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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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분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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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5-22 ㅣ No.186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아브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그래서 현실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들을 마치 눈에 보이 는 것처럼 소망하고 유지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 이란 히브리서의 정의대로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요 증거라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해서 이러한 믿음을 심으시는 중이다. 마치 머리가 하나도 없는 대머리에 의사가 머리칼을 하나하 나 이식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실상과 증거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증거만을 가득히 않고 사는 그래서 믿음이라곤 완전히 없는 빤질빤질한 아브 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믿음을 하나하나 심으시는 중이다. 그 머리칼이란 바로 자손과 땅이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 에게 자손 그 자체, 땅 그 자체를 주시려는 게 본래의 목적 이 아니다. 자손과 땅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시려는 게 하 나님의 목적이다. 자손과 땅이 많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이 있거든,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냐? 없지...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 재산, 땅, 자손 등을 믿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기 어렵다. 그리고 이미 현실화된 자손들과 땅, 눈에 보이는 자손들과 땅은 믿음의 결과는 혹 될 수 있겠지만 믿음의 대상은 될 수가 없다. 믿 음의 대상이란 우선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아브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수없 이 많은 눈에 보이는 우상들 속에 파묻혀서 살고 있는 아브 람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하나님을 알게 해 주기 위해 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여러 가지 경험을 시키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절대자가 자기를 지금 이끌고 있다 는 깨달음을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12장에선 기근과 바 로 왕으로부터, 13장에선 조카 롯과 헤어지면서, 14장에선 전쟁에서 구해 주심으로 이제는 아브람이 삼척동자라도 하 나님을 알겠지 해서 테스트를 해 봤거든... 그 테스트의 결 과가 15장에 드디어 나타났는데 아브람에게 드디어 믿음이 라는 요소가 생기기는 했는데 그 믿음에 그만 두려움이라는 불순물이 함께 섞여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아 브람에게 하나님은 자손과 땅이라는 머리칼을 심고 또 심 고, 심고 또 심어서 믿음이라는 걸 뿌리내리도록 사역을 하 시는 중이다. 아브람은 한동안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부하 엘리에셀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길 '네 몸에서 날 자' 로 하여금 후사로 삼는다고 하셨고 땅에 대 한 약속도 애급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주겠다고 확실 히 못 박으셨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기까지 끌고 오신 거 다. 자, 그러면 16장엔 어떻게 될까?

 

양아들을 통해서 자손을 얻는 게 아니라구....? 내 몸 에서 자식이 나온다구...? 좋다, 믿어보자, 그런데 금년 내 나이 드디어 85세(16절)... 내가 무슨 힘으로 자식을 낳냐? 인공수정을 하실래나? 아니면 비아그라를 주실래나...? 남자 는 숫가락을 들 힘만 있으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더니... 아 니, 나는 또 그렇다치고 마누라 사래는 또 어떻고? 달거리 도 갱년기도 벌써 지났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는가...? 아브 람은 아마 벼라 별 생각을 다 했을는지 모른다. 도대체 하 나님은 자손을 어떻게 내 몸에서 주시겠다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 날... 75살 먹은 할망구 사래가 지혜가 번뜩이는 제안을 했다. 애급에서 얻은 노비 하갈과 동침하 라는 거다. 이 후의 이야기는 만득이 너도 잘 알지? 몸종 하갈이 아브람의 자식을 임신한 거다. 그러자...

 

잠잠하던 아브람의 집안이 갑자기 난리통이 벌어졌 다. 그돌라오멜의 5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던 것보다 더 심 각한 전쟁이 바로 아브람의 집안에서 벌어졌다. 하갈은 지 주제를 모르고 상전인 사래를 멸시하고 사래는 사래대로 존 심이 상해서 있는대로 신경질을 다 부리고... 낫살이나 먹은 할망구나 젊은 년이나 똑같다, 똑같애... 날마다 이 싸움이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아브람은 중간에서 미칠 노릇인 거라... 사래의 제안으로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할망구 사 래를 통해서가 아니고 젊은 애 하갈을 통해서 자손을 주시 겠구나... 무릎을 치고 감탄을 하면서 그래...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도 내 몸에서 나오는 자식이지 암 그렇구 말 구... 해서 하갈과 동침을 하여 드디어 하나님이 자손을 주 시마고 약속하신지 10년만에(3절) 임신 사실을 알고 하늘을 날아갈 듯이 좋아했거덩... 그런데 난데없이 사래와 하갈이 치열한 전쟁을 날마다 벌이는 거였다. 사래의 하소연과 하 갈의 불만을 들은 아브람은 난감했겠지, 아브람이 말 한마 디만 하면 간단하게 정돈될 문제인 듯 한데 사실은 아브람 의 입장으로서도 그 말 한마디가 쉬운게 아니다. 사래를 택 하자니 자기 애기를 임신한 하갈이 울고 하갈을 택하자니 수 십년을 같이 살아 온 사래가 우는구나, 어느 한 쪽도 포 기할 수 없이 중요하다. 휴... 한숨만 내 뿜고 있는 아브람의 태도에 잔뜩 불만을 품은 사래가 최종 선언을 한다. "... 당 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절)

