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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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 [guevara72] 쪽지 캡슐

2008-07-07 ㅣ No.605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연중 제29주일-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궤변과 탐욕의 악어 한마리’

악어의 눈물

나일강에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잡아 먹어버리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악어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악어는 큰 먹이를 삼킬 때, 눈물샘이 눌려서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이지만 언뜻 보면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입니다.

악어의 눈물은 거짓 눈물, 짐짓 꾸민 눈물, 술수를 뒤로 감춘 채 남을 속이려는 눈물을 상징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고대 이집트의 전설에서 유래된 ‘악어의 논법’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느 날 나일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악어가 잡아갔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자식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때 악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이를 돌려주겠는가. 안 돌려주겠는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으면 아이를 돌려줄 것이다.” 물론 악어는 아이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부모가 “돌려주겠지요” 하면 “틀렸어”하고 아이를 잡아먹을”’ 한다면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하고 결국 잡아먹을 작정이었습니다.

‘악어논법’이란 자기 위주의 궤변입니다. 악어가 그런 문제를 낸 것은 아이를 잡아먹기 위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물론 악어가 잡아먹고 말 거라는 속셈을 눈치 채고 맞는 답을 할지라도 악어는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본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트집 잡고 비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예수님의 행적이 마귀의 힘을 빌어 하는 소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악어처럼 자신의 속셈을 숨기고 위선과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마침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 앞에는 악어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집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늘나라에 대한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짐짓 예수님을 칭찬하고 나섭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예수님께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악어의 논법 처럼 좀처럼 빠져 나가기 힘든 올가미 였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매국노라고 소문을 낼 것이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신다면 로마 정부에 고발할 구실을 만들 심산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쪽저쪽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위선자들의 모습이 기세등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궤변에 휘말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일깨우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예수님께서는 인간 삶의 근본은 하느님이시므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 귀속된다는 신앙의 원칙을 분명하게 밝혀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하느님의 뜻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께 터무니없는 악어의 논법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저도 가끔씩 악어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어쩔 수 없잖아…,’ ‘세상도 다그러는데…’ 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은총을 거부하고 내 욕심과 만족만을 쫓아 사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속에도 교묘한 궤변과 탐욕의 악어가 한 마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삶을 정성껏 살아가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욕심에 한발을 디디고, 하느님께 다른 발을 디디고서 자기중심적인 논리대로 적당히 신앙과 일상을 넘나드는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영적 깨우침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의 뜻을 기준 삼아 사는 삶은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진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기사입력일 : 2005-10-16
[연중 제29주일 (가해)]: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제1독서 이사 45,1.4∼6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 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리라)
제2독서 Ⅰ데살 1,1∼5b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복 음 마태 22,15∼21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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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당신 사업의 도구로써 이용하십니다. 그가 악하거나 선하거나 하느님께선 당신 뜻대로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하느님도 되시며 세상 모든 것이 결국 당신의 것이요 당신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7세기에 유대 나라는 타락할 대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썩어 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는데 이때 이방인의 왕인 느부갓네살을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빌로니아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때려 부쉈으며 시 전체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백성 모두를 포로로 끌고 가서 혹독한 노예생활을 시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서 유대 민족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고생을 하며 많은 반성을 하자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건져 준 것도 고레스라는 페르샤 왕이 었습니다. 고레스도 하느님을 믿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그는 비록 우상 숭배자였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데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믿지 않는 이들을 사용하셨느냐? 그들도 결국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소련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를 보면서 그는 분명 하느님의 도구로서 이 시대에 큰일을 했음을 보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고 동구가 자유화되어 우리와 국교를 맺는 등, 세상이 이처럼 180도 바뀌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뛰어난 역할 때문입니다. 그 역시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카이사르의 것입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올가미로 묶어 두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속셈들이 다 허사로 돌아가자 이번엔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옭아매려고 했습니다.

즉,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옳지 않으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엔 굉장한 책략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조국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갖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큰 모욕적인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로마에 반기를 드는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해도 예수님은 걸리게 되어 있었고 저렇게 해도 예수님은 빠져나갈 문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진퇴양난 의 험난한 길을 그냥 뚫고 지나가십니다. 한마디로 넘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가져 오라고 하시며 돈에 새긴 초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참으로 명쾌한 대답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교묘한 술책을 아무 장애 없이 그냥 넘어 가십니다. 성서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 들도 그 말씀에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고 했습니다(마태 22,22참조).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무엇이고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세상의 것입니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하느님의 것이요, 선한 이도 악한 이도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에서 선을 일으키시고 선의 향상을 위해서 악을 이용하기도 하십니다. 악의 존재는 그래서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는다면 마귀가 하느님의 도구로서 모든 것을 다 빼앗을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마귀의 지배에서 고통받아야 하며,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면 불의한 심판을 우리 스스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선하게 살고 사랑하며 삽시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삶의 봉헌입니다.
 
 
기사입력일 : 200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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