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부제님의 선물

스크랩 인쇄

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5-21 ㅣ No.3541

부제님의 선물

 

그레고리언 성가를 잘 부르시고

성가대 지휘도 잘 하셨던 부제님!

 

나는 그를 형님처럼 좋아했다.

형제가 없었던 나는 부제님을

형님처럼 사랑하고, 의지하였다.

 

어느 해 여름,

하기방학을 맞이하여

부제님과 나는

기차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서울발 부산행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길을 떠났다,

부제님은 사제서품을 받으시기 전

마지막 여행길을 나와 함께 나서셨던 것이다.

 

첫 번째 기착지는 밀양이었다.

 

우리는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밀양역에 내렸다.

 

외할머니는 연락도 없이

이른 새벽 대문을 두들기며

별안간 찾아 온 외손자인 나와

부제님을 정말 반갑게 맞아 주셨고,

우리는 사랑채에 짐을 풀었다.

나를 사랑하셨던 부제님은

내가 태어난 밀양의 풍광을 좋아하셨고,

처음 만나는 외갓집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정을 나누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부제님은

내게 부럽다는 말씀을 하셨다.

 

외할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다음 기착지인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우리는

둘째 이모님이 사셨던 해운대로 갔다.  

남색 바다와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

수평선에 맞닿은 코발트 빛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는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많은 예기를 나누며   

몇 날을 이모님 댁에 머물렀다.

 

그리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부제님은 제본상태가 엉성하고

지질이 노랗게 변질된 "라틴어 교재"를

내게 선물하셨다.

나는 부제님의 정이 담긴

귀한 선물인 그 교재를 선생님 삼아

아무런 목적 없이 홀로 라틴어를 공부했다.

 

부제님이 나와 함께 하신 여행과

내게 주신 라틴어 교재 선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부족하고 부족한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는 그 길은 너무나 벅차고,

너무나 좁은 길이었다.

부제님도 나와 함께 한 여정을 통하여

나의 부족함을

충분히 감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성소(聖召)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부제님이 사제서품을 명동 대성당에서 받으신 지도 이미

수십 년이 흘러갔다.

서울교구의 어느 본당의 주임신부님으로써

사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신다.

 

부제님의 땀과 체온이 밴

노랗게 변색된 "라띠내 린구에",   

부제님의 신뢰와

따스한 정이 담긴

라틴어 교재를

내 영혼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453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