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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이름 없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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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7-10-20 ㅣ No.30745

 

이름 없는 편지..



어느 날, 상우 아빠는 야근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오다가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상우 아빠를 친 승용차는 사고를 낸 직후 곧바로 뺑소니를 쳤다.


의식을 잃은 상우 아빠는 다른 사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 졌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을 혼수상태로 있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우네 집은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고,


많은 병원비로 빚까지 져야 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상우 엄마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악마의 이빨 같은 우울증은 상우 엄마를 어두운 방 안에 꽁꽁 묶어놓았다.


아빠를 잃고, 엄마마저 마른 꽃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고등학교 1학년인 상우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상우의 마음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화실을 다녔던 상우는 그것마저 그만 두어야 했고 화가의 꿈도 접어야 했다.


우울증에 빠져버린 엄마 대신 상우 누나가 흔들리는 상우를


잡아보려 했지만 상우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했다.



처음엔 아빠 친구들이 와서 도움을 주기도 했고


친척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발걸음도 점점 드물어졌다.


자꾸만 빗나가는 상우의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어느 날 오후, 얼굴 가득 깊은 그늘을 드리운 채 힘없이 방을 걸어 나왔다.


"상우야,지금부터 엄마도 정신 차릴 테니까 너도 이제 그만 정신 차려라."


"엄마, 거울 한번 봐봐. 예전의 엄마 얼굴이 아냐.


힘들겠지만 이제는 아빠를 마음속에서 빨리 보내드려."


상우의 두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상우야, 엄마가 다음 달부터 엄마 친구하고 조그만 옷가게를 하나 하기로 했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깐 집이라도 좀 줄여서 시작해 보려고 해.


형편 나이지는 대로 다시 화실에도 보내줄 테니까, 이제 마음 잡을 거지?"


"알았어, 엄마. 걱정하지 마."


상우는 말꼬리를 흐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고맙다. 너까지 마음을 잡지 못하면 이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


상우 엄마는 허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상우네 가족은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상우 엄마는 집을 줄인 돈을 가지고 잘 아는 사람을 통해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조그만 가게 하나를 얻었다.


그런데 옷가게는 시작도 못해 보고


사기꾼에게 보증금을 송두리째 날리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게 이사까지 가번린 엄마 친구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소식이 감감했다.


어처구니없게 실낱 같은 희망마저 빼앗긴 엄마는


다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앓아누웠다.


엄마의 절망과 우울증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엄마가 다시 누운 뒤로 상우의 성격은 칼날처럼 예민해졌다.


상우의 마음속엔 꿈과 희망 대신 불신과 미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상우는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친한 친구에게 까지도 불신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빠를 죽게 해놓고도 그대로 도망쳐 버린


뺑소니 운전사를 상우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엄마의 마지막 희망까지


훔쳐 달아난 엄마 친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상우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의 울음소리가 아프게 들려왔다.


상우 누나는 조그만 회사에서 경리일을 하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불길한 침묵이 흐르는 어두운 막장 같은 집이 싫어서


상우는 밤늦도록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골목을 기웃거렸다.


상우는 걷잡을 수 없는 어둠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상우 엄마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상우 엄마는 한참 동안 울다가 목청껏 소리를 치고는 방 안이 떠나갈 듯 웃어댔다.


그리고 이따금씩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상우 엄마는 결국 서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폐쇄병동에 엄마를 혼자 남겨두고 병원 문을 나오며 누나가 말했다.


"상우야, 너무 걱정 마.


몇 달만 치료받으면 좋아질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


"누나, 나 학교 그만둘까 봐. 대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도 이제부터 돈이나 벌어야겠어."


"그런 말 하지 마. 너까지 그러면 엄마, 정말로 잘못돼."


"엄마 병원비는 어쩌고? 몇 달 입원하려면 병원비가 엄청날텐데."


"내가 마련할 테니까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해.


우선 친척들을 찾아가 볼 생각이야."


병원에 있는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상우는 미쳐벌릴 것 같았다.



상우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누나가 근심스런 얼굴로 상우에게 물었다.


"상우야. 너 요즘 많이 늦는 것 같다."


"누나는 상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상우는 눈을 부라리며 꼿꼿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우 네가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나는 믿어.


누가 뭐라 해도 너는 착하니깐."


