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또 다른 성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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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0-12-23 ㅣ No.1139

우리는 진실로

이 세상엔 불행한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모른다.

그들의 그 구체적이고 온 존재적인 현실의 불행 그 고통은,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면

곧 온 존재적인 신앙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니

그렇게 그리스도교,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대부분인 그들에게 참된 희망이 될 수 있으니

인류의 종교가 되고 주님이 된다.

그만큼 이 세상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종말론적 해방자가 되지못한다면

다른 어떠한 구원의 손길도 아니되는

참으로 비참한 삶의 조건에 처해 있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예수께서 선포하신 진복팔단의 구절들은

본 회퍼의 말 그대로

결코 시적(詩的) 표현어나 상징어로 끝나선 절대 안되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얻으려면 그들을 향해 선교해야 한다.

또 그것이 인류를

불행의 파멸적 저주에서 근본적으로 구해 내는 유일의 길이다.

사실 그분은 단순한 위로자가 아니라,

그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인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도 바치신 근본적인 개혁가이시다.

그분은 실질적으로 갇힌 이를 해방시키시고,

병든 이를 치유시키시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치신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현실에 있어

영생적 생명감을 줄 수 있으실 만큼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희망이 되셨다.

그러한 그분에게서 그 희망을 발견한 그들은

마치도 그분께서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듯 결코 그분을 버리지 않는다.

그분은 이미 그들에게 천국의 열쇠요 천국 그 자체이다.

그들은 외친다.

"지금은 나 굶주려 있지만

당신이 있기에 그날엔 한껏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나 헐벗어 있지만

당신이 있기에 그날엔 따스한 옷을 걸칠 것입니다.

지금은 나 울고 있지만

당신이 있기에 그날엔 활짝 웃을 것입니다.

지금은 나 추한 모습이지만

당신이 있기에 그날엔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나 불완전하지만

당신이 있기에 그날엔 완전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의미에서의 주님이시다.

거기엔 존재 그 자체로 드리는 기도가 있다.

고통이 주는 그들의 침묵은

현란한 우리의 기도보다도 더 한 힘을 갖고 있으며,

설사 성령충만이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그들일지라도

그들에 있어 하느님은 아버지 이상의 존재며,

하느님 역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계신다.

진정 그들의 침묵은 그 자체로써가 곧 "마라나타!"이니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단

그들에 대한 그분의 온 존재적인 응답으로 이뤄진 것이리라.

사실 출애굽에서나 베들레헴에서나

하느님은 그들 때문에 사랑으로 내려오셨으니,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구원의 역사는 이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 다가올 새 예루살렘 성전의 주춧돌도 바로 그들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보다 모자라는 것을 북돋아 주려 오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들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자라는 모든 것에로 다가가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삶의 쪽박마저 부서지고 깨트려져

아예 무얼 담을 그릇조차 없는 그들,

삶의 모든 것이 극히 모자라기만 하는 소외된 이들에게로 가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바로 그곳을 교회로 삼아

거기에 구원의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렇게 교회가 "인간을 성전(聖殿)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특히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화 되기 위해선

탐욕 곧 맘몬에서 해방되려면

그것에 대하여선 부적(否的)인 존재인 가난한 이들을 앞세워야 한다.

즉 가난한 이들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아니 궁극적으론 가난 그 자체

곧 나눔의 삶이 온전히 실천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맘몬이냐? 그리스도이냐? 교회는 선택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가장 급선무이고도 또 영원히 내려진 의무는,

길 잃은 양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로부터 소외 받은 이들을

사랑의 끈으로 다시금 사회에다 묶는 것이다.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분부하신 말씀도 바로 그것이다.

진실로 그 자신 대가를 치를 능력조차 없어

거져 줄 수밖에 없는

그런 이들에게로 찾아가 주라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 교회 역시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서라도

우선 먼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은

"복지시설을 확충하라!

노동권을 보장하라!

농민을 위한 농업 대책을 세워라!"고

말로써 압력을 넣거나 떠드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살며 도우는 것이다.

