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rence Cecil Adler (1914. 2. 10 볼티모어~2001 런던) 미국의 하모니카 연주자.
미국의 하모니카 연주자. 볼티모어 출생.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웠으나, 하모니카로 바꾸어 1927년에 볼티모어의 하모니카콘테스트에서 우승하였다. 이듬해 뉴욕으로 진출, 클럽과 극장에서 활약하다가 스타가 되었다. 하모니카가 지니는 표현력과 가능성에 대하여 연구·개척하였으며, 레퍼토리도 클래식에서 포퓰러 전반에까지 다양하였다.
고전음악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회용 악기의 수준으로 격상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별히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정통 유대교를 신봉하는 집안 환경으로 인해 종교음악에 친숙하게 되었다. 비록 학교 생활은 불행했고 친구들로부터도 지나치게 신앙심이 독실한 아이로 따돌림을 당했지만 10세경 볼티모어에서 가장 나이 어린 칸토르(가톨릭 예배에서 합창을 선도하는 2~6명의 선창자)가 되었다.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부모로부터 피보디 음악원 입학을 허락받았지만 재능이 없는 학생으로 판정받아 퇴학당했다. 이러한 좌절은 오히려 그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11세 때는 부모의 동의없이 집안에 피아노를 들여놓은 다음 부모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며 아울러 하모니카 연주를 시작했다. 악보를 읽는 법을 몰랐지만 잡지를 팔아 모은 돈으로 음반과 음악회 표를 사서 열심히 음악을 들었다.
1927년 베토벤의 미뉴에트를 연주하여 메릴랜드 전국 하모니카 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 다음해 뉴욕 시에서 초창기 만화영화의 반주를 맡았으며 방랑자로 분장하고 보드빌 프로그램에서 공연했다. 관현악단의 협연자로 초빙되기 전까지 뮤지컬과 영화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독주자로 데뷔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장 베르제가 그를 위해 하모니카 협주곡을 써주었던 1940년까지도 악보를 읽지 못했다. 랠프 본 윌리엄스와 다리우스 미요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작품을 써주었다. 미국의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득세하는 동안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려 감시를 받았고, 일거리를 찾지 못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화와 텔레비전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으며 〈나의 연주법 How I Play〉(1937)·〈래리 애들러 편곡집 Larry Adler's Own Arrangements〉(1960) 등 그밖에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했다.
레리 애들러는 1914년 2월 10일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우스 오르간 이라고 불리는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배웠고 열 세살 때 하모니카 콩쿠르에 나가 베토벤의 미뉴엣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약 유명해 졌다. 그 후 영국 국왕 조지 6세,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앞에서 연주를 한 적도 있다.
1940년에는 음악을 더욱 폭 넓게 배우기 위해 에른스트 톱포 (1887-1964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작곡가로 미국에 망명함)의 만하에서 수학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1892-1974)는 애들러를 위해서 [하모니카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을 썼고, 이 음악은 1945년 11월 16일 애들러의 독주와 팔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초연 되었다.
그 밖에 영국의 저명한 작곡가 본 윌리암스(1892-1958)도 1951년 애들러를 위해 [Romance]를 썼고 아더 벤자민(호주 →영국, 1893-1960), 영국 작곡가 말콤 아놀드 (1921- ), 미국 작곡가 아더 베이커(1912- ), 애들러의 스승 톱포 등도 애들러의 의뢰로 하모니카 작품을 썼다.
한편 1965년 에딘버러 국제 음악제에서 독주회를 열어 인기를 넓혔고 이런 애들러에게 <하모니카의 제왕>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제왕이란 수식어는 화려한 기교를 바탕으로 대중 음악과 순수 음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폭넓은 음악성의 수유자 애들레에겐 적절한 것이다. 그는 엔터네이너로서도 매력적인 인물이다. 애들러는 영국 여자와 결혼해서 런던에서 살다가 2001년 8월 7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