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알고 있는 러시아 귀화인 박노자

스크랩 인쇄

신성자 [socho] 쪽지 캡슐

2005-02-14 ㅣ No.78951

 


약  력

레닌그라드 태생.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한국고대사로 박사학위.                 

현재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

95년 한국 여성과

한겨레21 - 칼럼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연재 ,한겨레 신문 칼럼 기고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저 서

볼코프 저, 박노자 번역, 韓國古代佛敎史,  서울대출판부, 1998

박노자 외,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겨레출판사,2001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한겨레출판사, 2002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 사상사, 2003

허동현, 박노자, 우리역사 최전선, 푸른 역사, 2003







대한민국을 사랑한 귀화인

                박노자를 이해하려면


1. 약력과 소개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Vladimir Tikhonov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의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라는 논문으로 아시아 및 아프리카 학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쳤으며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를 역임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토종 한국인보다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활발한 연구 및 강의 활동과 함께 국내 매체 기고를 통해 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이방인의 눈을 가졌으나 그의 가슴은 한국인의 것이다. 뛰어난 우리말 능력으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짚어내는 그의 글에 날카로움과 함께 항상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정서의 아우름, 그를 갖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복이다.”

                      - 홍세화 -

                                                           

  “이 자리에서는 박노자 씨와 함께 했던 짧은 여행을 중심으로 몇 마디 해볼까 한다. 명색이 책 이야기를 하고자 마련한 자리인데 저자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밝힌다는 것이 좀 무엇하지만, 여하튼 우연찮게 인연이 닿아 박노자 씨와 작년 말에 송광사로 여행을 떠난 일이 있다. 물론 단 둘은 아니었고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 몇 분과 동행했다. 박노자 씨가 송광사 강학원에서 3년 째 수행정진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의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는 형식이었다. 박노자 씨는 보조국사 지눌의 자취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송광사에 대해 각별한 느낌을 지닌 듯 했다. 그 여행 전에는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었고, 다만 전화를 통해 율곡, 퇴계 사상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다.

내려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노자 씨가 일종의 세계 시민적 보편주의랄까 그런 것에 대한 신념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민족, 국가, 인종, 계급, 성, 연령, 이런 다양한 무리지음의 범주에서 비롯되는 부당한 억압과 폭력을 무던히도 싫어하는 코스모폴리탄. 이것이 여행을 마친 뒤 내가 박노자 씨에 대해 내린 결론 아닌 결론이다.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 패거리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 이 책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외부 문화에 대한 열린 정신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지적한다. 바꾸어 말하면 세계시민적 개방성의 태도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미덕임과 동시에 가장 필요한 미덕이라는 뜻이 된다.

한편 박노자 씨는 1973년 생이다. 이제 막 나이 서른이 되는 셈인데(이른 바 만 나이로 치면 28세 혹은 29세를 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가 러시아 출신의 귀화 한국인이 아니라 본래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면, 그의 사회적 발언에 대해 이 땅의 수많은 ''어르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그 이전에 그가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을까? 머리끝에 피도 안 마른......이런 식의 반응과 마주해야 하지는 않을까? 연령을 기준으로 한 우리 사회의 억압적인 위계서열문화, 사소한 시비가 붙어도 ''너 몇 살이야? 주민등록증좀 내놔봐!'' 이런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로부터 그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박노자 씨 본인에게나 그의 발언을 책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된 독자들로서는 무척 다행이 아닐까 한다.

우리 사회의 연령에 따른 억압적인 위계서열문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박노자의 ''노''는 본래 늙은이 노였다. 그러다가 현재의 이슬 로로 바꾸었다. 박노자 씨로부터 들은 개자에 얽힌 사연인즉, ''젊은 사람이 이름으로 늙은이 행세하지 말고, 러시아의 한자 표기인 노서아(露西亞)의 로를 따서 ''노서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러시아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Vladimir Tikhonov 였다.)

한 가지 주의할 점. 박노자 씨를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 비판하는 날카로운 탐침으로만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사회비평가, 시사평론가가 아니라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야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행 중 그와 나눈 대화로 가늠해보건대 동양학 전반에 대해 해박한 식견과 방대한 문헌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동양학에 관한 한 특정 분야에만 밝은 협사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박사가 아닐까 한다.

에띠엔 라모트, 폴 드미에뷔이, 에릭 쥐르허(초기 중국 불교사 연구의 대가), 셰르바츠키(인도 철학 및 불교 논리학의 대가) 등, 20세기 서양 불교학의 대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와 나누면서, 그가 불교학에도 무척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광사 경내를 돌아보면서 그로부터 우리 사찰 건축과 문화에 대한 일종의 강의를 들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결국 그의 사회적 발언이 지닌 설득력의 기저에는, 한국의 역사, 문화, 사상에 대한 학문적인 식견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의 등에(gadfly) 역할(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회에서 자임했던) 이외에도, 한국학 연구자로서의 박노자 씨의 연구 성과가 우리말로 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구 소련 시절에 편찬된 한국사 교재가 아직까지도 러시아의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 속에서, 박노자 씨는 러시아어로 한국사 집필을 거의 마무리 지은 상태라고 한다. 우리말로도 그의 한국사 통사를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 궁리 닷 컴, 저자와의 만남



그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을 버렸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 13년. 대학, 종교, 군대, 인종주의… 대한민국 사회의 치부를 거침없이 일갈하면서 그가 선택한 이름은 박노자다.