까칠한 누나 얼굴을 어롱어롱 적시며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상우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상우야, 이것 좀 봐."


누나는 상우 앞으로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편지 봉투에는 큼직큼직한 남자 글씨체로


집 주소와 상우 아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과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게 뭔데?"


상우는 풀 선 목소리로 투명스럽게 물었다.


"이 편지하고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어."


상우는 누나가 건네준 편지를 읽어보았다.


[이 적은 돈에 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따뜻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름도 밝히지 않은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빕니다.]



"누나 생각에는 누구 같아?"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누가 준 건지도 모르는데,


이 돈을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빠 친구 아닐까? 기철이 아저씨 말야."


누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튼 우리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분이겠지.


엄마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일 수도 있고,


가게 할 돈 가지고 도망친 엄마 친구일 수도 있고...."


정말 뜻밖의 일이었지만, 상우는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지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상우의 불신은 그만큼 깊었다.



그런데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록 매달 한번 내지 두 번은


상우 아빠 앞으로 편지가 배달됐다.


편지 속에는 여전히 하얀 종이로 정성껏 포장된


십만원짜리 수표 한장이 들어 있었다.


상우는 그 돈을 보내는 사람이 정말 궁금했다.


돌아가신 아빠 친구를 떠 올리기도 했고,


상우네 가족을 귀찮게만 생각하던 친척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기도 했다.


누나 말대로 엄마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이거나


교우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엄마 돈을 가지고 달아난 사람이


뒤늦게 뉘우치고 사죄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상우 마음속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조금씩 씻겨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지신의 가족을 위해 보내주는 따뜻한 마음을 생각할 때마다


상우 마음속에 희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상우는 누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엄마가 있는 서울로 갔다.


엄마의 병세는 생각보다 많이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예전에 있던 폐쇄 병동에서 일반인들도


예사로 드나들 수 있는 병동으로 옮겨진 터였다.


"엄마, 집에 가고 싶지?"


누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묻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만 더 참아.


한두달만 더 있으면 퇴원해서 한 달에 한번만 병원에 오면 된다고 했어."


엄마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상우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상우는 그런 엄마의 얼굴을 외면한 채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엄마, 우리 다음에 또 올게. 자주 못 와서 미안해."


엄마는 말없이 야윈 몸을 웅숭그렸다.


상우와 누나는 쓸쓸히 병실 문을 나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상우 엄마가 후닥닥 맨발로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심상치 않은 눈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상우야, 이거 아무도 주지 말고 너 가져."


엄마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상우 주머니에 얼른 집어 넣고는 딴청을 부렸다.


상우는 온전치 못한 엄마의 행동이 창피했다.


상우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엄마가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준 것을 꺼냈다.


엄마가 준 것은 체리맛 빨간색 사탕이었다.


상우는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상우가 체리맛 사탕을 좋아한다는 것을 여전히 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우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엄마에게로 다시 갔다.


병실에 있는 엄마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상우는 눈물 젖은 눈으로 머뭇머뭇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엄마는 손때 묻은 가족 사진을 손에 들고 어깨를 출렁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해질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상우는 마음이 아팠다.


질금질금 비를 뿌리는 먼 풍경 속으로


한 점 한 점 눈물을 떼어 내며 상우는 내내 엄마를 생각했다.


상우는 하루하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무엇보다도 엄마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상우는 다짐했다.


가족 사진을 들어다보던 엄마 모습이 자꾸만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상우는 엄마에게 갖다 줄 사진을 찾기 위해 장롱을 뒤졌다.


그런데 사진을 찾다가 안쪽 깊숙이 감춰진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여러 장의 편지지에는 똑같은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적은 돈에 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따뜻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름도 밝히지 않은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빕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상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매달 소중한 십만 원을 보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누나였다는 것을 상우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증오하며


자꾸만 어긋난 길을 가려 했던 상우의 마음을


누나는 그렇게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거였다.


상우는 아린 가슴 위로 타이르듯 조용히 건네주던


누나의 말이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


"상우야, 사람들을 무조건 미워하지마. 고마운 분들도 있잖아.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건 자기 스스로를 미워하는 거래.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만 불평하지 말고,


대신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면 되잖아."


누나를 생각하는 상우의 얼굴 위로 따스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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