 

사래는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은 했으 면서 사실상 하나님 보다 앞서서 지가 먼저 판단한다. 사래 를 학대하고 내 쫓아버린 거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영감태 기 아브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꼴을 두 눈뜨 고 보지를 못하겠는데 이 영감이 자기 맘대로 하래네...?(6 절). 고민하는 아브람,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아브람.... 그러 자 사래는 때는 이때다! 하고 기냥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 럼 사래를 추방시켜 버린 거다. 인정도 사정도 없어, 아브람 이 그렇게 기다리던 자식을 임신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질 투와 증오에 잡혀서 학대의 강도를 확 높였다. 드디어 하갈 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간다, 사래의 판단은 남편이고 자 식이고 하나님의 언약이고 뭐고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까? 눈에 뵈는 건 미운 하갈 뿐이다. 호오... 그 할망구가 여 자가 하는 짓 다 하네...! 하갈은 어땠나? 아무리 애급에서 팔려온 몸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고 판단이 있는 여자다. 맨날 상전 사래의 시중이나 들고 살게 될 줄로 알 았는데 뜻밖에 어른 아브람의 부름을 받고 동침하는 영광을 누리고 그 뿐아니라 어른의 자식까지 낳게 되었으니 이제 팔자는 상팔자가 되었다. 이제는 비천한 몸종이 아니고 사 래와 맞먹을 수 있는 안방마님이다. 우와....!

 

사래는 영감 아브람의 올바른 처신을 원했다. 그건 사래와 하갈 사이에서 아브람의 태도가 분명해야 하는 거 다. 이는 사래가 요구하지 않아도 당연히 아브람이 취해야 할 태도였다. 하나는 몸종이며 다른 하나는 엄연한 조강지 처니까.... 그런데 아브람은 하갈이 단순히 몸종이었을 때는 그냥 몸종으로 대하기 쉬었으나 자기의 애기를 하갈이 임신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럴 수 없었겠지, 그래 서 혼돈이 생겼을테고... 이 때문에 조강지처의 안방 권위에 도전을 당한 사래는 아브람에게 애매한 태도를 더 이상 좌 시하지 않고 강경한 요구를 했다. 이 요구는 아브람에게 향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향한 것이었다. 즉 "당신과 나 사 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한다" 는 것이다. 이는 아 브람이 사래와 하갈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기 때문에 하나님 께 직접 호소하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나(사래)를 택할 것이냐 하는 거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할 것이면 하갈이 안방 주인이 되고 자기는 칵 목메고 죽던가 무슨 결단을 내리겠다는 거다. 그 러나 사실은 자기가 목을 칵 메고 죽는 선택이 아니고 하갈 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도록 학대를 가했 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서 판단하시기 전에 아브람은 사래와 하갈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했어야 할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까? 그러면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일까? 그러나 어느 선택도 완전하지 못하다. 제 삼의 선 택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다. 솔로몬에게 시 험이 왔다. 이 아이가 어떤 여인의 자식일까? 이 여인이냐, 저 여인이냐? 솔로몬은 둘 중에 한 여인을 선택한 것이 아 니고 제 삼의 선택을 했다. 그 제 삼의 선택에 백성들은 놀 라고 그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었음을 보였다. 예수에게도 시험이 왔다. 이 여인을 돌로 칠 것이냐 말 것이냐? 사람들 은 미련해서 많은 경우에 둘 중에 하나를 가리는 태도를 요 구하지만 그 요구가 얼마나 잘못인가? 이 때에도 예수는 제 삼의 선택을 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 제 삼의 선택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다. 자, 그러면 사래가 하 나님께 요구한 선택 당신 아브람이냐 나 사래냐? 하나님은 이 때도 제 삼의 선택을 하신 거다. 아니, 하나님이 선택을 하시기 이전 힘없는 하갈은 주인 사래의 학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 하갈을 잘 달래서 다시 사래에 게 돌려보내고 사래에게 복종하라고 하신다(9절).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판단은 사래처럼 아브람 이냐, 사래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식의 의 요구에 응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래를 여전히 아브람의 조강지처 로 인정하시고 사래의 몸을 통하여 아브람의 자손을 주신다 는 약속을 계속해서 존중해 나가실 것이다. 그러면 하갈은 어떻게 하시나? 하갈은 하갈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다. 하갈의 몸에서 나올 이스마엘과 이스마엘을 통해서 많은 자 손이 나온다는 거다. 하나님의 판단은 사래의 떼거지판 요 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일회용 땜질적인 해결방식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 역사 그리고 인류 전 역사에 영향이 미치는 판 단을 하신 거다. 하갈의 자식 즉 이스마엘의 많은 자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의 사역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친 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의 아랍제국으로 세계적인 상황에서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왜 하갈에게도 많은 자 손을 허락하셨을까? 하갈의 몸에서 나오는 자손들과 사래의 몸에서 나올 자손들의 대결 양상을 우리도 지금 중동지방에 서 보는 중이다. 들나귀 같은 이스마엘의 자손들, 그가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은 또 그를 친다는(12절) 으시시한 자손들을 많게 하신 거다. 왜 하나님은 이런 판단을 하셨을 까?

