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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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어찌 버리지?(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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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osspaolo] 쪽지 캡슐

2002-09-05 ㅣ No.4007

그러나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ㅅ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루가 5,10-11)

 

 

<모든 것을 어찌 버리지?>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

아니, 그분을 정말로 따르고 싶다.

그럼에도 왜 그게 잘 안되는 것일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만> 아니면 <조금만> 버리고 그분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란 말씀인가?

 

옛말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쳐 버린다>는 속담이 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한 마리만 쫓아도 그 재빠른 녀석을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두 마리를 쫓아서는 그 결과야 뻔하지 않겠는가?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결실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선택에는 다른 한쪽의 포기가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시지 않은가!

 

오늘 복음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읽어본다.

시몬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어부였다. 고기잡는 어부였고 꽤 전문가측에 속했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부 베드로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어부는 어부이되 고기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낚는 어부가 어떻겠냐고?

베드로는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이라곤 고기잡는 일인데

그게 쉬운 일인데,

그게 잘하는 일인데

사람을 낚아 보라고...???

첨에는 자신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자신의 꼬라지를 잘 알고 하는 대답이리라.

 

그런데

자기보다 전문가도 아닌

예수가 <그물을 쳐라>는 말에

그냥 생각없이 따랐더니

자신도 놀랄 수 밖에 없는 수많은 고기가 걸려 들었으니...

예수의 이야기가 그냥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이 양반이 보통 양반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고

전문가라고 비전문가인 예수의 말을 콧방귀 뀌듯이 받아들였다면

이런 체험을 못했을 텐데,

이런 신체험을 하고 나니

한번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하였다.

 

두려움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던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는 그분의 음성은 엄청난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그래 한번 해보자>는 용기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실로 시몬은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된다.

가정과 재산, 생업을 버리고 예수를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선택은 아픔을 동반한다.

포기를 동반한다.

우리는 좋지 않아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위해 덜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은

최상급의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보물, 그보다 더 좋은 선이 없기에

다른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수많은 수도자, 성직자들이

이런 포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포기 없이 영적 경지에 도달한 성인성녀들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포기를 요청한다.

당신을 선택하기 위해 세상을 포기하라고 요청한다.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 재물을 포기하라고 요청한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그분의 말씀은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를 식별하는 것이 관건이리라.

그 답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제시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육신에 쓰고

죄를 짓는 일은 육신에 달콤합니다.>

 

자, 우리의 선택은 이제 분명하지 않은가!

내 육신의 안락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 거기에서 만족을 누리려 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내 몸이 좀더 고달퍼야 하느님이 기뻐하신다.

그것이 좋은 일이다.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시몬의 경우

물고기를 잡는 일도 고달픈 일이었을 것이다.

고급 보트를 타고 유람하며 낚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이기에 고달펐으리라.

같은 낚시지만 사람을 낚는 낚시는 고달프지만

기쁨과 보람이 있기에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오늘 용산에 있는 빈민들을 위한 식당인

<베틀레헴의 집>에 봉사를 오신 자매들에게도

다른 중요한 일이나 약속을 재쳐두고 이 봉사를 택한 것이

바로 사람낚는 어부의 선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자, 오늘 나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는가?

하루에도 수차례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때마다

육신에 고달프지만 보람과 기쁨이 되는 쪽을 택하라.

그러면 사람낚는 어부가 되리라.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을 흡족하게 맛보게 되리라.

 

나의 이러한 선택은

비단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몬의 선택은 동업자들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가!

그대의 형제, 자매,

그대의 가족 식구들,

그대의 직장 동료들이

그대의 선택에 영향을 받게 됨을 주목하라.

내가 무엇,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와 나 주변의 사람 모두가 행복과 구원, 생명과 축복의 길을 걷는가

아니면 불행과 저주, 죽음과 좌절의 길을 걷는가가 달려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주님,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당신을 떠올리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이 걸으신 그 수난의 십자가의 길을

먼저 생각케 하소서.

그리하여 내 육신에 달콤한 것을 선택하기보다

내 육신에 쓰라린 것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을 더욱 더 잘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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