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여성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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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rosapks] 쪽지 캡슐

2000-01-27 ㅣ No.476

1. 공동의 이익

 

’차이’와 ’차별’은 엄연히 다르다.

차이란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며, 차별이란 계급을 형성하여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 내지는 억압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공동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은사를(차이) 주셨다.

그리고 교회는 가부장제를 천명하지는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차별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장치에 의해 교묘하여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2000년이 되기까지 은폐하였으며 정당화하여 왔다.

 

가부장제에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하자면, 가부장제에서는 남녀를 문화적으로 구별하고,또 이 구별을 차별로 만들어 여성에 대한 남성의 문화적 통제와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는 첫 째,성역할 이데올로기이다. 성별이 선천적으로 주어진것처럼 성별에 따른 문화적 차이도 고정불변의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 성별분업을 이야기하는데, 임신, 출산, 수유(모유)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것-청소, 음식 만들기,설거지, 세탁등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 여성만이 해야하는 일이 아니다. 물론 교회안에서도 형제님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형제님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교회안에서 청소, 음식하기, 설거지 하기 등이 보기좋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형제님들도 보여주었으면 한다.

 

둘째, 모성이데올로기이다.

여성은 모성의 역할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교회의역사를 보면 많은 성녀가 여성으로써 모성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대 데레사성녀나 가타리나 성녀의 삶을 보면 모성의 실천만이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나 성공회에서는 여성성직자를 인정하고 있다.

개신교나 성공회의 하느님과 가톨릭 교회의 하느님은 다른 분이신가?

 

2. 여성의 소명

 

사회적, 종교적 힘은 없을 지라도 하느님게서 주신 소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영성이 여성의 소명이라고 했지만, 모든 신앙인의 소명이라고 했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소명,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소명, 그리고 지금의 소명!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왜 사이비종교에 빠지는가?

왜 에이지운동에 심취하는가?

현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기에 그런데 그 문제를 가톨릭을 포함한 기성종교가 그것을 해결하거나 도움을 주는데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에서는 한 사제가 한 본당을 맡아 사목을 합니다.

본당의 규모에 따라 보좌신부님이 한 분 내지 그 이상 계신 성당도 있지만.

그리고 그 분들이 본당사목 지침을 정하시고(물론 사목위워들과 협의하시겠죠)

그리고 주교님의 교구사목 지침을 정하시고. 하여튼 위에서 사목방향(정책결정)

을 정하시는 분이 모두 남성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가?

인간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이제 여성에게도 성직에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사제라면 어떻게 사목을 할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지금 김강자 종암경찰서 서장님이 자신의 관할 내의 윤락업소에 대한 정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미성년에게 매매춘을 시키는 풍토를 없애느냐고 열심하십니다. 아무리 미성년매매춘을 단속하고 미성년을 적발하여 가정으로 돌려보내더라도 남성의 수요가 있는 한 완전히 뿌리뽑히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과 청소년에 대한 전반적인 실재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왜 교회는 잠잠합니까?

청소년은 현재의 주인입니다.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많이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동참하여 해결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안에 있으니까요.

내가 사제라면 이 문제에 대해 지금의 교회처럼 잠잠히 있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차별이 없는 나라, 연대성의 나라,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나라입니다.

여성이 성직을 이야기하는 하는 것은 자신의 소명과 타인의 소명과 비교하여 불평등하고 불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데 남성사제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여성사제만이 할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나라,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3. 성모님에 대하여

 

마리아의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즉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 놓는 신앙심을 가지셨기에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잉태라는 순명은 여성만이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이런 이유만이 아니랍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마리아, 십자가 곁의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녀가 그리스도교신앙인의 삶을 살았기에 공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당신 유대의 풍습에서 혼인잔치는 보통 일주일정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혼인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 합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그 혼인잔치에 계셨는데 성모님의 예민함, 이웃의 어려움을 잘 알아채서 그 곤란함에 신앙으로 대처하심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그 곤란함을 알리셨으며 예수님을 믿으시며 보이셨던 태도를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교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지니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곁의 마리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갈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아래에는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곁에 이르기까지 아들과 충실히 함께 하셨던 마리아.

골고타 언덕에는, 직업적인 타성에 젖어 아무렇지도 않게 사형수의 옷을 나누던 군인들과 나자렛 예언자의 실패를 조롱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구했지만 자신은 구할 수 없는가 보구나, 이스라엘의 왕이렷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태 27,42) 그때 예수에게는, 당신의 어머니와 지극히 충실한 몇몇 친구들의 동정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신앙인은 형제들의 고통을 연민을 가지고, 현명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그 고통의 원인을 내부로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이 때 분산된 의견이나 방법들에 머무르지 않고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들의 요청과 제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노예제도를 인정한 성서의 구절은  디모테오 1서 6장 1절에

"노예들은 자기 주인을 대할 때 깊이 존경하며 섬겨야 할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갈증과 깊은

고독으로 얼룩져있다.

부족함 없는 풍요와

안락함을 누리며 이제

하느님이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하느님이 없어도

남을 괴롭히거나 자신을

죄로 타락시키지않으며,

지극히 상식적이고 너그럽고

여유있게 움직일 수 있는

품위있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더 이상

계실 자리가 없으시다.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어진 사람들 사이에

머무시며, 그들이 지닌

보화를 품위있는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대면하고자, 고통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겠다고

나서는 이들에게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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