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2월 7일 강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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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숙 [lalee] 쪽지 캡슐

2013-02-08 ㅣ No.1890

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강정에서 보기 드문 눈발이 날립니다. 바람이 너무 불어 해상에 떠있던 20여척의 준설선이 간밤에 모두 화순 항으로 옮겨졌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다가 평화를 찾은 날입니다. 공사차량은 여전히 드나들고 누구는 나무토막을 치우고 또 누군가는 그 나무토막을 옮겨놓고 …….

1분이라도 공사가 지연될 수만 있다면 이런 일쯤은
묵묵히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강론이 조금 길었나 봅니다.경찰이 기다리지 못하고 묵주의 기도 중에 공사차량 진출입을 위해 출동하여 미사 봉헌하는 사람들을 들어내고 감금하고…….

27일 연중 4주간 목요일

양운기 (한국 순교 복자 수도회), 김성환 (예수회), 문정현 (전주교구), 현요안, 이승엽 (제주교구),
주예레미아 (성골롬반)
주례, 강론 : 현 요안

찬미예수님
23일 연수중에 어느 한 신부님은 겨울철만 되면 양말을 안 신고 샌달만을 신고 생활을 하신데요. 그 이유는 나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따뜻한 사제관 안에서 신자들에게 좋은 말씀 강론하고 신자들로부터 오는 신부님에 대한 존경심 또 사목하시느라 힘드신다며 챙겨주는 따뜻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서 전혀 삶에 문제의식을 못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나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고 미사를 정성껏 봉헌하고 있고 나는 사목 열심히 하고 있어서 나는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스스로가 자위 할 수 있고 착각 속에 살아 갈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샌달만 신고 갔을 때 환경 이 자연 환경이 주는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송곳과 같이 찌르는 추위의 그 날카로움 그 고통이 어쩌면 이런 냉엄한 사회 현실 안에서 소외된 이들 가난한 자들 정말 날씨보다도 더 우리의 영혼을 후비는 외로움들 소외감들 삶의 자존감을 상실한 무기력함과 우울함들 내가 사제로서 살아가는 것은 신자들로부터 좋은 칭찬을 얻기위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위함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십자가라는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그 죄와 폭력과 고통과 죽음이라는 절망상황속에서 바로 아버지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재창조의 구원자이심을 오롯하게 정말 내가 살아가야 되는 소명을 늘깨어 있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으로 맨발의 샌달을 신고사는 이추위가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지역사회에 이런 추위를 갖고 살아가는 많은 가난한 이들이 아직도 너무나 널부러져 있음을 잊지말자 스스로 겸손해지고 스스로 가난해 지고 스스로 그 고통이라는 절망의 장소로 예수님께서 내려가신 것처럼 사제는 내려가야 된다.

교회는 내려가야 된다. 교회는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의 시린발 소외감에 절망하는 그 마음속에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손길로 그들의 발을 따뜻한 물로 싰어줘야 하고 동상이 걸린 그 발을 피가 돌 수 있도록 마사지 해줘야 하며 정말 하느님께서 이 외로움이 아니라 이 가난과 고통 속에 함께 하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그 화해와 부활의 생명을 사제는 살아야 한다스스로가 그런 다짐을 했다는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명을 당신제자들에게 맡겨서 마을로 파견하십니다. 파견하는데 주문이 참 까다로워요. 갈 때 돈도 좀 챙기고 맹수를 만나수 있으니 맥가이버 칼도 좀 챙기고 신발이 구멍날 수 있으니 슬리퍼 하나 챙기고 옷도 스판으로 난방용 내의도 챙기고 이런 인간적인 따뜻한 돌봄으로 하는 파견이 아니라 갈 때 아무것도 갖고 가지 말라는 돈도 식량도 여벌옷도 지팡이 하나 내가 나에게 주심 권한을 갖고 그 권한을 너희들에게 맡기니 그 권한만 믿고 가라! 그리고 어느 동네 가든지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오늘은 이집 내일을 저 집 그 다음날은 다른 집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 동네 떠날 때 까지 한집에만 머물러라 그래서 그 집이 주는 온갖 환대와 배려를 받고 그집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라 복음의 선포를 실현해 온갖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내쫒고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구원의 질서 하느님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이고 생명이신지 너희들이 그 집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복음 사도 역군 되어라. 그렇게 파견하십니다.