 

너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치고 여인의 후손은 너의 후손의 머리를 칠 것이다(창3:15).... 가인의 후 손과(창4) 셋의 후손(창5), 노아의 후손과 니므롯의 후손(창 10), 그리고 사래에게서 나올 이삭의 후손과 하갈의 몸에서 나올 이스마엘의 자손... 이 두 세력은 항상 대결하며 이 세 상에 살아왔다. 이 대결 양상을 사도 바울은 다시 약속의 자녀(갈4:28)와 계집종의 자녀(갈4:31), 진노의 자녀(엡2:3)와 사랑의 자녀(엡5:1), 빛의 자녀(엡5:8)와 멸망(지옥, 마귀)의 자식(마23:15, 요17:12, 행13:10)으로 표현했으며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와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판단은 사래가 요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있었고 사래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있어 왔다. 그렇다면 우 리는 사래가 하나님께 요구한 판단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뭘까? 사래가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판단을 요구했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은 사래의 요구에 상관없이 사래의 기대치 보 다 더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사래의 요구처럼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서 하나님이 판단하셔야 할 일이 없다. 왜냐? 아브람과 사래는 부부요 수 십년을 이미 함께 살아 왔으며 부부는 한 몸이므로 아브 람과 사래 사이에 어떤 사이 자체가 있으면 않된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서 무언가 판단을 하신다면 그건 아브람과 사래 사이를 갈라놓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 니다. 그렇게 되면 이혼밖에 더 하겠냐? 이혼까지는 혹 않 가더라도 사실이혼 상태는 얼마든지 야기될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의 판단은 아브람과 사래사이에서가 아닌 사래와 하 갈 사이에서 이루어 진거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래를 택 하고 하갈은 버렸다는 식의 판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니 더 본질적으로 얘기하면 여인의 후손과 너의 후손 사이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며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그리고 빛 의 자녀와 어둠의 자식 사이에서 판단하셔야 할 일이다. 하 갈을 다독거려서 다시 사래의 수하에 보내셔서 이스마엘을 출산하게 하시고 또 이스마엘의 자손을 많게 하시는 모습은 마치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차라리 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 은 이들을 키우시는 거다. 왜 그러실까? 하나님은 이 이스 마엘 자손들이 필요하실까? 그렇다면 뭣 때문에...

