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제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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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희 [kohthea] 쪽지 캡슐

2012-06-12 ㅣ No.953

 

 

 



제2기 사회교리학교 - 아픔의제주역사1



제2기 사회교리학교 - 아픔의제주역사2



아픔의 제주 역사  

박 찬 식 (시메온)

 Ⅰ. 강의에 앞서서

제주 역사 전체를 통틀어 수많은 섬사람들이 희생된 정치사회적 사건으로 우리는 고려시대 일어난 ‘삼별초란’, ‘목호란’, 그리고 근현대의 ‘신축교안(이재수란)’과 ‘4・3사건’을 거론한다. 자연재해나 돌림병으로 인한 떼죽음은 예외로 하면 그렇다. 그런데 봉건시대도 아닌 산업화・민주화와 합리주의를 내세운 근현대에 와서 수백 명 수만 명이 죽어나간 집단희생이 이루어졌을까?

사회교리를 공부하는 우리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내 고장의 아픔의 역사부터 먼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과제라고 본다. 특히 한 사건은 제주 천주교회의 역사와 직접 관련되어 있고, 또 하나의 사건은 제주도민 전체와 연관된 사건으로서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역사라고 하겠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각 사건이 교회에 던져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Ⅱ. 신축교안(1901)

1898년 ‘방성칠란’이 진정된 지 3년 만에 제주근대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인 ‘신축교안(소위 이재수란)’이 터져 나왔다. 1901년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신축교안’은 대한제국 정부의 봉건적 수탈에 저항한 민란이면서, 천주교와 토착문화가 충돌한 사건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교안의 주요 원인으로는 세금징수의 폐단(세폐)과 천주교회의 폐단(교폐)을 들고 있다. 먼저 세폐를 보도록 하자. 전제군주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황실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내장원에서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을 1900년 제주도에 내려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무리한 징세를 하였고, 심지어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구나 그는 지금까지 징세를 담당하던 지방관・향리・향임 세력들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징세를 함으로써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다음으로 이 사건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교폐를 보자. 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됨으로써 전교하기 시작한 제주의 천주교회는 전교 담당국인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여 교세를 키워갔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神堂)을 파괴하고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루어져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의 오신락(吳信洛) 노인이 하논성당에 끌려가 죽는 사건이 터지면서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일부 교민들은 봉세관 강봉헌의 중간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하였다. 이러한 세폐와 교폐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정군에서는 상무사(商務社)가 조직되어 교민들과 사사로운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폐단 가운데 하나만이 원인이 되었다면 이 민란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봉세관의 징세는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에 대한 민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교폐로 말미암은 향촌사회에서의 관・민 대 교회 사이의 충돌 또한 다른 지역에서도 빈발하여, 이들 사건을 당시 신문에서는 ‘교안(敎案)’이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1899년 강경포(江景浦)교안, 1901년의 지도(智島)교안, 1902~3년의 해서(海西)교안 등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교안은 위 두 가지 폐단이 결합되었다는 데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보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민란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결국 1901년 5월초 중앙의 조세수탈에 저항한 민회(民會)가 열리고 민란은 시작되었다. 봉세관의 조세수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5월 10일 강봉헌은 배편으로 도망쳐버린 데다 5월 14일 교회측의 한림민회소 습격에 이은 대정성 진입 발포사건을 계기로 민군과 교회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장두로 나섰던 오대현(吳大鉉)은 체포되고 대정군 관노(官奴)이며 인성리 이강(里綱)이었던 이재수(李在守)가 강우백(姜遇伯)과 함께 장두로 나서게 되었다. 민군은 동・서진으로 나뉘어 도민들을 규합, 세력을 강화시켜 제주읍성 남쪽 황사평에 주둔하였다. 이로부터 민군과 제주읍성으로 쫓겨 들어간 교민들 사이에 상호 살상이 이어졌다. 결국 서로의 접전 끝에 5월 28일 제주성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자, 민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고 교민들을 관덕정 앞에 모여 놓고 살해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민란의 전개 과정은 따로 작성한 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 교안의 전개 과정

단 계

날 짜(양)

전개 과정

발 단

5. 6

상무사와 교민들과의 충돌, 대정군민의 민회 개최

정소운동

5. 9

민란참여자들이 세폐 시정 위해 제주읍성으로 향함.

