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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기도에 대해서 도통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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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59.86.229.*]

2008-04-03 ㅣ No.6526

 
 
   † 찬미예수
 
   님의 글이 아래의 자매님의 글과 같이 대채적으로 진솔하고 보편 신앙인인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담을 청해주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신앙이 깊은 사람들 또한 님의 글을 싫어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절실하다는 표현도 공감합니다(동감 : 느낌이 같은 것, 공감 : 생각도 같은 것, 동의 : 둘다 달라도 같을 수 있는 것).
 
신앙 초심자들은 자신을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어느정도 수련을 쌓은 이들은 이웃을 위해 더 많이 한다 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다 풍요롭게 함께하기 위한 디딤돌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해 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일단 단순하게 믿음 다음의 따름, 따름 다음의 닮음이 이어지는 신앙인의 완덕 여정이 있겠는데, 여기에서의 따름은 일종의 가교 같은 것이겠지요. 즉 따르게 해 주세요. 역시 상대방에게 강요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당당하면 더욱 자신감을 앞세워 그리 되겠습니다만, 어느 면접관의 내면에 계신 하느님과 면접자인 내안의 성자와의 대화속의 그것을 여하히 귀 기울이느냐의 관건이 또한 따라야 하겠지요. 이야기가 복잡해지려 하는군요.
 
무엇을 바라는 기도는 결코 수준이 낮은 기도가 아닙니다. 무엇에 감사하고, 또 그 무엇에 대하여 찬미할 수 있는 기초 공사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다른 뜻이 계셔서 우리를 더욱 수련에 수련을 더해 주시는 것 우리는 어렴픗이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루치펠에게 자주 현혹되기도 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내 마음(영혼+이성등)을 일치시키고 싶은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살인마였던 유영철도 그래서 지금은 그 피해자 가족중 한 분에게 용서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어 종신형 독방에서 종일 기도할 지도 모릅니다. 천주교를 저주하고 개신교와 갈라놓은 장본인 칼벵(장로교 창시자)파의 이승만, 김영삼을 거쳐 현 이명박 대통령 또한 국민을 섬기겠다며 최근의 극악 무도한 아이들 살인사건과 관련하여서도 사형 제도를 부활 시킬 조짐을 보이더군요. 역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보다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기도에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와 같은 것이다 하는것 역시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성령의 은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악령에 현혹되어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길흉화복을 점지 받으려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관심있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이르시길 머리에 칠성사와 관련있는 일곱 구멍이 있다 하시며 '예효, 나도 참 잘도 갖다 붙인다! 하여 신자들을 웃긴 사례를 기억해 봅니다. 그리고 나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가 지체로서 배설구가 두개가 더 있어 '9라는 완전한 숫자도 있군...'이라는 묵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9'다음에는 다시 첫걸음의 '1'이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 가운데 모두를 비운 '0'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0'에 대하여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는 사람들은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마땅히 감사를 또한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느님 뜻데로 될것이라는 생각과 따라서 기도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묻는 것은 그 함정에 대하여 혼돈감을 갖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를 참례하기보다는 보기를 선호함으로써 장차 천주교를 움직이는 내부 8%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엄정한 법칙에 의하여 걸려 넘어지는 중이거나 걸려 넘어질 사람들의 보편 함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그리고 하느님 행세를 하는 사이비 교주들 또한 모든것이 하느님 뜻이라며 사기를 쳐 혹세무민으로 물욕등을 챙기고 있는데 대개의 고통중에 우리는 용서의 과정속에서 분노라는 것을 만나 '0'보다는 당장 '1'로 출발하여 크고 작은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업어 매치기' 또는 '패대기' 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결코 그것을 무리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님이 의심하는 것은 기도가 부족한 어떤 피 상담자에게 역시 기도가 앞서는 고수들의 조언 속에서의 격차로 인한 혼돈에 대하여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개 이런 경우는 '나 이러 이러해서 기분 참 나빠'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상대방 입장을 고려치 않고 '너 무조건 참고 기도해!'하는 성급한 조언들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는 남, 녀 관계의 사고의 발로등이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와 하느님의 대화가 기도라는 논리는 사탄도 하느님과 대화하기에 좀 더 정확한 신앙인의 자세로서는 '나와 하느님의 화해'가 기도라고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칠성사는 예수님 탄생으로부터의 기원이 시작된 2008년 신약 시대를 통하여 순교자들을 위시하여 잘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지요.
 
마땅히 기도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고 즐겨야 하는데, 어린 아이들과 같은 우리가 그 방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기도를 하느님께 무엇을 조르는 도구로도 쓰고 있는데 대략 청소년기쯤에 이른 신자들은 분심이 오면 자기가 먼저 지쳐 달아나도록 내비두는 것도 발달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님께서 질문하신 굵은 글씨를 그대로 인용하여 답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가 절대신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사람과의 대화라면 그것이 당연히 동등한 위치의 대화가 될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라도 하느님께 부탁하는것으로 귀결되는것이 기도가 아닌가?  하물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주세요 하는것도 결국 무엇을 바라는 기도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만약 순종하지 않게 되었을때 이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른말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할 수 있는것인가.  또 만약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의 뜻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구원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신앙을 통한 영혼의 구원은 결국 하느님이 정하신 일이니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구원받을자와 버림을 받을자로 나뉘는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기도는 무슨이유에서 해야할까?  모든것이 정해있고 하느님의 뜻대로 되는것인데..."
 
