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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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수요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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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0-05-26 ㅣ No.56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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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수요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마르코 10,32-45

http://www.catholic.or.kr/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살기 원하는가? 그럼 손을 펴라!>


    박경리 선생님께서 생전에 ‘우리 강산은 예금’이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다 써버리면 후손들은 그야말로 ‘쫄쫄’ 굶어야 할 판입니다.


    ‘개발’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합니다. 이런 와중에 최근 한 지자체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생태계가 서서히 회복되어 화제입니다. 회복과 더불어 신기한 일도 생겼습니다.


    훼손으로 인해 사라졌던, 이제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던 동식물들이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수달이란 녀석이 있습니다.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엉뚱하기도 하고 장난기도 보통이 아닙니다. 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면 끼리끼리 어울려 재미있게 놀기까지 합니다. 상당한 지능을 소유한 동물입니다.


    지능하면 또 원숭이를 따라갈 수가 없지요. 사이언스지의 보고에 따르면 녀석들은 1에서 9까지 정도의 수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남쪽 한 온난한 지역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떼 지어 살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밀렵꾼들의 횡포도 만만치 않답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녀석들을 생포하는 사냥꾼이 있답니다.


    그에게는 그물도 필요 없습니다. 총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큰 호리병 하나면 됩니다. 입구는 좁고 아래는 넓은 ‘고려청자’ 같이 생긴 큰 호리병 속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바나나나 땅콩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녀석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에다 세워놓고 사냥꾼은 나무 뒤에 숨어 있습니다.


    호기심 많은 녀석들은 즉시 모여듭니다. 호리병 이곳 저 곳을 만져보던 녀석들 가운데 한 녀석이 마침내 호리병 속으로 팔을 집어넣습니다. 손끝의 촉각으로 즉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바나나와 땅콩이 그득 들어있다니! 즉시 한 주먹 가득 움켜쥡니다.


    그 순간 사냥꾼은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서서히 나타납니다.


    아이큐가 상당한 원숭이이지만 꼭 필요할 때는 그게 발휘되지 않습니다. 사냥꾼에게 생포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임에도 원숭이는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지 않으니 원숭이의 긴 팔이 좁은 호리병 목 부분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제 사냥꾼은 원숭이에게 다가가 그 큰 호리병을 힘겹게 질질 끌고 가는 원숭이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움켜쥔 손을 펴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그 손 한번 빨리 펴지 못했기에 원숭이의 미래는 사냥꾼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소탐대실’이란 말이 제대로 적용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다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다 보니 결국 인생이 끝장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예수님 추종을 위해, 그로 인한 영원한 생명, 구원이란 대 명제를 걸고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 원대한 꿈을 머지않아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몸은 제자단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마음과 정신은 다른 데 가있었습니다.


    그 결과 누가 서로 높은가를 두고 길에서 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님의 왕국이 서면 ‘물 좋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미리 인사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물 좋은’ 자리, ‘높은 자리’는 선호대상이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높은 자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서로 상처를 입혔고 제자들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끝도 없는 자리에 대한 집착, 그 결과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사실 자리라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 그 자리에 앉는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내려와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 별것도 아닙니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손을 펴야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리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에서부터 놓여나는 그 순간 제자들은 그제야 제대로 된 예수님 추종이 가능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을 과감히 버리는 그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제대로 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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