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님 강연 / 제주, 평화의 전초기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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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inuit-_] 쪽지 캡슐

2012-03-31 ㅣ No.428




강우일 주교 "제주, 평화의 전초기지 되어야 한다"
[제주, 평화로 가는 길-강우일 주교] 다랑쉬굴 4.3유해발굴 20주년
전국학술대회 기조강연
 
2012년 03월 30일 (금) 18:17:45 강우일 주교


저는 미국에 있는 워싱톤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미국 정부가 거액을 투자해 세운 이 기념관에는

해마다 수백만 명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초, 중등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이고,

그 밖에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방문하며 2차 대전시에 독일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아주 상세한 자료와 데이터를 볼 수 있도록 잘 정리해 놓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시청각 자료만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 학살과 2차 대전시의 유럽, 주변국가들의

상황에 대해서 세미나도 열고 다양한 강좌를 개설해 많은 이들이 역사를 배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박물관을 미국 정부에서 세워서 운영할까?

우리의 질문에 관장은 박물관 입구에 붙어 있는 큰 사진을 보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사진은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이 유럽에 진주하면서 맞딱드린 강제수용소의 모습이었는데,

수용소 바닥에는 장작더미와 같이 유대인 시신들이 쌓여있고 살아남은 이들은 뼈만 앙상한 채였으며,

이를 바라보는 미군들은 총을 손에 든 채, 망연자실 그 참담한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관장은 그 사진을 보면서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그 참담함에 충격을 받았고,

인간이 다시는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국민들과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껴,

역대 대통령들의 지원 아래 이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다르지 않은 제주 4.3 항쟁



얼마 전 그 박물관을 다시 방문하면서 나는 금방 제주의 4.3을 떠올렸습니다.

규모와 양상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을 집단학살했다는 점,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무차별 학살했다는 점,

거의 인종청소에 가까울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국가 공권력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장기간 저질러졌다는 점,

그리고 주변의 대부분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안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은 침묵을 지켰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아주 유사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나치의 학살극을 홀로코스트라고 부릅니다.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양이나 다른 가축들을 불에 태워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바로

나치의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마치 번제물처럼 불살라 죽어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고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학살한 사례가 많지만,

무기를 들지도 않았고 아무런 적의를 보이지도 않은 민간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렇게 무참히 학살한 제노사이드(인종청소)는 많지 않습니다. 전쟁도 많은 생명을 죽이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로 서로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움으로써

정당방위라는 측면이 있어, 글자 그대로 살인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그런 전쟁조차도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것인가에 대해 문제제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 상황도 아닌데 양민을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최악의 범죄라는 데 오늘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에 참가한 일반 군인들은 상급자의 명령으로 전쟁에 참여했기에, 패전했어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일으키고 대규모 살상을 명령한 상급자에게는 책임을 묻는 것이

국제법에서 정한 형사재판입니다. 원래 국제법 위반은 민사재판으로 국한되어 있었지만,

2차대전 이후 전 세계를 관할권으로 두는 상설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고,

가장 중대한 범죄, 즉 집단 살해죄, 반인륜적 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를 대상으로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2차 대전 중에 저질러진 나치의 집단학살이 너무나 참혹한 비인도적 죄악이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이런 일이 성사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유대인들의 학살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뉘른베르크에서 국제형사재판에 넘겨졌고

일본인 몇은 동경에서 극동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에 회부된 죄에 대해서는 시효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2차 대전 이후 남미 또는 다른 나라로 도주했던 나치 당원들을 아직도 쫓고 있습니다.



학살의 교훈,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는 생명”



이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통해 인류는 역사 속에서 한 가지 크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고귀한 가치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박탈할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국가라 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마음대로 제약할 권리는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48년 12월 10일 유엔은 50개 회원국 공동의 이름으로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세계인권선언이 작성된 데는 세계 여러나라 국민들이 2차 대전을 치르면서

너무나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강요당한 데 그 출발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가 보기에는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한 무죄한 민간인 학살의 기억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인류가 다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확신이

여러 나라 지도자들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한 생물중에 유일하게 역사를 통해

진보와 발전을 이룩하고 문명을 일구어 온 존재다.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은 몇 만 년이 지나도 똑같은 상태에 머물고 있지만, 인간은 비교적 짧은

몇 천년 사이에 상상도 못할 만큼 온 세상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변화와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이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며 그 기억을 토대로

보다 진일보한 내일을 창조하려는 역사적 인식과 노력을 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과거 몇 천 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많은 발전과 진보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발전은 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평가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가치와 존엄을 새롭게 발견하고

격상시킬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등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상상못한 물건들을 만들었지만, 인간이 이룩한 가장 뛰어난 업적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로 성숙시키는 일을 해냈다는 점입니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다 똑같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풍요롭게 살았고 어떤 사람은 천한 계급에 속해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예로 살며 다른 이의 소유물이었고

같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나 권한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 채

마치 가축과 같은 가치밖에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가축 다루듯이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괜찮았고, 상품가치가 떨어지면 얼마든지 시장에 내다 팔고 사도 괜찮은

소유물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진보하는 존재, 인간.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고 자부하는 미국에서도 1860년대까지 노예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그런 제도 속에서 희생되고 고통당하는 다른 인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노예 제도 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계층 간의 모든 차별과 억압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 인격의 고유성과 가치, 존엄성을 온전히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회악이라는 사실을

인류는 차츰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20세기에 들어 민주주의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귀족이나 평민이

어떤 사회적 계급의 구분과 상관없이 모두가 천부적인 인권을 지니고 있음을 배운 것입니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도구나 종이 아님을 배우고,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권을 갖춘 존재임을 배웠습니다.