역주를 단 책을 제외하고는 그의 첫 글모음인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박씨는 이 사회에서 금기되거나 기피되었던 이야기를 막힘없이 쏟아놓는다. 중세적 도제관계를 방불케 하는 대학사회의 교수-학생 관계에서부터, 러시아에서 명예학위를 따려고 접근하는 한국인들의 비굴한 모습까지 책이 고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초상''이다. 그러나 그 것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외부  고발''이 아니라 진정 한국을 사랑한 귀화인의 `내부고발''이어서 더욱 아프다.

박씨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의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잠시 한국에 나온 그를 25일 만났다. 그는 ꡒ한국사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ꡓ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박씨의 고향은 이제는 레닌그라드로 불리는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다. 박씨가 책의 머리에서 조금 밝혔듯이 그의 머리에 `코레야''라는 나라가 각인된 것은 고등학교 때 소련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북한 영화 <춘향전>을 보면서부터다. ꡒ사춘기였기 때문일까, 조선의 나지막한 산들, 춘향의 사랑스런 모습 등 모든 게 너무나 인상 깊었다.ꡓ 조선의 고전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던 그는 운명에 이끌리듯 레닌그라드대 조선역사학과에 진학한다.

당시 소련은 체제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또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라 젊은이들 사이에 군대와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때이기도 했다. ꡒ군인으로 아프간에 다녀온 선배들의 변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봤다. 마약을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행한 살상을 내면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국가를 절대화하고 국가에 맹종했다. 베트남전 참전군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ꡓ 한국의 군대문제에 대한 비판의식도 이런 그의 경험에서 싹튼 것일 게다.

91년 고려대에 3개월간 머물렀다. 한국에 들어올 때는 소련인이었지만 돌아갈 땐 러시아인이었다. ꡒ처음엔 옐친 정부에 대해 기대도 있었다. 자본주의화가 되면 나처럼 공부하는 사람들의 대우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곧 무너졌다. 예전에는 이발소에 가더라도 사람들이 농담하고 동지적 분위기랄까 그런 게 있었는데 불과 석달 만에 사람들이 바뀌어 있었다.ꡓ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한국 2000>을 번역하기도 하고, 지난밤 돈으로 산 러시아 아가씨들과의 일을 떠벌이는 `귀하신'' 사장님들을 안내하고, 명예학위를 구입하는 한국의 대학총장들과 원로교수들의 심부름꾼 노릇도 하고… 박씨는 공부를 끝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95년 한국여성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96년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으며 박씨는 한국사회 깊숙이 들어왔다. ꡒ`우리''라는 말이 가장 낯설었다.ꡓ 한국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학생 운동권 조차 `우리'' 문화에선 한 발자국도 앞서나가지 못했다. ꡒ자본주의와 세계적 종속을 거부하고자 했던 그들이 `식구들''의 `일심단결''을 우선시하는 가족주의적 종속의 미시담론을 절대화하고 있었던 셈ꡓ이다. ꡒ그들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더 중시했다면 그들의 반란이 훨씬 더 철저하고 강한 해방의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ꡓ

그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서구근대의 산물인 개인주의에 국한되지 않는다. ꡒ옛 선비들은 권문세가의 힘을 빌려 사는 걸 가장 부끄러워했다. 이런 개인적 자존감을 말하는 거다.ꡓ

그는 귀화과정에서도 인종차별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고 학력이 있는 이들도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들이었다. 하지만 ꡒ한국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한국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과연 한국이라는 것이 `핏줄''로만 결정되는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ꡓ

교수에서 불법노동자로 전락한 몽골인 바트자갈의 이야기를 통해 박씨는 한국인들의 서열의식에서 발동한 인종주의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폭력을 가장 거부하는 불교의 승려들이 왜 군 입대를 거부 안 하는지, 왜 말도 안 되는 `호국불교''의 이미지를 떠안고 지내는지, 종교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진다. 상아탑의 추한 모습과 민족주의의 담론이 옥죄는 한국사회까지 그의 비판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ꡒ속이 시원하다ꡓ는 말을 들어왔다. 이런 그의 글이 단순히 감정적 비난으로 읽히지 않는 건, 러시아의 추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한국에 관한 해박한 지식 및 성찰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그는 모스크바대학에서 교재로 쓰게 될 <한국사개설>을 거의 탈고했다. 또 지금의 인종차별적 의식구조를 가져온 근대초기 사회진화론의 조선 유입과정과 근대시기 불교의 움직임을 연구과제로 꼽았다.”

- 김영희 기자, 한겨레신문

 

 


 



2,825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