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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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인가, 양심인가?(Pope or Con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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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kspeter] 쪽지 캡슐

2000-03-07 ㅣ No.578

 

 가톨릭 교회 가르침과 양심과의 갈등을 일으킨다고 느끼시는 분들을 위해 다음 글을 올립니다.

 

 

                            

 

교황인가, 양심인가?

(Pope or Conscience?)

 

자넷 E. 스미츠

달라스 대학교 철학부

 

Dr. Janet E. Smith, PhD

Dept. of Philosophy

University of Dallas

 

번역 : 김 신 베드로

 

   대학시절,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포기했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는 복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뉴만(Newman)의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달(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을 읽고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한 행복한 사건은 체스터튼(Chestereon)의 정통성(Orthodoxy)이라는 책을 발견한 것과 더불어 연계되었다.  정말로 나는 다시금 가톨릭 신앙을 되찾은 것에 대해 무척 자부심을 느꼈다.  노프르담 대학 인문 연구 프로그램(The Program of Liberal Studies)에서 가르치던 시절, 나는 뉴만의 대학의 이상(Idea of a University)을 가르쳤다.  우리는 가톨릭이라는 것과 대학교라는 것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인생의 고독하고도 혼돈스러웠던 시절들에서 뉴만의 기도들은 내게 매우 큰 위로를 주곤했고 그의 강론들은 위대한 통찰로 이끌어 주었다.  언제나 나는 그의 상승 문법(Grammar of Ascent)이 다소 엉성하다고 느꼈지만, 나는 정의할 수 없는 무엇과 진리를 길어내는데 있어 깊이있는 인격적인 무엇을 포착하려는 그의 시도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생활했던 공간이었던 매리 베일(Mary Vale)과 버밍햄 오라토리(Birmingham oratory)를 방문하였던 것은 그의 인격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개인 재단(齋壇) 바로 옆 벽에는 친구들의 쪽지들이나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뉴만을 도와줄 것들이었다.  뉴만 그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만한 이 매우 오래된 오라토리안은 뉴만이 그의 생애에서 자취를 남긴 모든 주요한 단계들이 기록되어 있는 한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가 추기경이 되었다는 짧은 설명과 더불어 그가 일찍부터 이룬 성취들을 고하고 있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기록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의 서재는 방대하고도 인상적이었다.  분명히 그는 그것을 활용했다.  뉴만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여기 위대한 지성과 광범위한 학습과 깊은 신앙을 지닌 사람이 있다.  나는 뉴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의 용기와 관용과 품성과 충실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그의 경이로운 글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나는 그의 글들을 세 번까지 읽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축북을 느낀다.)

 

  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에 관한 나의 저술과 활동은 양심에 관한 뉴만의 경이로운 작업들과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양심의 역할은 현대 가톨릭 도덕 사상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차지해 왔다.  그것은 철학적 작업들에서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요한 바오로 2세)를 사로잡은 주제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토픽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 양심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객관적 도덕 준거를 식별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실에 대한 주관적 판독을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오셨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은 진리이지, 우리의 모든 욕망들을 채우려는 기회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성은 양심에 대한 순종 안에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 양심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반대자들은 양심 사안이라 부를만한 명제를 고안해 내었다.  그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 가르침에 반대하여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양심의 자유를 불러 일으키는 명제이다.  

 

  반대자들(Blackguards)은 뉴만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인간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양심의 권리를 옹호할 때, 그들은 결코 피조물(creature)로서의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고(思考)와 발언과 저술과 행동의 권리를 의도한다.

 

  그러한 그들의 태도는 양심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와 엄청난 갈등을 일으킨다.  뉴만이 언급한 바대로이다 :

 

  양심이란 원시안적인 이기심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부합하려는 욕망도 아니다.  그것은 그분[하느님]으로부터의 메신저이며, 베일 뒤에서, 본질적으로 은총으로써 우리에게 말을 하며, 하느님의 대리자들에 의해 우리를 가르치고 규제한다.

 

  양심은 교회와 교황의 인도로부터 벗어나기보다는, 그러한 인도를 매우 필요로 한다.  뉴만은 다음과 같이 통찰한다 :

 

  종교의 첫 번째 요소라 할 수 있는, 옳고 그르다는 인식은 너무도 섬세하고 너무도 쉽게 모호해지거나 왜곡되며 그 논쟁 방법에 있어 너무도 미묘하고, 교육에 의해 각인될 수도 있으며, 자존심과 열성에 의해 너무도 어긋나 버리고, 그 과정에 있어 너무도 항구치 못하기 때문에, 인간 지성의 다양한 실행과 개가(凱歌)들 가운데에서의 존재를 위한 노력 중에 이러한 인식은 모든 교사들 중 가장 으뜸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희미한 채로 남아 있다.  교회와 교황과 교계(hierachy)는 그 신성한 목적 안에서 그러한 긴급한 요구를 채워준다.

