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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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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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옥 [songdo] 쪽지 캡슐

2001-06-27 ㅣ No.3927

다음칼럼>사랑과 자비의 만남에서

[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아래 글은 법정스님 산문집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종교를 초월한 분의 글이 니 ,종교의 벽을 넘어서,

이해하는 차원에서 다같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심 없이

서로 존중하는 마음 을 가집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절에서든 교회에서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 보고 듣고 배운 것 만 갖고도 부처나 성인이 되고도 남는다.

보는 것, 배우는 것, 듣는 것,

그 자체만 갖고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의미가 없다.

그것은 일상의 생활에 실행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이라 해도 그것은 이론서에 불과하다.

가이드북일 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실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행위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나 자신도 이 얘기를 하면서 반성을 한다.

일이 있어서 가긴 하지만 "지금 내가 거길 뭐 하러 가지?

도대체 이렇게 내가 나가는 게 어떤 의미 가 있는가?

내가 뭐 때문에 대중 앞에 나가서 떠드는가?

그래서 나는 속으로 무척 자기 저항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괜히 남 앞에 가서

이래라 저래라 떠드는 게 마음에 저항이 된다는 말이다.

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 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의 쌓은 행 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몰랐던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 아니다.

본래 자기마음에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면

그것이 인연을 만나 꽃피고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기독교 신자로서 불교 신자로서

과연 그 가르침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

신앙인들은 그런 물음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그런 물음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감이 없다.

누가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 행위에 대해서,

내 발끝을 돌아보듯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물음을 던져야 한다.

듣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또는 이 교회 저 성당을 기웃거리면서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걸 갖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지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 자신이 많이 반성하지만,

신앙인 들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 안이 시 끄러워질 뿐이다.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 지라도, 남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만남이란 일종의 자기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종교적인 생각이나 빛깔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접 촉될 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만남이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과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나는 가끔 가톨릭의 장익 주교님을 만난다.

그분을 만날 때 우리사이에는 자신이 무슨 승려라거나

상대방이 사제라거나 하는 의식이 전혀 없다.

그런 것 없이 마음을 터놓고 만나다 보니

전혀 벽도 없고 종교간의 거리도 간단히 뛰어 넘을수 있다.

우리는 만나서 거의 종교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한사람의 수행자로서,한사람의 사제로서,

서로가 인간적으로 만나며 그 만남 속에서 모든 것이 융화된다.

모든 종교에는 독단적인 요소가 있다.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요소가 끼어들면

인간 교류 자체가 불가능하다.

종교간에 벽이 허물어지려면 우선 대화가 있어야 하고,

대화를 가지려면 독단적인 울타리를 넘어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윤리,

공동 선 같은 것이 서로 통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종파적인 종교를 통해서

마침내 보편적인 종교의 세 계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종파적인 종교라는 것은 나무로 치 면 가지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전부라고 고집하면

나무 전체를 알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가 즐겨 쓰던 비유이다.

종파적인 벽이나 독단적인 요소만 극복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를 하나로 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분쟁이 일고 있는 종교적인 갈등은

종파적인 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인도 고전인 리그 베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적인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말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뜻은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열반경 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

 

 http://column.daum.net/victdry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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