 

하갈이 다시 돌아와서 아브람이 좋아했을까? 잃을 뻔했던 자식이 돌아왔으니 당연히 좋아하겠지, 사래 역시 하갈의 몸에서 태어나는 자식을 원했었기 때문에 하갈의 돌아와서 복종하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여기 서 잠깐...! 하나님의 판단의 또 다른 측면을 보자, 창세기 21장에 드디어 아브람과 사라(사래) 사이에서 이삭이 출생 하고 22장으로 넘어가면 그 무지무지 귀한 이삭을 하나님의 명에 의해 번제로 바치는 사건이 나온다. 그 때 아브람이 어떻게 이삭을 바칠 수 있었을까? 이삭이라는 자식이 귀한 건 천하가 다 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아브람에게는 무지 무지 귀한 자식이다. 이스마엘도 아브람의 나이 86세에 난 자식이요 하나님의 자손에 대한 약속이 있은지 무려 10년 정도 지난 다음에 얻은 자식이다. 이삭이 최고로 귀한 자식 이라면 이스마엘은 두 번째 귀하다. 그러나 그 비교도 이삭 이 태어난 다음에 이야기지 이삭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땐 최고로 귀한 자식이며 어떤 재산이나 명예보다도 이스마 엘이 더 귀하며 아브람 그 자신보다도 더 귀한 자식이다. 이런 귀한 자식이 지금 아내 사래의 학대 때문에 쌩 이별을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아브람이 맞았다. 자식을 임신한 하갈이 도움의 눈길을 아브람에게 보내고 아브람은 그 눈길 을 뼈가 져리도록 아프게 느꼈지만 분노하는 사래를 만류하 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이런 최악의 상황만큼 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 이니었을까? 이러한 아픔... 이건 바 로 장차 있을 이삭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아픔을 예고한 것 이며 사전에 대비하는 훈련을 겸했을 것이다. 하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종의 뱃속에 있는 자식을 포기하는 아픔 을 아브람이 미리 겪지 않았더라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아브람은 자손을 많이 갖기 이전에 이미 자식을 포 기해야 하는 훈련을 두 번 세 번이나 거쳐야 했다. 창세기 21장에는 14세까지 키운 이스마엘을 정말로 내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이 훈련이 바로 아브람이 겪는 화염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이렇게 끌고 다니시는 중이다. 그가 저 절로 어느 날 갑자기 이삭을 바친 미친놈이 아니고,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이 거저 되는 일이 아니 고 가슴이 메이는 경험을 많이 당하면서 그 마음에 변화와 깨달음이 오는 거다. 아브람 뿐만이 아니다. 사래의 몸에서 낳게 될 이삭과 그의 자손들은 수 천년에 걸쳐서 아브람이 겪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픔을 당한다. 이 아픔을 당 하면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많은 선지자들이 배출된다. 그 러면 이 이삭의 자손들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바 로 이스마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이스마엘 자손을 사용하고 기타 이방인들을 도구로 써서 이삭의 자손 들을 화염검의 중심부에 몰아넣고 훈련시키는 일에 사용하 신 거다. 이스마엘 자손이 아니면 이삭의 자손들은 하나님 을 알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다.

 

만득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을 쉽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기도원에서 혹은 부흥회에서 혹 은 성경공부 모임에서 믿습니다 를 연발한다고 믿음이 생기 는 게 아녀... 믿음은 삶에서 생기는 거다.  설교 준비 는 기도와 성경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기도와 성경 보다 더 중요한 삶에서 준비되어야 한다. 설교 준비한답시고 토요일 엔 아무것도 하지않고 오직 기도와 성경만 가지고 씨름하는 거...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진정한 설교 준비는 일주일 내 내 몸과 마음으로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 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준비된 설교는 아무 때나 아무데서 나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힌 말씀들을 발산할 수 있게 한 다. 삶에서 깨닫는 바 없는 기도와 성경은 오히려 교만하고 외식적인 바리새인으로 만들뿐이다. 그런이들은 원고가 없으면 벌벌 떤다. 삶에서 배우고 깨닫고 변화된 사람에게 비로서 기도와 성경이 제대로 먹혀들어 간다. 화염검을 화 염검으로 아는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걸 주신다. 자식을 포 기하는 경험, 재산과 명예와 존심이 파괴되는 아픔, 이런 것 들이 믿음으로 작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경험과 아픔이 없인 믿음도 없다. 하나님의 판단은 믿음을 주시기 위한 판단이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 사이가 아닌, 나와 너 사이가 아닌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한 판단을 날마다 지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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