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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의 아버지' 정일우 신부 3년째 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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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택 [panzi] 쪽지 캡슐

2008-05-04 ㅣ No.120092

 
철없던 젊은날...신부님 손잡고...미사하던 때가 떠오르니...눈물이 납니다.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실 신부님이 아니심을 제가 아니...어찌 기도해야하오리까.
하느님, 이 아름다운 신부님의 고통 저도 함께 나누게하소서,...
 
 
연합뉴스

<`빈민의 아버지' 정일우 신부 3년째 투병>

기사입력 2008-05-04 07:03 |최종수정2008-05-04 08:59
 
 

빈민운동의 아버지 정일우 신부

34년 간 노동ㆍ빈민운동 투신하다 2005년 중풍으로 쓰러져

"귀화한 한국은 나의 나라…이 땅에서 죽고 묻힐 것"

(서울=연합뉴스) 이한승 기자 = 빈민운동의 대부이자 `파란눈의 신부'로 유명한 정일우(본명 John V. Dalyㆍ73) 신부가 3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 중인 사실이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정 신부는 현재 부축 없이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고 숨이 차서 10분 이상 말하기도 힘든 상태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정 신부는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1963년 실습이 끝난 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고(故) 바실 M. 프라이스 신부(Basil M. Price. 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서강대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친 국내 노동 운동의 선구자다.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에서 강의를 하던 정 신부는 1972년 학생들이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당시 정 신부는 학생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학교까지 그만두고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시내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정 신부 곁에는 항상 고(故) 제정구 전 의원이라는 든든한 동지가 있었고 이들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이들의 활동상과 철거민의 아픔을 그린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1988)'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 신부는 4일 당시 활동과 관련해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며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그는 1998년 귀화한 뒤 충북 괴산에 농촌 청년의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정 신부는 2004년 말 단식 도중 처음으로 쓰러졌다가 2005년 7월 중풍으로 다시 쓰러진 뒤 모든 활동을 접고 화곡동 그리스도신학대 내 말로이시오 공동체에서 요양 중이다.

정 신부는 "처음에는 빈민을 돕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활동을 하다보니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게 너무 좋았다"며 "내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고 죽은 뒤에 묻힐 한국은 나의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jesus786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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