아직 나이어린 아이들도 어른과 똑같은 인권을 갖고 있고 존중해 주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역사속 많은 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세상의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숭고한 가치와 권리를 갖춘 존재인지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제주 4.3항쟁은 중요한 역사적 가르침의 터전
4.3을 통해 역사적 의미와 현재, 미래와의 연관성 찾아야



저는 그런 의미에서 4.3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역사적 가르침을 주는 배움의 터전이며

앞으로도 배워야 할 배움의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는 조선시대부터 중대한 범죄인이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상인의 행복에서 배제되고 쫓겨나는 유형지였습니다.

제주도민은 육지로 마음대로 도항할 자유도 박탈당한 준 범죄인들이었습니다.

4.3의 비극이 발생한 것은 해방 이후의 복잡한 정치사회적 혼란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앞선 오랜 역사의 무거운 추가 작용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서 제주도민이란 어떤 의미로 오래 전부터 2등 국민이었습니다.

특히 4.3이 일어나면서 육지에서 내려온 군경들에게 제주도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정상적인 법절차를 인체 생략하고 마을 단위로 포위해 집단 학살을 자행해도 괜찮은

그런 나라 바깥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지에서 파견된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좌익이념에 물든 무장세력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좌가 무엇이고 우가 무엇인지 전혀 구분도 못하는 농부들, 노인들, 부녀자들, 어린이들까지

무차별 학살한 반인륜적인 범죄를 국가 공권력의 기치를 들고 집행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민들이 이런 현실에 환멸을 느끼며 제주도를 떠나 타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제주도에 남아 있다가는 어떤 오해와 모함 속에 죽어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 연좌제에 걸려 감시와 사찰 속에 미래가 없는 감옥생활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나라가 우리를 버렸고,

이 땅은 우리가 살 곳이 못된다는 서글픈 깨달음속에 아예 다른 나라로 영구히 이주해 버렸습니다.



이제 4.3의 비극이 일어난 이후 64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우리는 그 역사적 진실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진실의 의미란 단순히 4.3에 대하여 국제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시각에서 그 사건의 현상적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4.3이 우리나라 역사의 여정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찾아내고 그것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상을 겪으며 다시는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싸움을 시작하면 서로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얻을 뿐이고

폐허만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서로 입으로는

날선 공방을 주고 받거나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전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킨다면

서로에게 파국이라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거의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인간입니다.



국가 공권력도 국민의 생명권 짓밟을 권리 없어
국가 시책, 국책 사업이 모든 것 정당화할 수 없다




4.3은 아무리 국가 공권력이라고 해도 국민의 생명권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무리 국가 안보라는 거창한 근거를 내세워도

국민의 생명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것을 4.3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기본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는 정부와 국가는

결코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4.3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현대사에서 4.19의거와 5.18광주민주화항쟁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가치가 국가나 정부의 권력이 갖는 가치에 우선한다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4.3은 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훨씬 더 인간생명과 그 기본권의 숭고한 가치를 역설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툭하면 국가 시책, 국책 사업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한다고 해서 결코 다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현대사를 살펴봐도

가장 많은 희생과 고통을 몰고 온 불의와 죄악은 국가가 공권력으로 저지른 경우가 태반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 나치, 군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아시아 대륙을 유린한 일본,

그리고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짖으며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넣은 소비에트 연방, 그리고 3대째 권력을 세습하며 백성을 기아와 가난의 고통 속에 붙잡아두고

있고 있지만, 5.16에 이어 30년씩 이어진 군사독재 시절 비밀정보기관을 통해 자행된

불법적인 사찰과 고문, 억압과 음모도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졌습니다.

제주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것은 4.3의 희생을 다시 짓밟는 것
4.3 희생자들의 무덤을 생명과 평화가 새롭게 피어나는 꽃밭으로...



제주의 땅은 4.3의 희생을 거름으로 참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3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생명들의 억울한 희생을 망각의 무덤속에 파묻고

거기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죽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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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희생자의 무고한 피에 물든 이 섬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군사기지를 세우려는 것은

그 희생자들의 무덤을 다시 한번 군화발로 짓밟는 행위요, 그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는 행위입니다.

4.3에 희생된 우리 선조들이 흘린 피만큼 그 후손인 우리들은 그만큼 더 철저히 폭력을 거부하고

무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평화를 열매 맺어야 합니다.

4.3 희생자들의 무덤은 생명과 평화가 새롭게 피어나는 꽃밭이 되어야 하고,

이 평화의 섬을 현대 첨단 무기로 가득 찬 군사기지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가공할 파괴력과 살상력을 가진 각종 미사일로 무장한 해군기지는 생명을 거스르는 죽음의 성채이며,

무력으로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자가당착이며 환상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상 평화가 무력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상대보다 더 강력한 무력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결코 평화가 보장되고,

무력이 전쟁을 억제하는 첩경이라면 최첨단의 무기와 최강의 화력을 지닌 미군이 왜 베트남의 전쟁을

막지 못했으며, 왜 오늘도 이프칸이나 이라크에서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4.3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피흘린 땅에서 이런 죽음의 성채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행위입니다. 이 4.3의 땅에 이념과 폭력을 뛰어넘는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구현해내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도약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주는 제주도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평화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제주를 군사기지로 만들지 말고 평화의 바위섬으로 만들어야만 우리는 4.3 희생자들의 고통과 한을

새로운 생명의 부활로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밑거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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