교민들이 제주읍내 교회로 피신,

민군이 두 무리로 나누어 제주읍성으로 향함. 교민의 무장 준비

5. 10

라크루 신부 서울에서 돌아옴, 봉세관 강봉헌 피신

민란의 확대

5. 14

교민의 한림민회소 습격, 오대현 등 장두 체포. 교민의 대정성 진입, 발포, 주민 1명 피살. 이재수, 민군의 대장으로 등장

5. 15

민군, 일본인으로부터 무기 구입

5. 16

교민, 제주읍성 폐쇄, 대포 설치

5. 18

교민, 제주읍의 무기 탈취, 무장. 민군에 대한 공격.

교민의 공격으로 주민 다수 피살, 민군의 감정 격화

5. 20

교민 장윤선 목포 파견, 프랑스함대 원조 요청

5. 23

교회측, 오대현 석방

5. 24

민군의 교민 살해가 심하여짐. 민군의 성 포위, 간헐적 공격

5. 25

제주성내 주민들의 개문(開門) 요구

교민 살해

5. 28

개문, 민군 입성, 교민 집단 살해

5. 31

프랑스함대 2척 도착, 이재호 목사 부임

5.28 -6.8

교민 살해가 계속됨

6. 9

불함 1척 도착, 교민 50여 명 목포로 피신

민란의 진정

6. 10

찰리사(察理使)・군인 도착, 민군에 대한 해산령

6. 11

민군 대표 체포

 당시 교안의 과정에서 피살된 자들은 대부분 교민들이었다. 교회측에서는 대체로 5백~7백명 정도가 피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당시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 안종덕(安鍾悳)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숫자는 교민 309명, 평민 8명이었다. 이 숫자는 샌즈(W.F.Sands)가 상경하여 고종 황제에게 보고하였던 쌍방 간 3백 명이란 숫자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제주교안이 진정된 1902년 제주에 남아 있던 교민 강인봉(姜寅奉)이 남긴 서한에 따르면, 교민들 중에 피살된 자가 350~360명이라 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프랑스 군함 2척과 일본 군함 1척이 출동함으로써, 제주도를 둘러싸고 열강 간에 충돌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 고조되었다. 결국 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이 파견되어 와서 이재수 등 민군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하여 감으로써 사건은 진정되었다. 1901년 10월 이재수・오대현・강우백 등 세 장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피살된 교민들 중 연고가 없는 이들의 시신은 별도봉 하천에 방치되었다가 뒤에 천주교 공동묘지가 된 황사평에 묻히게 되었다.

‘신축교안’ 이면에는 기존의 향권(향촌사회의 권력)을 위협하는 외래적 요소인 천주교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사회경제적・문화적・종교적 반감이 작용하였다. 특히 사회세력화된 천주교회는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토착세력을 상당히 위협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심하게 배척을 받았다. 교민들이 각 마을의 신당과 신목을 빠짐없이 훼손한 것은 제주민들에게 문화적 충돌을 넘어서서 생존기반을 위협하는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봉세관의 독점적 징세권 행사에 대하여 기득권자였던 지방・향임층・향리층들이 더욱 반발하였고, 여기에 기층민들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저항이 중첩되면서 민란으로 터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 민란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봉세관과 천주교회의 세력화 과정에서 빚어진 제주민의 전계층적인 반발로 볼 수 있다.

