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완성해야 하는 사랑 (요한1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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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dlwlsdud] 쪽지 캡슐

2007-03-03 ㅣ No.2871

<펌글>

 그 어느 누가 자신있게 주위의 신자들 앞에서 아래의 1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러한 말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17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울로 사도가 전해주신 사랑의 정의를
실천하고 있지만 ' 완전히 완성한 사랑 ' (요한1서 4:18 ) 으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하느님의 성령으로 새로 나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입장에 있어서, 하느님의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하느님의 성령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결국에는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속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주여,주여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여도 물러가라고 하실
사람이 많을 것이므로, 좁고 험해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이유도, 구원받았다고 속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 받는다고는하지만, 성서에 쓰여있는 믿음은,
 아브라함 같이 흠 없이 살려해서 흠 없이 살게 되는 믿음을 기준으로 두시고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2~3년 이상 믿고 살면서도 성령을 얻지 못하였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이라도 해야 하거나
 속단하는 사람들이 물세례를 받듯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 그리스도를 2~3년 이상 믿고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위의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 하는 다른 신자들과도 비교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도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라 하며 서로가 속단하게 되고, 그렇게 믿는 방향으로 성서를
 해석하게 됩니다. 신자들은, 없으면 소외감이 드는 탐심의 핸드폰 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나타내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성령이 필수적인 감투가  되어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때문에 
                             루가복음 18장 에서는
          8   ~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실 만큼의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그 믿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았다하고,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바울로 사도가 알려주신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조금씩, 조금씩
완전히 완성해 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고 있으므로, 이들은 분명히
사랑을 완전히 완성하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서 하느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았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요한1서 4장 17~18절의 내용은
사람이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으려면,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어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완성되어 있어야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다고
쓰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성령을 얻었다고 믿고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지만, 생각과 마음과 말과 행위로 죄 짓게 되는 일이
 끊이지를 않아서 바울로 사도가 가르쳐 주신 사랑의 정의를 완전하게 지키지는 못하고
살고 있을 뿐인 현실이라면, 이러한 사랑은 성령으로 인한 완성된 완전한 사랑이라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다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앞으로 하느님의 성령을 얻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으로 죄 짓는 일이 여전히 계속 생겨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신자들을 향해서 형제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겠다는 좋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인 만큼, 생각과 마음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어왔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하게도 되는 것이지, 완성된 완전한 사랑으로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생각과 마음으로 죄 짓게 되는 과연 비참한 사람으로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고 완전한 사랑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나쁜 본능인 죄의 법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게도 되는, 낡은 옷을 입은 비참한 사람이
성령을 담기 위한 새 부대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에,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와
 그 외의 행함의 완전한 것을 찾아서(사르디스) 흠 없이 사는 믿음이 되면
모든 사랑의 정의가 담겨진 성령의 법을 성령으로 받게되고
 성령께서 사람 마음의 나쁜 본능인 '죄의 법'을 이겨주시면, 불완전한 사랑이 되게 만들었던
마음의 나쁜 본능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성령으로 새로 나서 완전한 사랑이
 완성된다는 성서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 한다는 것은
사람이 창조 되어 번성할 때의 사람들의 기본적인 모습이었어야 했는데
 선악과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이 서로가 사랑 하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일일이 가르쳐 주신 것이므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임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서로의 잘못이나 실수를 용납하는 것도 수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로의 악을 용납해서 같이 행동하면 공범이 되는 것이므로
용서하라는 의미로 서로 용납하라 하시는 말씀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완전히 완성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심판 날을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기준으로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 받았고 성령도 얻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생각과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되는 비참한 현실에서 해방되지 못했다면,
열 처녀 중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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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1서 4장
16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20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21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18절,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완전한 사랑이 심판 날의 두려움을 몰아낸다고 분명이 쓰여있는데도
 생각,마음으로 죄 짓게 되는 불완전한 사랑의 신앙으로도 구원받은 사람이 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목자들은, 바울로 사도가 희미한 거울에 비추어 보이듯이,
 완전한 사랑도 희미하게 보이는 목자들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생각,마음,말,행동으로 죄 지은 때에, 주님께 죄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잠시라도 생겨나는 사람과,
 자신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흠 없이 사는 믿음을 따르는 믿음인지 아닌지는
주님이 판단하시는데도 구원받았다고 속단해서 심판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일부러 스스로 몰아내는 사람은 잘못한 일이 생겨나면 죄의식이 드는 사람이므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완전한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내어줍니다. 

 