난 때때로 느껴 본다.

그리스도인들이 말로써 요구하고 떠드는 그만큼 만이라도

자신부터가 먼저 실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하다면 그 말엔 더 힘과 빛이 깃들일텐데 말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세례자 요한은

그 스스로 직접 광야에서 살았었다.

그러기에 그토록 폐부를 찌르는 말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세계의 세례자 요한들은

광야는커녕 귀족적인 생활에 젖어 있으면서

입만 크게 벌리려 한다.

우리 교회가 이른바 정치현실에 개입하려 할 때에도,

교회는 그걸 정치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사회현실의 차원에서 모든 걸 바라보고 생각하고 다루어야 한다.

정치적인 안목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심,

더 나아가 영성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대해야 한다.

그럴 때 권력에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우리가 정치현실에까지 관심을 두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단순한 사회변혁만이 아니라

오직 사회를 구원에로 이끌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 대통령이 나오고

그를 상대하는 야당 총재까지 신자라 하여

또한 단순히 정치적 발언권이 세어지고,

사회적 위상이 높아진다 하여

교회가 곧 참되어지고

하느님 앞에서와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의 참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 사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가 꺼리는 일들을 몸소 발 벗고 행하고,

그 사회의 아픈 곳 병든 곳 어두운 곳에 서슴없이 뛰어들어

사회치유를 스스로의 몸으로 이뤄 줘야 한다.

결코 말로만 떠드는 자 되지 않도록 항시 자기감시를 해야 한다.

과연 생각해 본다.

수 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과연 이 사회현실이 이 모양일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의 중산층화, 아니 상류층화 현상을 유념해 볼 때

결국 이 모든 건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아닐까.

위로만,

오직 위로만 치닫는 그리스도 교회,

이젠 겸손하려고 해도 내려올 사다리조차 끊겼다.

왜 교회는 아픔에 갇힌 가난한 형제들은 방치하는가.

교회를 향한 비방엔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가난한 그들을 내버려두어

그들이 하느님을 향해 내뱉는 온갖 아픔의 절규엔 왜 침묵하고 외면하는가.

하느님 아버지를 욕먹게 하는 교회가 과연 그 자녀들의 모임인가.

비만증에 걸린 사제가 탐욕의 죄악성을 설교할 때,

복음 말씀에 빚대어 부자들을 경고하는 교회가

스스로 더더욱 물질적 번영을 꾀하며 성장의 기치를 높이 들 때,

또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신도들을 볼 때,

그 모든 것은 날 슬프게 한다.

진실로 교회는 보다 진실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비바람을 피해

그래도 교회를 믿고 그 품 속으로 찾아드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소외계층들을

성전을 더럽힌다는 오직 하나의 죄목으로

마구 단죄하며 채찍을 휘두르며 쫓아내는

우리 교회의 ’지금 바로 여기’의 모습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기 위해 채찍을 휘두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수한 열정의 모습과

자꾸만 대비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참으로 쫓아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참으로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어떤 이유에서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그토록,

당신의 외아들마저 몸소 보내실 만큼

끔찍이도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람’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과연 자신의 품을 더럽힌다고

맨발로 뛰어노는 자식을 쫓아내는 어미나

학생들이 교실 바닥을 더럽힌다고

교실 밖으로 쫓아내는 스승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우리 교회는 분명

자신을 인류의 교사요 자모(慈母)라고 떳떳이 고백하고 있다.

진실로 교회는 보다 진실해져야 한다.

참으로 교회는 소외 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완전히 이뤄져

극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설사 모든 교회가

아예 판잣집 수준이 되었을 지라도,

아니 교회건물 자체가 사라질 만큼 되었을 지라도

거기에 복음과 복음정신이 살아 있다면,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될 수 있으리라.

진실로 그들과의 동고동락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교의 본질 그 정신적 활력은

생명력을 계속 지닐 수 있는 까닭이다.

말씀하시길,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고,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진 못하리니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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