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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차라리 차를 바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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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11 ㅣ No.59897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2 주간 금요일 -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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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방학 때 아일랜드에 있으면서 두 번 슬라이고란 곳에 갔었습니다. 그 동네는 바닷가에 위치해있습니다. 그 동네 사시는 분과 함께 우리는 바다낚시를 갔습니다. 팔뚝만한 돔들이 낚시를 던지자마자 계속 걸려 올라왔습니다.

물론 저는 낚시를 할 줄 모르고 잡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간 이유는 잡힌 고기를 그 자리에서 회쳐먹기 위해서입니다. 그 곳에 사시는 분은 능숙한 솜씨로 회를 뜨셨고 함께 간 신부님들과 함께 우리는 유럽에선 좀체 맛볼 수 없는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갓 잡아서 먹는 이 신선한 맛이란 횟집에서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습니다.

바닷가에 사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생선은 신선하면 날것으로 먹고 신선도가 조금 떨어지면 굽고 더 안 좋은 것은 튀긴다는 것입니다. 그 분 말씀에 의하면 요리를 하는 이유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날것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그렇겠지만, 특별히 생선은 죽으면 더 빨리 썩고 냄새도 더 빨리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려서 운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꽁치는 특히 빨리 죽고 빨리 냄새가 나기 때문에 요즘은 마취하는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를 치고 남은 비늘과 껍질을 바다에 던졌더니 어디선가 갈매기 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상어는 피 냄새를 몇 킬로 멀리서도 맡을 수 있다고 하듯이 갈매기들은 생선의 냄새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는가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단순한 진리로 마지막 날이 어떻게 올 것인지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마지막 날이 노아의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처럼 누구도 예상치 못한 때에 오리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다른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오늘 복음은 우선은 예루살렘의 폐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고 동시에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선에겐 물이 생명이듯이 인간에겐 하느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몰아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몰아내어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물 밖에서 멀쩡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죽어서 냄새를 풍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겠느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박해하여 죽이거나 모두 쫓아냅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버리고 혼자 살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죽음이었고 그 썩는 냄새는 독수리들을 몰고 왔습니다.

로마군대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서기 70년에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썩는 냄새를 풍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비록 예루살렘에만 해당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그럴 것이고 우리나라도 그럴 수 있고 우리 가정도 그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 한 사람도 주님과 떨어지면 썩는 냄새를 풍길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람의 썩는 냄새를 맡는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썩는 냄새는 자신을 멸망시킬 것들을 불러들입니다. 파리가 몰려있으면 거기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이에나가 몰려있으면 거기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썩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들을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서 싱싱한 물고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듯이 마지막 날엔 온 인류가 썩는 냄새를 풍길 것입니다. 그 때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혹 썩는 냄새가 무엇인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을 죽음이라 하시지 않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이다.”, 혹은 “라자로가 자고 있으니 깨우러 가자.”라고 하시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를 아시지요?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그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미움이 들어오고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무기력과 우울증만 심해지고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과 두려움이 자라나고 절제를 하고 싶은데 절제가 안 되면 이미 나는 부패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 냄새를 맡고 더 안 좋은 것들이 나에게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태워 향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악취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향기로 중화되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작은 향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작은 사랑의 희생은 죄의 악취를 중화시키는, 마치 썩어가는 물 위에 피는 연꽃처럼 하느님께 더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모이겠지만, 꽃이 있는 곳엔 꿀벌과 나비가 모일 것입니다.

 

 

차라리 차를 바꾸십시오

 

제가 로마에 처음 유학 나왔을 때가 2000년이었습니다. 물론 보좌신부를 하며 한국에서 2년 있었지만, 그 외엔 로마에서 공부만 하며 보냈습니다. 그 때는 신학생이었고, 괜찮은 사제가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며 유혹을 견뎌냈듯이, 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자신을 죽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듯이, 저도 4년 동안 제 육체를 이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은 심한 극기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잠도 적게 자고 먹기도 조금 먹었습니다. 제가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는 지금보다 20킬로가 적게 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신 느끼는 것은 자신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먹기도 잘 먹고 잠도 충분히 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생 때보다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도 쉽고 육체도 나름대로 정신에 잘 따라줍니다. 공자가 연령대별로 이름을 지어준 것은 이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성숙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대부분이 죄를 짓지 않으려는 ‘세심증’을 겪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죄라도 짓지 않기 위해 절제하고 극기하고 밤새워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면서 마지막 날에도 이렇게 죽음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 때, 좋은 일을 하고 하지 않거나, 죄를 짓고 짓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받기 합당한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같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더라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둔다는 이유는 구원은 그 하는 ‘행위’보다도 그 사람의 ‘본질’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 흉내내는 원숭이는 남겨놓고, 원숭이 흉내를 내더라도 사람이면 데려간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본질을 따르고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자신을 이기기 위해 극기하고 기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칫 그렇게 하면서 그것 자체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영적 교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겸손을 가져다주니 차라리 고마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처음 유학 나올 때, 신부님들이 모아서 산 차가 중고 대우 라노스였습니다. 신부 되어서 오니 아직도 그 차를 교구차로 쓰고 있었습니다. 10년이 넘은 차기에 엔진도 갈고 수시로 많은 부속을 교체하였지만, 계속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수리비만 해도 엄청 나왔습니다. 그런 차는 아주 조심하며 타봐야 계속 고장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새 차를 사고 헌 차를 폐차시켰습니다. 새 차는 아무리 막 몰아도 걱정이 없습니다. 사고만 안 난다면 고장 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 것이 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성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폐차 직전의 차 가지고 아무리 조심하고 극기하고 노력해봐야 헌 차는 문제를 계속 일으키게 되어있습니다. 차를 바꿔야합니다. 내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죄도 짓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화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 자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사는 이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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