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묻고답하기 천주교 ㅣ 성경 ㅣ 7성사 통합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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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근 [mcho90] 쪽지 캡슐

2013-08-07 ㅣ No.7178

고백합니다

 

정성껏 답해주신 선배님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여러 선배님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종”들이십니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도 시간과 정성, 그리고 신앙을 나누시려는 아름다운 모습들....

선배님들이야말로 평신도로서의 보편사제직을 성실히 수행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로 등장하는 이 “예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만났습니다.

선배님들이야말로 바로 “사도행전의 29장을 손수 써내려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선배님들이 그렇게 보입니다.

기대한대로 역시 선배님들은 모두 올바른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종”의 길이란 “예수님 닮은 삶“이고 그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라는 것.

즉 겸손하며, 충성하고, 헌신하며, 순종하고, 나누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이라는 것.

 

이곳 굿뉴스도 그런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라진 형제들‘이 들어와 읽어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길이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권할 수 있는 길이면 좋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제 자녀들에게 막지 않고 권하는 그런 길이면 좋겠습니다.

선배님들이 일러주신대로 노력하여 마침내 제가 그 길에 다다랐을 때,

이미 그 노정을 걷고 계실 선배님들을 꼭 만나는 그런 길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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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새카만 신앙의 후배입니다.

감히 선배님들의 존함 뒤에 “---님“이란 호칭을 쓰기에도 어색하고 송구스러운 그런 어린 나이입니다.

유아세례 받고 습관처럼 신앙생활을 하며 자란 제 또래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이러한 제가 이곳에서 질문을 올린 이유가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실망과 좌절보다는 힘과 희망을 주십사고 청하는 간절한 호소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들었던 이 공간에 등을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종”에 대한 선배님들의 의견을 먼저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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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이곳 사이트를 소개해 주신 분은 제 부친이셨습니다.

제 신앙의 성장에 도움이 되라는 부모의 심정이셨겠지요.

굿뉴스에 가입은 안했지만 그 뒤 시간이 날 때마다 최선을 다 해 많은 글을 읽었고

때로는 감탄도 하고 때로는 실망도 했습니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아직도 이 공간에 들어가는지를 물어보시더니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더 이상 이곳의 글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어렵게 하시더군요.

서로 말은 안 해도 부자간에 충분히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가족 사이의 신앙의 교감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이심전심... 비슷한 그런 것 말입니다.

하지만 정들었던 이곳을 그냥 떠나기가 마냥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밤에 용기를 내서 굿뉴스에 가입하고 바로 선배님들께 질문을 드린 겁니다.

질문과 답변 코너에서 무작정 제 마음을 쏟아놓기가 힘들었던 겁니다.

이곳을 멀리하라는 아버지 뜻을 어긴 것 같아 마음은 몹시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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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질문을 올리고 마침 오늘 아침 성무일도 제2독서기도를 읽으면서 선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빛의 길 - 바르나바가 쓴 것으로 보는 편지에서

 

빛의 길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찾고 이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이 따라야 할 준수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중략)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모든 것을 당신도 싫어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위선을 증오하고 하느님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높이기보다 만사에서 겸손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 것입니다.

당신 이웃을 거슬러 계략을 꾸미지 말고 당신의 마음 속에 오만한 생각을 품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 (중략)

오만한 사람들과 멀리하고 겸손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귈 것입니다.

생각과 말에서 이중성을 피할 것입니다. 이중적인 말은 죽음의 올가미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이웃과 나누고 어떤 것이든 당신 것이라고 말하지 말 것입니다.

---- (중략)

말하는데 너무 성급히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 것입니다.

입술은 죽음의 올가미입니다.

---- (중략)

주는데 주저하지 말고 줄 때 투덜대지 말 것입니다.

---- (중략)

당신이 받은 전승을 보존하고 거기에다 아무것도 덧붙이거나 삭제하거나 하지 말 것입니다.

---- (중략)

판단할 때 공정을 기하고 결코 분열을 조장하지 말며

원수들을 화해시키고 거기에다 평화의 씨를 뿌릴 것입니다.

---- (중략)

이것이 빛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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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서는 우리의 손가락이 바로 우리의 입술일 것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가슴앓이하며 지켜 본 후배가 모든 선배님들께 몇 가지 청을 드립니다.

 

1. “적어도 가톨릭 신자라면 ---쯤은 읽고(알고)--- 질문을 하시오” 라는 표현과 시선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졸 이상의 학력만 이력서 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시험보고 가려서 학생들을 뽑는 일부 변태 학원들이 주도하는 사교육 시장은 아니잖습니까?

답변하시기에 가당치도 않은 수준 낮은 질문이라면

면박을 주시기보다는 차라리 답변을 안 하시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요?

더구나 믿는 이들의 공간에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노력하고 애쓰는 우리 마음을 보시지 지식의 차이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2. 적어도 질문하기까지 망설였을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소신껏 답변해주시는 분들의 용기도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모든 이의 기준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거나 성에 차지 않는 답변을 했다가는 욕만 먹고 망신만 당하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나서기를 주춤거린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일이겠습니까?

