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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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산울림 1978│My Favorite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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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8-04-23 ㅣ No.9678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산울림
산울림 제2집 (1978, SRB)
산울림 Sanullim 1977-
No.1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향기로운 꽃길로 가면 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
아!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위해 노래 부르리
그대가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논 내마음
사뿐히 밟으며 와 주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Introduction 
프로그레시브와 헤비 메탈 까지 도입한 산울림의 실험적인 음반으로 대중적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 2분 여에 이르는 긴 전주를 삽입시킨 프로그레시브적인 인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어느날 피였네`, 헤비메탈 스타일에 보컬 하모니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노래 불러요`. 프로그레시브적인 분위기와 서정적인 발라드 형식을 결합한 `둘이서`, 전통 가락을 현대화한 `떠나는 우리님` 등은 당시로서는 산울림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였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산울림의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나온지 딱 30년이 되었네요.   역시 진보적인 작품들은 시대가 지나도 더더욱 새롭게 들리나 봅니다.  이 노래를 처음들었던 국민학생 시절에도 매우 좋아했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들어도 여전히 좋습니다.  아니 지금들으니 그 당시의 실험정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네요.
도입부분의 도도한 베이스 기타의 전주를 시작으로 곧바로 도도한 연주대열에 가만히 올라서는 드럼비트가 몽환적으로 깔립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일렉트릭 기타는 무대 저멀리에서 일직선으로 흐르는 베이스와 드럼의 비트를 전후좌우로 휘감습니다.
김창완의 어눌한 보컬은 6분의 연주시간중 거의 중간이 지나서야 슬그머니 등장합니다. 이때는 일렉트릭 기타 역시 베이스, 드럼과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대곡이로군요.    그 당시 산울림은 영국-미국에서 넘쳐나던 수퍼그룹들의 음악을 충분히 듣고 있던 모양입니다.   이정도 사운드를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만들었다면 그건 정말 '천재'가 아닐수 없으니까요.   거의 싸이키델릭에 가까운 사운드이지만 그랜드펑크 레일로드와 같은 그룹 편재로서 그들의 대표곡 Inside Looking Out을 연상케하는 베이스와 반복적인 가락과 리듬으로 듣는이의 얼을 빼놓고 있습니다.
산울림 2집에는 이 곡외에도 불멸의 산울림 히트넘버인 '나 어떡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노래불러요'도 매우 좋죠.  '떠나는 우리님'은 마치 상여를 지고 부르는 노래가락과 흡사합니다.   국민학교때 이걸 흥얼거리고 다니다가 어머니한테 쥐어 터진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정말 대단한 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70년대의 그룹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집니다.  웬지 낭만적인 모드로 빠져든다고 할까요?   지금은 산울림에 이어서 조하문이 이끌던 마그마의 '해야'를 듣고 있는데 이 곡 역시 지금까지도 연세대의 주력 응원가중 하나로 쓰이면서 30년가까이 애창될만큼 완성도가 높은 곡입니다. 2008/02/12
출처 : Sonar & Radar
     
Introduction 
김창완이 친동생 김창훈, 김창익과 함께 만든 그룹 '산울림'은 실제로 직업적인 락그룹이 되기 위해 앨범을 만든 건 아니다. 1972년 경에 그가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음악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는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 흉내를 내면서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77 대학을 졸업(서울대 농대 잠사학과)하면서, 그동안 작곡을 하였던 약 150 여곡들이 아까워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들은 한 장의 앨범을 내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허락했고, 녹음날 취직시험이 있던 그는 과감히 녹음을 하기로 결정하고 녹음한 것이 바로 '산울림'의 탄생이었다. rock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한 70년경에 '산울림'의 "아니벌써"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국내 가요계를 흔들어 놓았고, rock의 대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집의 '산울림'은 다시 한번 앨범을 낼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집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이고, 이 앨범은 '산울림'을 국내가요계의 앞서가는 그룹으로 완전히 자리 굳히게 한다.
1979년 창훈과 창익의 군입대로 인한 공백기를 거쳐 1981년 7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에는 "산할아버지" "개구쟁이"등 어린이를 위한 세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이 노래들은 지금도 각종 모임과 운동경기에서 단골로 불려지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1983년 산울림은 9집을 끝으로 해체했다. 두 동생은 사회인이 되었고 맏이인 그만이 산울림의 이름으로 3장의 음반을 내는 등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인들을 모아 '꾸러기들'을 결성하여 최성수, 임지훈, 윤설하, 현희, 신정숙 등을 길러냈다. "꼬마야" "고등어" 등 히트곡도 냈다. 그의 음악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산울림의 연장선상이다.
'산울림'의 78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첫 공연은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는 소동을 벌였고,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가 뒤덮이는 소동을 벌이는 등 많이 화제를 낳았다.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음악정신에 젊은이들의 열광이 따랐다. 77년생 아이는 '산울림동이'로 불렸을 정도이니 인기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3년 활동을 중단한 이후 14년만에 본격 활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삼형제 록그룹 '산울림'의 복귀는 신선함과 충격 이상이다. 산울림은 90년대의 록 평론가들에 의해 신중현과 들국화와 더불어 한국록 역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문제적 데뷔 앨범'으로 평가받는 산울림 1집이래 '산울림'이란 이름으로 작년까지 13집이 출반 되었다. 네 개의 동요앨범, 두개의 독집도 그의 앨범목록에 올라 있으며 그의 음악은 어떤 장르에 있더라도, 상투적인 문법을 거부하는 창의성으로 빛난다.
'산울림' 음악의 전반적인 관심은 '인생'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2집부터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좀더 깊은 주제에 관해 젊은이들이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산울림 음악을 좋아아하게 되었다. 우리말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해서, 노랫말도 참신함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파라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은 우리 가요계의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산울림의 앨범 자켓은, 자켓의 1/4이 조금 넘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왼쪽 중간에 있고, 그 오른쪽에는 '산울림'이라는 특이한 글씨체로 그들의 그룹명을 적어 놓았는데, 12장의 정규앨범들이 나오면서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만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가수의 사진을 앨범 자켓에 싣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앨범 자켓에서도 그들은 앞서 가고 있었다.....
출처 : Mania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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