그럼 과연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그런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는데 여러분이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고장 이집으로부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접근했을 때 여러분을 순수한 신앙의 마음으로 제자요 사도로서 받아들일 가정이 몇 가정이나 될 것 같습니까? 많을거 같죠? 지금이야 선교가 잘되고 본당이 안정이 되고 교구가 안정이 되니까 뭐 잘 될 것 같지만 사실 역사를 보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선교신부님들이 정치적인 머리를 굴리고 인간적인 계산을 굴리고 이렇게도 했다가 저렇게도 했다가 온갖 편법 술법 기만 그래서 제주교구도 1901년도 신축교안이라는 엄청난 제주도민들과 천주교 신자들 사이의 갈등의 사건이 벌어지잖아요. 평화의 사도가 되라고 새로운 생명 공동체가 되라고 했는데 인간적인 여러 가지 방황 정부에서 파견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관료와 결탁이 되고 그관료와 결탁이 되어 신자들은 세금을 덜받고 평상시 자기와 감정이 안 좋거나 밉게 보인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더 몇배로 때려버리고 그러면서 지역사회 사람들이 바라볼때는 천주학쟁이들은 뭔가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우리 지역사회를 혼란케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오히려 제거 되야될 지탄이의 대상이 되어서 일어난 사건이 신축교안인 것이죠.

이런면에서 예수님의 오늘 파견내용은 준엄함과 더불어서 가장 합리적인 파견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파견 명령을 수행하는 우리에게는 정말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철저한 자기 자신의 겸손과 그리고 오롯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평화의 일꾼으로서의 무장을 하지 않으면 정말 유혹에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함이 있습니다.

제가 강정 미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평상시 미사 강론은 신앙적인 면을 말하면 되지만 강정미사를 오게되면 사회와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정보랄까 교회가 어떤 입장이어야 하느냐? 공부를 하게 됩니다. 공부를 하면서 저 자신이 상당히 풍요로워지는 은총을 받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썼던 미래의 도전들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쟁의 위협으로 꼽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게 우리 강정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기에 놀랍기도 했고 이건 우리가 알아야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른바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일어났던 사례들의 배경의 원인을 보면
법과 다양한 공동체들이 공생하게 해주는 힘들간의 결속력의 갑자기 파괴되어버리는 것 즉 법이 지닌 지속력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폭력과 전쟁이 발생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우리 강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정이라는 한 생명공동체 지역 혈연 공동체들이 일치 공동체들이 어느순간 완전히 결속력이 파괴되어 버리고 그 결속력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서 벌어지는 끈임없는 갈등 폭력 그리고 법이라는 미명아래 정부의 공권력과 온갖 폭력적인 처사들이 발생합니다.

구체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얘기를 교황님은 하고있습니다.
이미 수 세대 전부터 긴장 관계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살던 민족들이 갑자기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하게 서로 적대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정신적이 둑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사회를 지켜주던 힘들은 새로운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법과 공동체의 역사라는 힘에 의해 영혼 속 깊숙한 곳에 숨어 묶여 있었던 적대감이라는 화약고와 폭력성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강정도 하나의 생명공동체 였고 지역공동체 였고 혈연공동체 였고 수 세대동안 우리가 한 조상님들 밑에서 평화롭게 지냈던 공동체 이었는데 어느순간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있었던 탐욕과 이기심과 물질과 여러 가지 유혹으로 인해서 화약고 폭력성이 갑자기 터져나왔습니다. 분명 이지역에는 서로 다양한 역사적 전통을 지닌 민족들이 모여 살았고 점점 커져만 가는 긴장속에서 평화롭게 유지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지역에는 로마 카톨릭적인 기독교, 그리스적인 형식의 그리스도교가 각기 존재했고 수백년동안 터키족의 지배로 인해 뿌리내린 이슬람교 역시 영향력을 각기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공동체가 그나마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긴장관계들속에서도 그들은 서로 화합하며 잘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모든 것이 와해되면서 무정부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마치 르완다에서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던 후트족과 투치족이 갑작스럽게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는 전쟁과 폭력의 지옥으로 변했던 것처럼 이런 폭력과 죄악과 갈등과 적대감이 갑자기 터져 나올수 있던것일까요? 
 
법과 화해의 힘이
갑자기 이렇게 소멸되어 버린데 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냉소주의로 인해 이지역의 모든 사람들의 양심이 퇴색해 버렸다라는 겁니다. 이데올로기라는 냉소주의 우리나라는 남북간의 이런 적대저긴 관계 남북간의 이데올로기가 우리 백성들 한사람 한사람의 양심까지도 완전히 어려운 말로 트라우마 625전쟁으로 인해서 인간의 이성과 정신과 모든 건강한 양심을 전부다 장애로 만들어 버렸어요. 이 이데올로기라는 냉소주의가 모든 것들을 생명공동체를 모든 신뢰를 서로간의 존중을 다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데올로기가 표방하는 약속들에 의해서 모든 수단을 정당화 시켜버렸습니다. 즉 우리가 남북간의 적대적인 관계로 인한 안보시설 군사기지 또 군사기지가 들어와야 된다는 모든 수단들을 전부 합법화 시켜 버렸고 정당화 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법이란 개념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은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법이 이제 정부라든지 권력의 시녀가 되버렸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구속되신 분들 법적용을 보면 원칙이 있는 건가? 법의 정신이 있는 건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새로운 권력의 시녀로서 눈치만 보는 이런 이중잣대 여러 가지 차원의 이게 법이 아닙니다. 법이. 선과 악이 아닙니다. 양심이 아닙니다. 완전히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변질되버린 사회 기준이 되버린 거죠. 그러니 구성원들이 신뢰를 안하죠. 더 혼란이 야기되고 갈등만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념들이 지니고 있는 냉소주의와 혹은 이와 종종 결합되는 이해관계에 따른 냉소주의 이제 삼성이나 대림이나 대기업들 이와 관련된 경제적 이윤을 나누는 사람들의 냉소주의 자신들 돈만 벌면 되는 거예요. 지역주민들이 어떻고 백성들이 어떻고 평화운동가들이 어떻고 양심이 어떻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냉소주의입니다. 그저 우리 돈만 벌면 되는 겁니다. 또 대규모 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이런 냉소주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원들을 자연들을 환경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약탈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도 역시 선과 악의 문제는 유용성의 문제에 뒷전으로 물러나고 권력이 법의자리를 대신하고 완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적용이 되버린 것이죠. 이렇게 해서 도덕적 기풍이 지닌 힘은 내부로 부터 와해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유용성 역시 결국은 스스로 파괴되버립니다.

