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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위그노 전쟁 유사점(類似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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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균 [shloam2003] 쪽지 캡슐

2013-04-07 ㅣ No.2048


제주4·3사건과 위그노 전쟁 유사점(類似點)
 
위그노 전쟁[ Huguenots Wars ]
16C 프랑스에서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으로 전개된 전쟁(1562-1598).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로마가톨릭(구교)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남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신교도를 위그노(Huguenot)라 불렀다.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여 종교적 영역을 넘어 정치세력화 되기 시작함에 따라 구교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러한 신구교의 정치적 갈등이 프랑스 궁정 내부문제와 국제적 문제와 겹쳐지며 결국에는 프랑스 최초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은 신구교 양진영 모두에게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당시 유럽의 악화된 경제 사정, 전염병, 국제적 갈등이 더해지면서 프랑스 국토를 심각하게 황폐화 시켰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한 폐해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정치파(politique)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탄생하게 된다. 이들은 종교를 떠나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이후 왕권 강화와 질서 회복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는 훗날 프랑스가 영토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절대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밑바탕이 된다.
 
위그노 전쟁의 구체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구교의 신교탄압은 프랑수아 1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앙리 2세로 이어지게 된다. 앙리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샤를 9세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이자 앙리 2세의 부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1519-89)가 섭정을 하게된다.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프랑스 내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가톨릭 귀족 가문인 기즈가(Les Guise)와 결탁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위그노인 나바르의 왕, 강한 가톨릭 성향의 기즈가(Les Guise), 온건가톨릭 교도인 몽모랑시 가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다 가톨릭과 위그노들의 대립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이 혼란의 와중 반신교주의 성향이 강했던 기즈 공작이 먼저 1562년 예배를 올리던 위그노들을 기습 공격하고 이를 시작으로 8차에 걸친 위그노전쟁이 시작된다.
 
가톨릭과 위그노들은 서로를 이단시하고 폭력을 가했다. 3차전까지 치른 뒤 양측은 평화협상을 벌여 합의를 이루었으나 정부가 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함에 따라 격렬한 갈등은 다시 시작된다. 결국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의 축제일(그날 카트린의 딸과 나바르 왕의 결혼식 열림)에 기즈공작과 카트린이 결탁하여 축제에 참석한 위그노 지도자들과 위그노들을 대량 학살(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한다. 이에 격분한 위그노들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고 신교와 구교의 격렬한 싸움은 재개된다.
 
하지만 샤를 9세가 사망하고 신교에 대해 다소 너그러웠던 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 했다. 이후 앙리 3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위그노의 지도자격인 나바르의 왕이 앙리 4세로 왕위에 오르게된다. 그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해결하고 혼란한 사태를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앙리 4세는 1592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화해를 도모코자 하였으며 1598년에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함으로서 36년간을 끌어오던 위그노 전쟁을 종결 시켰다. 
참조항목
기즈, 낭트칙령, 바시의 학살,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앙리 3세, 앙부아즈의 음모
역참조항목
발루아왕조, 종교전쟁, 카트린 드 메디치, 콜리니, 프랑스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 노트르담 에 생 카스토르 대성당, 잔 달브레 박물관, 노트르담 데 자코뱅 교회
[출처] 위그노 전쟁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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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
[ 濟州四三事件 ]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경비대 장교4.3 사건 당시 경비대 장교가 지도를 펴놓고 보고 있다.
 
사건의 발단
지리적 특성상 동북아 요충지인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 6만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들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데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군정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1945년, 제주도에서 철수중인 일본군 ©nara]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중 기마경찰이 탄 말의 말굽에 구경을 나온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있었고 이를 본 주변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일반주민 6명이 사망하는 ‘3·1발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전체 166개 기관단체 에서 41,211명이 참여하였고, 이중 제주출신 경찰관 66명도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casteel)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 보다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붉은섬(Red l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하였다.
 
전개과정
 
미군정에 의해 동원된 조병옥 경무부장을 중심으로 한 응원경찰과 신임 제주도 도지사 유해진의 호위병 역할을 하던 서북청년단 단원은 3·10 총파업 이후 이듬해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 개시 후 이틀 만에 200명이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2,500여명이 구금되고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중지하고,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사태를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상황이 더 악화되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중장과 군정장관 딘(Dean)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제주 4·3사건 당시 작전회의 중인 경비대 장교들 ©nara]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김달삼 사이의 ‘4·28 협상’으로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데 합의하기도 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었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 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한 채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데 이용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경비대에 명령하였고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이 강경진압으로 선회한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의 조기진압에 초점을 맞춘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재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경진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 해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와 함께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9연대 연대장 송요찬은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벌어졌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약 2만 명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 되었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다.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00여명의 주민이 총살당한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1948년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주민들©]
 
1949년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사건 사후처리 및 논란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토벌대에 처형됐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 하였다. 이들의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청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그 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2000년6월부터 시작된 사건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5,100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신고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며, 당시 희생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또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어 2008년 3월 28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에 4·3평화기념관, 위령제단 등을 갖춘 4·3평화공원을 개관하였다.
 [출처] 제주4·3사건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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