먼저 님의 이 이야기는 100% 합리적인 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즉 완전한 주님의 은총 99%에 지체의 자아 1%가 되어 100%가 되었는데 여기서의 100을 주님께 다시 의탁하는 자새로서의 0으로 보는 자세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몸의 언어들을 보더라도 하느님을 닮은 머리와 피조물을 닮은 지체들의 대화속에서 역시 동등한 위치의 대화가 될 수 없으나 동등한 대우를 향한 여정을 위하여 어디론가 함께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라도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도 마땅히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단(반석, 베드로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위에 그것을 올바로 쌓아 바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러한 기도중에도 악마는 수 많은 분심을 주고파 안달 복달을 할 텐데 우리가 과연 얼마나 경계를 준비하는 작전 장교가 되려고 노력했는지 성찰도 필요할 것입니다. 매서운 어두운 겨울밤 강가의 칼바람 속에서의 경계 작전을 수행할 때는 더욱 몸을 사리기도 하겠지요. '하느님 뜻에 순종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이조차 무엇을 바라고 있다는 분심은 바리사이들파이 잘 써먹는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때때로 주변의 더 아픈 이웃을 보내주시어 뜨거운 한국인의 가슴에 엄존하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때에 순종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은 무얼까요? 일단 질문하신 분의 심리 상태는 물이거나 불이거나 하는 또는 물이거나 기름이거나 하는 흑백논리가 느껴집니다. 하여 순종하지 않음은 하느님의 논리가 아니다라는 사고를 토대로 모든이들의 영혼 구령(선교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태초로부터 하느님이 정하신 것이다 하는것은 합당하되,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천국행과 지옥행 승차권이 배부되었다는 논리는 사이비들에게 속은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도 입증 되었듯이 천국행 대합실로 비유할 수 있는 연옥도 있고 어떤 신부님께서 제시하신 연옥 관련 성서는 마태 5, 25 / 2베드 2, 9 / 마태 12, 32 / 1요한 5, 16 / 요한 12, 48 / 마태 16, 27 / 마태 5, 26 / 1 고린 3, 13 / 집회 7, 33 / 묵시 21, 27 외에 '연옥 사화'라는 책에 대하여 찰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성모님처럼 곰곰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신성과 인성이 하나되어 오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누군가 역시 체험을 받았을 때는 '주님의 부활을 그대로 믿다가도 점차적으로 변질되어 다시 그것을 보고서야 믿으려는' 일종의 답습을 하기도 합니다. 이 때에도 사랑은 회심으로 진화하는 생명체임을 굳게 믿는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만고 불변 및 영원 불멸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님이 신앙을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고 하셨는데, 이럴 때는 자신만을 위한 정체감에서 헤어나오고자 나보다 더 불행하거나 아픈 이웃과 그 고민을 나누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신앙을 버린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니 이왕이면 귀신발든 사람들도 모두 이기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빽을 버리지 마시고 그런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란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문은 두드리면 반드시 그 문지기이신 베드로 성하께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은 님처럼 고민할 여력이 없습니다. 일단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을 보다 하느님께 더 의탁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교가 식은죽 먹기란 것을 잘 아실것입니다. 또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사람들의 여생의 수발이 되고 싶은 일종의 욕구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신앙은 사실 설명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귀기울이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주 설명으로 듣고파도 하기에 하느님의 말씀인 성령의 감화로서 이루어진 성경을 접할때조차도 설명 설명 설명이네!~라고 혼돈을 만날 수도 있는데 보편의 우리는 또한 성경안에서의 새롭고 막강한 힘을 얻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님 역시 최근 좋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하였는데 하느님은 결코 기도하거나 말거나의 사고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님과 이사람의 기도가 부족하면 그것을 쌍날칼처럼 다른 열심한 사람에게 배분하여 주시고 또 그사람이 다시 꼴지가 되면 혹여 우리가 첫찌가 되었을 때 기도와 선행을 즐겨 바치게 허락해 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기복적인 기도 역시 좋은것이 아니기 이전에 교회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끼리 끼리가 공존할 수 있으니 요는 우리가 얼마나 이 한생을 뜨는 오늘을 즐겨 최선(최고의 선)을 다할 수 있겠느냐가 일종의 숙제일 것이며, 그것을 여하이 관심 갖을 때 역시 행복의 첩경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믿는 신앙이란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단이니 결국 기복적인것이 아닙니까?라는 발상은 자기 가족만 챙기는 개미같은 사람, 이웃과도 보다 함께 하는 꿀벌같은 삶, 거미같이 어둠속에서 약한 곤충을 잡아 먹는 삶의 태도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가지 태도 역시 우리 마음속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꿀벌같은 삶이 제일 좋은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러워하기보다 내것으로 만들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여겨두십시오.
 
기복적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때 어떻게 해야하는것입니까?라고 물으셨는데 그럴 때는 더 고통스럽고 절실한 이웃을 만나면 됩니다. 일단 이조차 어렵다 느껴진다면 그 생각도 내려놓은 침묵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말과 행위만 침묵하면 기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고통 받는 이웃을 만나게 되면 그들의 폭포수와 같은 사랑을 함께 맞기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함께한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입니다. 내가 이루려던 기도+성사+공동체+봉사+공부생활의 조화가 새로운 나눔의 신비를 통하여 풍요로워 지는것! 의심조차 낭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 순명, 친절도 더욱 익숙해 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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