4대강이 그렇습니다. 4대강을 통해서 유용성이란 것들을 얘기 했지만 결국 유용성이 아니라 4대강이 세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버리고 애물단지가 되버리게 되고 우리 스스로가 발목 잡히는 이 4대강의 냉소주의가 우리 모두를 낙담케 해버리고 있습니다. 강정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있는 사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황님은 세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화해입니다. 이성을 갖고 법을 갖고 비전과 원칙을 갖고 있는 정부 권력자들 행정가들이 이성과 양심을 갖고 도덕감을 가질수 있도록 화해의 기도를 해라. 우리도 역시 폭력적으로 그들을 무시하면서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만델라 넬슨 대통령이 10년동안 비폭력적으로 평화적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했던 것처럼 우리가 매일 여기서 미사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비폭력적으로 화해의 이성이 돌아오고 양심이 돌아오고 전체에 대한 책임감이 돌아 올 수 있는 화해의 몸부림.

1991년도부터 1년에 천명이상 학살되는 전쟁의 90%가 사라졌습니다. 1991년도부터 천명이하가 살상되는 소규모 전쟁 40%가 없어 졌습니다. 1991년이라는 해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헤이그의 국제 사법재판소 그 역할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해입니다. 그 국제사법재판소의 근무하시는 분들이 월급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여든 세계를 사랑하는 시민들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 깨어있는 시민들이 모여서 전 세계적으로 있는 독재, 쿠데타, 폭력적인 모든 세계적인 문제들에 의해서 이성을 갖도록 선과 악에 대한 도덕성을 갖도록 양심을 갖도록 자연과 환경 생명을 사랑하도록 끊임없이 인류를 향한 촉구의 강한 활동들이 독재정권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천명 이상의 학살되는 전쟁을 40%이상 감축시키고 천명 이상을 없애는 전쟁의 90%를 없애게 하는 가장 강한 힘이 되었다는 .

우리 강정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소주의적인 폭력적으로 일방적으로 시달리는 것들을 우리가 화해의 제스쳐 화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해라. 평화의 근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당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참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셨다. 우리자신이 우리가 기도를 하고 노력하는 것들이 어떤 결과 어떤 영향력이 벌어지고 있느냐? 결과를 체험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서 전혀 다른 세상 새로운 질서를 했다는 이 믿음 안에 신앙적 믿음 안에 평화를 위해서 투신하라. 마지막 세 번째가 책임을 가져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그 평화 운동은 우리가 깨어있는 양심, 깨어있는 선악에 대한 도덕지수를 높이라는 책임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를 봉헌 하면서 제1독서 히브리서
가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하느님 현존은 지진이 일어나고 번개가 번쩍이고 바람이 불어오고 그러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놀라운 성경이었다면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하느님의 현존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는 평화의 예루살렘이라고 평화의 하느님 현존이라고 바로 오늘 우리가 강정에서 드리는 이 평화의 기도, 화해의 기도 책임의 기도 이거는 어떤 결과를 드러내든지 간에 우리 하나 하나의 우리기도의 봉헌들이 미래를 향한 참 생명 이고 참 책임감이고 모든 정부 모든 권력기관 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법을 함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 정의로운 정부로서의 평화의 성숙함을 일깨우는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고 하느님 현존의 사랑의장소이고 권능의 장소이고 바로 우리를 통해서 끊임없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시는 새 예루살렘의 장소임을 믿습니다. 아멘.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자 이웃에 대한 따뜻한 눈길을 간직하며

강정 생명평화 미사
월요일 오전 11시 오후 4시,
화요일 ~일요일 오전 11시

강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 매일 12시 부터 12시 30분 사이
강정의 평화를 위한 묵주기도와 강정아를 봉헌 합니다.
각자의 장소에서 기도로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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