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455에 대한 답변

스크랩 인쇄

박경숙 [rosapks] 쪽지 캡슐

2000-01-22 ㅣ No.459

1. 가부장제도에 대하여

 

가부장제도란 남자를 지배자의 위치에 두는 모든 제도를 뜻하며 대부분의 사회문제의 근원이라고 간주된다.

오늘날까지 체제보편적, 문화보편적으로 남성중심의 사회제도를 대변하여 주는 것이 가부장제도이다.

 

이 가부장제도의 기원은  원시공동체사회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전후의 유대사회는 물론 가부장제하의 사회이었으며 물론 가톨릭교회이전부터 가부장제도는 존재하여 왔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예수운동으로 시작하였다.

예수는 그 당시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예수의 말과 행적은  변화를 넘어선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신앙은 계급의 위계체제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지만 성차별에 대해서는 그와 유사한 저항을 조금도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해서("구실"이 될 수는 없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첫째로, 사회 이데올로기에는, 심지어 해방 이데올로기에 있어서조차도 지식 사회학이 항상 존재한다. 부유한 도시인들이나 지배적인 제국에 의한 억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 남성 예언자들은 가부장제적 가족 속에서는 부양가족들-여성과 노예-에 대해 그들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것을 전혀 비슷하게나마 의식하지 못했다. 오직 자신의 억압을 의삭하게 된 여성의 등장에 의해서만 비로소 저항의 범주가 여성에까지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야훼 신앙 속에서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로, 기본적 계층화가 몇몇 여성들을 그 권력의 테두리 속에로

통합시키고 있을 경우, 여성을 억압당하는 성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인간의 왕과 아버지에 의한 예속의 굴레를 파괴하기 위해 신권과 신적인 부권이 사용될 때 "하느님의 언어"는 다시 한번 반가부장제적으로 사용된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상들의 무덤을 등진 채 가족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서만 비로소 하느님과의 계약관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출애굽의 하느님은 지배 군주들과의 유대를 끊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전통들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된다.

초기의 예수 운동은 혈연적인 유대나 주인-노예관계에 기초한 지배-종속 관계로부터 공동체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복음의 전통에서 보면 새로운 예수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가족의 유대 및 그에 대한 충실성과 단절하도록 만든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모와 형제 자매를 "미워해야" (즉, 그들에 대한 충실성을 떨쳐버려야)만 한다.

 

가부장제적인 가족은 모두가 형제 자매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에 의해 대체된다.

이 공동체는 주인과 노예,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동등인들의 공동체다.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복종하라"는 외침은 아마도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지속적인 신학적 지주가 되어왔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여성은 가부장제적 권위와 반대되는 자신들의 권위와 자율성을 주장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이러한 개념을 찾아냈다.

여성의 재능을 완전히 실현시킬 새로운 공동체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형성하라는 하느님의 부름은 그들에게 의무에 충실한 딸이나 부인으로서 집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가부장제적 권위를 완전히 압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새로운 공동체가 지배적인 사회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고 나면 아버지와 왕으로서의 하느님이 다시 전통적이 가부장제적 관계속으로 동화되어 인간의 군주권과 가부장제의 권위를 신성화하는데 이용될 수가 있다.

(예수운동->사도들에 의한 초대교회->교부시대의 교회->로마의 국교->위계적인 제도교회-중세교회->종교개혁->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그리고 2000년)

 

예수는 막힘이 없는 분이셨다. 예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분이셨다. 남녀 교제가 허용되지 않던 당시에 예수는 거침없이 여자들과 상종할 뿐더러 갈릴래아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전도하셨다.

예수 수난 때 남자 제자들은 모조리 스승을 버렸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의 임종과 장례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예수께서 남자들 가운데서만 열두 제자를 뽑으셨으나 이는 야곱의 열 두 아들, 곧 이스라엘 백성을 죄다 포섭하시겠다는 상징적 처사였다.

예수의 열두 제자 발탁을 근거로 여자들에게 사제직을 거부하는 것은 주석을 뛰어넘는 비약이라는 게 신약학계의 통설이다(정양모 신부님)

또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교육하여 이스라엘 각지로 보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케 하셨다.

 

그런데 당시 사회 실정으로는 여자들이 낯선 고장으로 파견되어 전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화적 실정을 고려하여 남자들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발탁하셨던 것이다.

열두제자 문제에 더 자세히 알려면 쉬쓸러 피오렌자가 쓴 <동등자 제자직> 128-137을 읽으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바울로 서간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로의 여성관은 이중적이다.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남녀평등사상을, 헬라 유대인으로서는 남존여비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사도 교부시대에 이르러 성직에서 여성을 제외시키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95년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사도들은 감독들과 원로들과 봉사자들 등 성직자들을 파견한 까닭에, 이들 성직자들을 거역하는 것은 사도들.그리스도.하느님을 거역하는 죄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세 계급 성직에서 제외되었다.

110년경 로마에서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도 스미르나 교회로 써 보낸 편지에서  현행 가톨릭 성직제도와 같은 제도를 전제하면서 성직자들으 따르고 존경하라고 타이른다.

이런 교계제도는 지금까지 변함없다.

2천 년 교회사상 서방 가톨릭 교회에서 여자에게 사제직은 고사하고 부제직을 수여한 적도 없다.

 

20세기 가톨릭에서 교황청의 신앙교리성은 1976년 10월 15일자로 <여성 교역

사제직 불허 선언>을 발표했다.

 

21세기 가톨릭의 전망

 

구약성서의 동태복수법(출애 21,24)은 예수님에 의해서 반복수법(마태 5,38-42)

으로 바뀌었다.

또한 구약시대의 일부다처제를 예수께서는 일부일처체로 바꾸셨다.

성서의 계시도 인류의 의식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사도 바울로 및 그의 후학들은 노예제도를 당연시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전세계적으로 노예제도는 인권유린으로 간주되어 철폐되었다.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캉의 인종차별도 1990년대에 와서 철폐되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느님의 계시는 신약성서로써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함께 계속되는 생생한 증거이다.

 

유엔 총회는 1967년 11월 7일자로 <여성차별의 철폐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였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남성과의 동등한 권리를 부인하거나 또는 제한하는 여성차별은 근본적으로 부당하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해이다"(제 1조)

"여성을 차별하는 기존의 법률. 관습. 규범. 관례를 철폐하기 위하여,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모든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제2조)

신선한 선언문이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고, 초세기 세례식 훈화(갈라 3,26-28)를 듣는 것 같다.

선언문에 담긴 남녀평등은 인류의 염원으로 장차 인류의 의식이 발전함과 더불어 점진적로 실현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처신을 눈여겨보면 하느님의 계시는 예수와 전통과 더불어 끝난 것처럼 보는 것같다. 계시의 역사를 닫힌 꼴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예시했듯이 계시의 역사는 열린 꼴이다.

진보적 가톨릭 여성주의자에서 탈그리스도교적 여성주의자로 변신한 미국 보스턴 칼리지 교수 메리 데일리의 외치는 소리를 그리스도교계는 그낭 흘려버려서는 아니된다.

"과거의 고유하고 폐쇄적인 ’계시’에 대한 사고 또한 성계급 체계의 산물이요, 그 체계를  영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사회를 닫혀있게 한다.....

성차별주의는 질병이며, 그것은 지구적 질병이다"(메리 데이릴 지음. 황혜숙 옮김, <교회와 제 2의 성>)

 

세상은 변한다.

요즘 세상은 더 빨리 변한다.

가톨릭도 변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변화속도가 문제다.



144

추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