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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의 ‘썩은 밀알’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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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홍보실 [commu] 쪽지 캡슐

2005-10-07 ㅣ No.30

 

천주교 서울대교구 (수신: 문화·종교 담당 기자님)

홍보실 마영주   ☎ 02-727-2036(직통), 02-727-2114(교환 2036) Fax 753-6006

E-mail: commu@catholic.or.kr      2005. 10. 7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170주기

20일 용산 성직자 묘역서 추모·현양 미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지난 6월 발표한「한국 천주교회 통계(2004)에 따르면, 2004년 12월 31일 현재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는 4,537,844명이며, 이는 우리나라 총 인구의 9.3%에 해당하는 숫자다.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진 1784년 이후 220년 만의 일이다. 오늘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있기까지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된 이는 누굴까?


한국 천주교를 위해 ‘썩은 밀알’이 되어…

브뤼기에르 초대 교구장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선교사의 입국으로 천주교를 알게된데 반해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에 의한 자율적인 신앙공동체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지은 서적들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천주교의 신앙도 함께 들어왔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李檗)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사제를 갈망하고 있었다.

 

  1794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최초로 조선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순교하게 된다. 조선은 이후 25년 간 목자 없는 양떼 신세였다. 조선 교우들은 북경 주교를 거쳐 로마 교황청에 사제를 보내달라는 애원의 편지를 계속 보냈다.


  조선 포교지의 열악한 사정과 그곳에 가면 순교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조선의 교우들을 사랑하고, 만나기를 원했던 브뤼기에르(한국 姓은 蘇,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주교. 그가 조선의 초대 교구장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3년 동안 중국을 가로지르며 조선입국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즉 펠리구(Pie-li-ke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지금의 중국 내몽고 지역)의 한 교우촌에서 눈을 감고 만다. 1835년 10월 20일, 한국 천주교회의 ‘썩은 밀알’이 된 것이다.


  193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은 조선 천주교회는 마가자 교우촌 뒷산에 안장되어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모셔와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했다. 선종 후 96년 만의 일이었다.


마가자 : 마가자는 중국의 교우촌으로,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선교거점이었다.

펠리구 : 마가자(동산)의 옛 프랑스어 표기. 한자어로는 별용구(別龍溝)라 표기하며, 그곳 사람들은 이를 비에롱고우(Bie-long-gou)라고 발음한다. 이 지역에는 동별용구와 서별용구(Sie-bie-long-gou)가 있는데, 마가자는 후자를 말한다.

 

“어찌하여 조선 전교를 머뭇거리는가?

과연 어느 사제가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조선의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蘇 바르톨로메오, 1835-2005) 주교(主敎).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부 나르본의 레싹에서 태어난 그는 1815년 12월에 사제서품을 받고 1825년 9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조선 교우들의 사제 파견 요청을 여러 가지 불가능한 이유를 내세워서 거절하는 파리외방전교회 회람문을 접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5월 본부에 “어찌하여 조선 전교를 머뭇거립니까? 과연 어느 사제가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하는 장문의 반박 편지를 보낸다.

 

그 해 6월 주교로 성성(成聖)된 그는 조선에 대한 생각을 점점 더 굳히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결단을 알게 된, 다시 말해 조선 포교지를 담당 할 선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복음화성성人類福音化聖省)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보다 진지하게 조선교구의 설정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 사이 조선 천주교회는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을해박해(乙亥迫害, 1815), 정해박해(丁亥迫害, 1827년) 등으로 주문모 신부와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자신들의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교우를 위해 끊임없는 간청으로

1831년 조선 초대 교구장 임명

 

  조선 신자들의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해 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과 1830년에 포교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서한을 보내 교황의 허락을 얻어주도록 간청한다. 그의 집념 어린 간청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은 1831년. 그해 2월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선출됐다. 모든 것이 순서에 따라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새 교황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를 독립된 교구(敎區, 정식 명칭은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 것이다.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敎書). 교회사연구소 소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미 페낭(Pennang, 彼南)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동하며 중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32년 7월 25일, 자신이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 된 사실을 알고 곧바로 배를 타고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미 자신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나는 페낭을 떠나면서 내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 10장).


박해 불구 프랑스 선교사 계속 파견 기반 마련

모방, 샤스탕, 앵베르 신부 파견

선교사의 입국 쉽도록 조치


  브뤼기에르 주교는 예리한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자신이 조선에 못 들어가더라도 조선 교회가 사멸하지 않도록 몇 가지 조처를 취했다.

 

  첫째, 1833년 조선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등 여러 번의 박해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둘째, 모방(Mau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앵베르(Imbert, 范世亨) 신부 등 탁월한 세 선교사를 발탁해 조선 선교를 맡겼다. 이들은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셋째, 1838년 신설된 만주 요동 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맡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오는 20일 추모·현양 미사의 포스터


“한국 천주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미래를 열어주신 분”


  그러나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인품, 업적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본당 설립 20주년을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현양(顯揚) 사업을 펼쳐온 개포동 본당 주임 염수의(廉洙義)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미래를 열어주신 분”이라며 “주교님이 없었다면 조선교구의 설립은 한참 뒤로 미뤄졌을 것이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와 오늘날의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현양 사업의 의미를 설명했다.


  염 신부는 또 "이번 170주기 추모·현양 미사가 주교님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고 그분의 뜻을 본받는 계기가 되고 더 나아가 성인(聖人)으로 시성(諡聖)해 공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교구장 정진석 鄭鎭奭 대주교)는 오는 20일 오후 2시, 용산 성직자 묘역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善終) 170주기 추모·현양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 전 1시부터 현양을 위한 기도와 주교의 생애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미사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총대리 염수정(廉洙政)주교, 김운회(金雲會) 주교와 사제단이 공동으로 집전한다.

 

  이날 미사에는 프랑스의 주교단과 사제단, 신자 등 40여 명이 함께 참석하기로 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문의 개포동 성당 ☎ 574-4744)

 

* 용산 성직자 묘역 (용산구 산천동 용산성당 내 ☎719-3301 www.yongsanch.or.kr)

- 지하철 5호선 마포역 3번 출구, 2-1 마을버스 이용 용산성당 하차

- 지하철 6호선 공덕역 7번 출구, 2-1 마을버스 이용 용산성당 하차

 

본 보도 자료의 문의 사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실(☎ 727-2036)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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