 위의 20절에서 거짓말장이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 받았다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가능한 완전한 사랑이 완성된 일이 없으므로  생각,마음으로 죄 짓는 일이
여전히 계속 생겨나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일이 생겨나기도 해서
 언제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못되기 때문에, 심판날을 두려워해야 하는
구원받지 못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완성했다는 것이되고, 형제를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므로
주님 앞에서 거짓말장이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장이는 완전하지 못한 사랑을 누룩으로 부풀려서 완전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완전한 사랑을 완성했다는 말을 못하면서도 구원 받았다 하며 성서를 곡해해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므로, 주님이 '완전한 사랑을 하여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아시는 완전한 사랑이,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나누어져있다는 듯한 말이 되고 맙니다.
 불완전한 사랑은 유독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으로,  성령의 법이 없기 때문에 
' 불의한 생각과(마음) 말과 행위들이 ' 생겨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나라에서 오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으로 나누어 설명하실 만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때, 성령이 아직 내려지지 않아서 불완전한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 요한 사도는, 요한1서 4장의 '완전한 사랑'의 말씀으로
 사람의 불완전한 사랑에 대해서도 알려주신 것이 되었고,
바울로 사도 또한 성령을 받기 이전에 사울이던 때의 마음 상태를 회상, 분석하시며
  '나는 과연 비참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심으로,
사랑의 정의를 알았더라도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기 때문에
 잘 지키지 못할 수 있다는 불완전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 마음에 성령을 받으셔서, 마음에 내려진 성령의 법으로 완전한 '사랑의 정의'를
 가르치신 것이므로, 바울로 사도가 아직 우리에게는 거울에 비추어 보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우리도 마음에 성령을 받음으로 마음에 성령의 법이 자리잡게 되면,
 바울로 사도의 성령과 같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서로가 알아 볼 수 있듯이, 
'사랑의 정의' 도, 완전히 깨닫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두 사도 분들이
하늘의 완전한 사랑과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의 불완전한 사랑에 대해서 알려 주셨고, 
 요한1서 4장에는 불완전한 사랑으로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거짓말장이가 된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요한1서 4장 17절의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나 타인들 앞에서 자신이, 사랑을 완전히 완성한 사람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 사람들은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붙이듯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조금씩 주셔서, 조금씩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깁는 사람은 없다는 비유를 베풀어주시며
하느님이 성령을 보내주실 때도 그러하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이미 받았고 조금씩 계속 받아서 사랑도 나날이 완전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완전해진다 하면서 사람의 노력으로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고,
 주님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에 충분히 깁어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완전한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는 중이므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사랑은 말 그대로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사랑을 하게되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성령의 법이 담겨진
 성령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진 일이 아직 없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마음으로 믿고, 흠 없이 사는 올바른 믿음이 못된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고린토 2서 11장에는
4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바리사이파 목자가) 우리가 전한 것과는
    다른 예수를(재림하시면 자동차를 타실 듯하게 해석하는 성령론을) 전하고
    여러분이 받은 성령과는 다른 것을(가짜 성령을) 주며 또 전에 받아들인 것과는
    다른 복음을(크고 넓은 멸망의 문에 들어선 것인데도 좁은 문이라 하고 구원받았다하는 복음)
    전파하는데도 여러분은(이단 이외의 널리 알려진 교파의 신자들이 그 잘못된 구원론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까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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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주여,주여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여도
주님이 물러가라고 하시게 될 사람들은, 이 정도의 열성만큼 구원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주님을 마음으로 믿는다는 사람들이고, 구원도 받았다 하고, 여러 가지를 근거로 하여
성령도 받았다 하고, 선을 행하여 성령의 열매도 맺혔다 하겠지만
 그리스도처럼 완성된 완전한 사랑만이 구원을 자신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신앙의 업적을 쌓지만 결국은,
 생각과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되는 사람의, 불에 타 없어져 버리는 업적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실천하여도, 아직 흠 없이 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지 못하면
성령이 내려지지 않아서 생각과 마음으로 죄 짓게 되는 한계가 남아있기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잘 실천하려해도 주님이 단지 돌봐주시는 중의 사람 노력일 뿐이므로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업적을 쌓게 되고 결국엔 아까울 정도의 노력들이
 불에 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믿음으로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업적을 쌓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나쁜 일이 아니라 올바른 일이지만 성령의 법으로 완전한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의 업적이기 때문에 불에 타버리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불에 타지 않는 달란트로 부자가 되라 하신 말씀으로
풀이해야 하는 비유입니다.
 불에 타는 정도의 올바른 실천이 아니라, 불에 타지 않을 정도로 올바른 실천을 하려면
흠 없이 사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성령에 담긴 성령의 법을 얻어서
 생각과 마음으로 짓게 되는 일이 생겨나지 않으면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되므로
주님이 처음에 주신 불에 단련된 은혜의 '달란트'를 가지고서 많은 달란트로 늘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땅에 묻어두었던 그 한 달란트 마저 잃었던 일은,
주님을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받으라 하신 복음을 믿고 살았지만,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둠으로
 불에 타 없어지게 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실천하고 사는 믿음의 업적만을 쌓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게으른 종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 즉, 그 한 달란트 마저 잃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과도 같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이 잘 보이지 않는
 바리사이파의 죽은 신앙과도 같습니다.
바리사이파 목자는 성서의 좋은 말을하고 사랑의 정의를 율법같이 지키려 함으로써
 하느님의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라고하지만 바리사이파 목자는 생각과 마음으로 죄도 짓게 되는
불완전한 성령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때문에 바리사이파 목자는 사르디스 교회처럼 살았다는 말만 있을 뿐, 하는 일이 완전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풍조의 크고 넓은 문에 들어 선 신앙생활을 악하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자가 노인의 집에 선악과 같은 TV의 안테나를 달아주는 악행 등등...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양심)  

 


 오랜 신앙으로도 하느님의 진짜 성령을 얻지 못했다면 선악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므로
그 신앙생활은 주님이 보시기에는 악할 수 밖에 없고, 
 진짜 성령을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만큼 게을렀기 때문에
성서의 좋은 말을 가르칠 때면 주님께는 바리사이파의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을 구분하지 못해서 선악과 같은 컴퓨터를 고쳐 주는 바리사이파 목자는

주님 보시기에 악하고, 불로 단련해야 할 은혜의 한 달란트를 불에 타 없어지는 업적으로만

많이 실천해서 불로 단련된 달란트를 더 늘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활에 비한다면

게으른 종입니다. 또, 성서의 완전한 가르침에 비해 위선이 되는 세상적인 신앙 생활의 풍조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가르쳐서 본을 잘못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하는 바리사이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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