낮은 수준의 질문과 답변들이 영 견디기 힘드시다면

차라리 그런 높은 수준의 선배님들만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시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줄이는 일 아니겠는지요?

또한 침묵하시는 다수의 분들 가운데 더 깊고 넓은 신앙의 식견을 지닌 분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 않을까요?

결국 질문과 답변에 대한 판단은 이곳에 들어오시는 분들의 몫이요,

그분들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일 겁니다.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초자연적인 신앙 감각(Fidei Sensus)이란 것도 작용하리라 봅니다.
 

3. 특정 글에 대해 평가하는 글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가급적 삼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수의 평가에 즉각 송곳처럼 반응하기보다는
“귀 기울이고 마음에 간직하는” 성모님 닮은 겸손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한 직접적 평가는 아니지만 자신이 표현한 글의 格(격)에 대한 느낌일 테니까요.
(사실 성모님 교리에 대한 개신교 형제들의 비난에 울컥하기보다는 우리가 성모님 닮은 겸손과 순명의 삶을 보인다면 그 누가 성모신심을 비난하겠습니까?)

 4. 선포하는 예언자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고(왕직), 성화하는(사제직) 직무도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 직무들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르침을 전달하는 사람의 모습이 모두 유능한 학원의 스타강사나 ‘마이클 샌델’ 같은 유명 교수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어눌하지만 자상하고 진실된 선생님들이 더 존경스럽지 않을까요? “성경 묻고 답하기” 라는 코너가 “가르치고 공격하기”보다는 “섬기고 나누고 격려하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5. 특정인을 차단을 한다든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읽지 말라”는 방식의 편 가르기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렇게도 없애려고 하신 분열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비약일는지 모르지만 타종교인일지라도 군말 없이 내 뜻에 동조하면 들어와도 좋고(설사 호기심이라도) 같은 형제자매라도 나와 뜻이 다르면 아예 얼씬도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이런 글들이 사라지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비슷한 말씀하신 것은 이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3,33)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3,34-35) 

6. 칭찬과 감사는 마땅히 그리고 자주 나왔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를 향해 가려고 애쓰는 모습에 대한 격려의 의미로 사용되어야지 나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에 대해 선별되어 사용된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자칫 ‘내말이 옳았다는 것이 인정받았음‘이라는 그릇된 확신과 교만을 키울 뿐 아니겠습니까? “그가 네 앞에서 달콤한 말을 하고 네가 하는 말에 탄복하리라. 그러나 나중에 그는 제 말을 바꾸고 네가 한 말로 말썽을 일으키리라”(집회27,23) 

7. 윗글에서 바르나바 사도는 “가진 것을 모두 이웃과 나누고 어떤 것이든 당신 것이라고 말하지 말 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배님들이 소중한 시간과 정성을 이곳에서 사용하시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무상으로 얻으신 선물을 되돌려 나누려는 순수한 마음 때문일 겁니다. 굿뉴스 자료실에는 주호식 신부님께서 실어 나르시며 나눠주시는 수많은 매체의 주옥같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짐꾼이신 신부님께서는 어느 글 하나에도 개인의 의견을 표하시는 일 없이 묵묵히 소명을 다 하십니다. 바로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그리고 평신도 전문가들이 각 분야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기도하며 입술 대신 손가락으로 올리신 각고의 결실들입니다. 그 글 가운데 어느 것도 복사를 금지한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나눔입니다. 진정 공동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공간에는 일부 선배님들이 복사를 금지시키십니다. 노력하신 결과와 힘든 과정은 무한히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일이었을까요? 누구를 위한 일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종”이 길이 나눔의 길이라면 그 길을 따를 수는 없을까요? 내가 거저 받은 탤런트를 공유하면 안 될까요? 거저 받은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이미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나누면서 남들은 허용하는 복사를 나의 글에는 금지하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질문자에 대한 주님 사랑의 응답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성취욕, 명예욕 등이 조금은 담긴 것 아닐까요? 선배님들, 부디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노력의 결실이 형제자매의 성장에 이바지한다면 얼마나 축복받는 일이겠습니까? 주님이 정녕 기꺼워하실 일일 겁니다.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될 겁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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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복사 방지가 되지 않은 너무 좋은 자료가 있어 허락 없이 인용해 봅니다.  

선배님들의 넓으신 이해 바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가 여섯 가지로 분류한 "성령모독죄" 

1. 절망/자포자기/단념(despair) 

2. 주제넘음/무례(無禮, 신분/분수를 벗어남)/자의적(恣意的) 추정/망망(妄望)(presumption)

3. 뉘우치지 않음(impenitence)  

4. 완고함(obstinacy)  

5. 알려진 진리에 대한 저항(resisting the known truth)  

6. 다른 이의 영적 선에 대한 질투(envy of another's spritual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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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글이 길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난이 쏟아질는지 많이 걱정이 됩니다만 결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일체 반응은 안하겠습니다.  

교만하거나 건방져서가 아닙니다. 단지 제 연륜에서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죄송합니다. )   

마치 고해성사 끝에 보속 기다리는 기분입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운인가”(정호승 詩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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