‘신축교안’은 20세기 벽두인 1901년 한국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외래문화와 토착전통문화, 외세와 대한제국, 국가와 지방 사이의 충돌로 빚어진 총체적 사건이다. 변방 제주섬도 한국을 둘러싼 외세 열강들의 침탈이 횡행하는 국제정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Ⅲ. 제주4・3사건(1947∼1954)

 [정의]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백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천5백 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 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이 공포되었고,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Ⅳ. 강의를 끝내며

 신축년 제주교안은 한국과 제주지역의 천주교회에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축교안을 통하여 천주교회는 순수 신앙집단으로 사회에 비춰진 게 아니고, 세속적인 힘을 가진 세력으로 인식됨으로써 교안의 전개과정과 결말 이후에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은 한동안 우호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의 경건주의와 토착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빚어진 무리한 선교 방식은 주민들의 반발을 삼으로써, 교회에 대한 배척을 가져오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우리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이러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선교 방식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교우들이 교안의 과정에서 수난을 당하였다는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곰곰이 되새겨볼 문제이다. 우선 민군의 교우 학살은 아무리 교회의 폐단을 시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민란을 일으키고 장두(狀頭) 세 사람이 처형당하였다고 하여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명 학살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신앙의 측면에서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지 2년도 채 안된 척박한 교회의 여명기에 엄청난 시련을 겪음으로써 제주교회는 당분간 성장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당시 신아오스딩・나안토니오・이규석 등과 같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한 자들이 있음으로써 우리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축교안의 진원지였고 순교자가 많이 나왔던 서홍리・대정・신창・제주읍내의 교회들이 오히려 교안 이후 타 지역에 비하여 교세가 성장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신축교안에 대해서는 역사적 해석과 더불어 신학적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축교안의 과정에서 순교하였던 제주 천주교회의 선조들의 죽음은 당시 사회의 부패상과 죄악상에 대한 대속(代贖)이었고, 미래의 제주 교회를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보인다.

제주도의 천주교회는 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어 오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 교회의 초창기에 신축교안과 같은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한 제주교회는 1999년에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우리 교우들은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이 시작된 시점에서 더욱 굳센 신앙을 약속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4・3사건으로 돌아가신 수많은 영령들을 기억해야 한다. 수만 명에 달하는 이들의 죽음은 당세대 및 후세대 제주도민들을 대신한 죽음이었고, 이 또한 십자가 희생양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4・3사건 때 왜 수많은 죽음이 있었는가? 세계 최강국 미국과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무엇을 했던 것인가?

4・3사건은 세계 냉전구도와 한국의 분단체제가 빚어낸 사생아였다. 미・소와 한반도의 남・북이 관련을 맺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제주섬사람들에게만 상처를 남겨 놓았다. 제주사람들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이념과 공권력에 휘둘린 채 국민・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 한 마디 없이 탄압으로 일관했다. 1948년 4・3봉기에 대해서도 김익렬 제9연대장이 주장한 선무작전을 수용했다면 뒷날 엄청난 인명 피해는 비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신생 대한민국이 4・3을 ‘반란’으로만 여기지 않았어도 민간인 대량 학살을 가져온 초토화 작전은 강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이 4・3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기본 인식이 천박함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4・3사건은 단순한 인명살상이 아니라 ‘레드헌트(Red Hunt)’란 표현처럼 제주도민을 인간이 아닌 사냥감으로 여기며 집단 학살시킨 ‘제노사이드(genocide)’에 해당된다. 4・3사건 당시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성찰, 민족공동체로서의 동질감이 있었다면 민간인 대량 학살의 사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령에 대한 추념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인간적・종교적 의미로서 4・3사건이 갖는 교훈이 존재한다.

우리는 제주도에서의 두 사건을 되새기며 문화의 억압과 분쟁, 군사적인 전쟁과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명 학살이 없는 세상에 살아야함을 절감한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바라보는 시민사회와 교회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가 강한 주체인가? 누가 누구를 감싸고 보호해 주어야 할 것인가? 법과 절차, 국가정책만을 따지면 국민과 강정주민들은 누구에게 의존할 것인가? 왜 국가는 제주도민들끼리 싸우게 놓아두고 있는가? 평화와 대화의 해법을 통해서 국가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풀어나가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오늘 제2기 사회교리 마지막 강의 시간을 통해 제게 주어진 <아픔의 제주 역사> 강의를 통해 이러한 사회와 역사 인식에 대해 묵상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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