 

  많은 신학자들은 교회와 교황이 양심의 자유에 장애가 된다고 단정해오고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은 맹목적 순종을 너무도 역겨워하기에 오히려 맹목적 불순종을 훨씬 더 편안해한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많은 신학교들에서 신학생들은 피임(contraception)에 대한 신자들의 양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오고 있다.  신자들은 이러한 이슈에 있어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데 아무런 제약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많은 가톨릭 고등학교들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들은 일반적으로 피임에 대한 가톨릭의 단죄를 모호한 문장으로 기술한 후 그러한 양심 명제를 제시한다.  그러한 양심 명제가 인종주의나 인종학살, 또는 사회정의 항목들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연히 대조가 된다.  그러한 텍스트들은 만일 당신의 양심이 인종주의자가 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할만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당신이 인종주의자가 될 수 있다라고는 결코 기술하지 않는다.  그러한 양심 명제는 오직 피임에 관한 항목에만 등장할 뿐이다.  블랙가드들(Blackguards)!

 

  슬프게도, 때때로 뉴만은 양심이 교회 가르침을 누를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듯 오인받을만한 발언을 한다.  놀포크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의 유명한 건배담(乾杯談) ― 즉, 좋으시다면, 교황을 위해서 건배하겠소.  그러나 우선은 양심을 위해 건배를, 그후 교황을 위한 건배를 하겠소 ― 은 뉴만이 교회 가르침 위에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흔히 해석되는 바와 다른 맥락에 있다.  뉴만은 가톨릭 교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분으로서의 교황이 아니라, 구체적인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신자들에게 명령하는, 즉 교황이라할지라도 무류성을 누릴 수 없는 영역에서의 교황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만은 피임에 대한 단죄와 같은 도덕적 교리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뉴만은 우리가 금주해야 한다든지, 직업을 강제로 할당하라는 등과 같은 무류성과 관련 없는 내용들을 교황에 대한 예로 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영역들 안에서, 뉴만은 양심이 자유분방한 플레이를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만일 어떤 특별한 경우, 교황의 목소리에 반대하기 위해 양심을 신성하고도 권위있는 준거로 삼으려 한다면, 그 양심의 명령은, 의문시되는 사안에 관한 올바른 판정을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들과 진지한 생각과 기도를 수반해야 한다.  교황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되겠다거나 감히 그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에게 말할 수 있지 않고서는, 그는 그러한 교황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며, 그것에 불순종함은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여기서 뉴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만일 가톨릭 신자의 양심이 교회를 거스른다면, 가톨릭 신자는 교회가 옳고 자신이 그르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하며, 양심은 언제나 자신의 정신의 정점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양심은 교회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뉴만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자신의 양심에 따른다는 명목하에 저질러지는 해이와 세상과의 영합에 구토증을 보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자가당착에 빠지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려는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자신을 확신시키려는 합리화에 우리가 얼마나 능숙한지에 대한 날카로운 센스를 갖고 있었다.  강론, 양심의 증언(The Testimony of Conscience)에서 그는 진정한 양심의 사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저는 하느님 당신을 위해 이러한 가슴에 품은 소망과 욕심과 나약함, 계획, 의견을 희생합니다.  저를 당신께서 의지(意志)하시는대로 조성해 주소서.  저는 그 무엇과도 영합하여 거래하지 않겠나이다.  당신께서 저를 어느 곳으로 이끌고 계시는지 미리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의도하시는 대로의 저, 당신께서 조성하고자 하시는 대로의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따라 갈 거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저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께서 저를 어느 곳으로 이끄시든지 제 자신을 당신께 맡겨 드립니다.  저는 어두움 속에서도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다만, 저의 밝았던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제게 힘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오 주님, 저를 시험하시고 제 마음의 바탕을 살펴 주소서.  저를 검증해 주시고 저의 생각을 걸러 주소서.  제 안에 어떠한 방향으로든 사악함이 있는지 헤아려 솎아내 주소서.  어두운 구석구석 당신의 눈부신 빛을 비추어 주시고, 저를 영원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소서.

 

  이러한 그의 말씀들이 감동적이면서도 우리를 뒤흔드는 것은, 그 말씀들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러한 말씀을 하면서 그가 그 말씀을 진정으로 의도했고 그 말씀을 살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뉴만도 잘 알고 있었듯이, 자신의 진정한 양심에 충실한다는 것은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별다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양심에 말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뉴만은 그의 양심을 따랐고 그러한 양심은 그를 교회로 이끌었다.  교회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이끄는 양심에는 절대 귀기울이지 말자.  뉴만이 자주 언급해왔듯이, 이러한 경우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 오직 양심의 탈을 쓴 무엇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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