 비오 신부님 성지로 순례를 계획했다는 이야기...


지난 2002년 시성되신 비오 신부님에 대한 신심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그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Pietra-돌-이란 단어의 애칭, '작은 돌'이란 의미)의 비오 신부님은 1887년 말마디 그대로 쓸모없는 작은 돌들만 많았던 작고 가난했던 소도시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03년에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서품 9년차 때인 1918년에 비오 신부님은 예수님처럼 오상(손과 발, 옆구리 5군데의 상처)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50년간 상흔이 계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비오 신부님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교회당국에서는 비오신부님의 삶을 통제합니다. 1923년부터 몇 년간 비오 신부님은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없게 됩니다.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고, 편지에 대한 답장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사 외에 다른 모든 성무활동이 정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의 기간 동안 비오 신부님은 더욱 열심히 기도에 매진하십니다. 더욱 하느님과 일치하십니다. 철저하게도 교도권에 순명하는 모범을 보이십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리셨던 혈액의 양은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비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보십시오. 굵고 네모 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파요.”


비오 신부님은 오상을 간직한 그 50년 동안 매일처럼 십자가상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하셨습니다.


비오 신부님의 오상에 관한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그 후로 비오 신부님의 사생활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비안네 신부님 못지않은 고백소의 순교자가 되셨습니다. 대축일을 앞두고는 하루 18시간씩 고백소 안에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고백성사, 사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냥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며 앉아있어야 합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기막힌 사연들, 심각한 고민들 듣고 있노라면 에너지 소모가 대단합니다. 한 서너 시간만 고백소에 있다가 나와도 별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런데 18시간을 앉아계셨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기에 따라 달랐지만 비오 신부님에게 고백성사를 보려면 남자의 경우 5-18일, 여자의 겨우 8-35일까지 기다려야 했답니다. 때로 순서문제로 다투는 신자들의 질서를 잡기 위해 지역 경찰까지 수도원으로 출동하기도 했답니다.


비오 신부님은 이런 혹독한 상황 앞에서도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건강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밤낮으로 수백 명의 고백을 듣느라고 바쁩니다. 제게 자유시간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 힘차게 저를 받쳐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비오 신부님께서는 고해자 각자를 다르게 다루셨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팔을 펼쳐 사랑스런 아들을 맞이하듯이 인사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에도 이런 말로 작별인사를 하셨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때로 고백성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그저 호기심에 한번 찾아온 사람들, 중요한 죄를 고의적으로 빠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칠고 엄한 어조로 꾸짖으셨습니다. 때로 고백소에서 내쫒기도 하셨습니다.


간혹 부끄러움에 죄를 숨기거나 축소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시던 비오 신부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입술만 나불거리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느님을 얕본단 말입니까?”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그릇된 생활을 고치려는 의지가 아주 약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 놀랍게도 비오 신부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이 더러운 놈”


며칠 후, 그토록 모질게 쫓겨난 그 사람이 울면서 비오 신부님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비오 신부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활짝 팔을 벌리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 보시오, 이제 주님은 크게 기뻐하고 계시오.”


비오 신부님은 겸손과 순명, 기도와 보속의 성인이었습니다. 오상을 받은 이후, 50년간 매일 매일의 삶은 순교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언제나 십자가상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합치시켰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며, 아픈 가슴을 위로해주었습니다. 마치 십자가상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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